[월요칼럼] 홀로 불가능과 싸워온 노회찬의 죽음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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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10:04 | 최종 업데이트 2018-07-30 10:04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그가 마을 뒷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한 시대가 끝났음을 알았다. 그는 바로 우리 시대였다”라고 썼다. “오월 광주의 죽음에서 시작”된 시대를 가장 폭넓게 대변한 노무현이 실패한 저항의 책임을 지고 “파멸을 선택함으로써, 적어도 비겁한 시대가 아니었음을 온몸으로 증명”하기 위해 “자기를 던졌”다고, 김상봉은 썼다.1)[시론] 한 시대의 종말을 애도함 / 김상봉

노회찬 의원이 서울 남산의 한 아파트에서 투신했다는 속보를 들었을 때, 나는 멍한 상태로 김상봉의 저 글을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노무현의 죽음으로 한 시대가 끝났다면, 노회찬의 죽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시대를 열고자 했던 희망이 사라졌다. 노무현의 죽음으로 1987년 완성되지 않은 정치적 민주화에 대한 도전이 좌절됐다면, 노회찬의 죽음으로 1997년 시작된 파괴적인 경제적 양극화에 대한 저항이 실패했다. 노회찬의 죽음은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는 노무현의 선언에 진보적 정책을 내밀며 벼랑 끝에 서 있던 한 정치인의 의지마저 꺾였음을 의미한다. 그가 경제적 양극화에 저항하기 위해 비난을 무릅쓰고 강화했던 민주노동당 정책실은 사라졌고, 그 정책실을 이끌던 이들은 노회찬 생전에 곁을 떠났거나 노회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민주노동당 정책실이 만들었던 무상급식과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과 같은 빛나는 정책들은 다른 정치 세력에 의해 전유되거나 누구도 얘기하지 않는 과거가 되었다. 노회찬의 죽음으로 그 정책들도 죽었다.

돌이켜보면, 아직 오지 않은 시대가 잠시 얼굴을 내민 적이 있었다. 2004년 4월 15일 오후 6시, 광화문 앞 동아일보 빌딩 위 대형 TV에선 국회의원 선거 출구조사 결과가 나오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역풍이 거셌지만,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으로 선거 막판 판세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의 주인공은 단연 열린우리당이었다. 최소한 ‘과반인 150석 이상 확보가 확실하다’는 문구가 떴다. 하지만 그날 광화문에는 TV 화면 한구석에 조연들이 띄운 ‘한 조각 희망’을 보고 환호하는 이들이 있었다. 한국 최초의 진보정당 의회 입성. 민주노동당은 비례 투표에서 13%나 되는 지지를 받아 8석의 의석을 확보했고, 지역구 2석까지 모두 10석을 차지했다. 비례대표 끝자리에, 김종필을 밀어낸 노회찬이 있었다.

그날이 화려한 시대의 시작인 줄 알았는데, 돌아보면 그저 벚꽃처럼 잠시 피어올랐던 짧은 절정에 불과했다.

하지만 잊지 않아야 할 건, 짧은 절정일지언정 결코 거저 온 게 아니라는 점이다. 노회찬은 그 짧은 절정을 위해 오랫동안 흙을 다지고 물을 뿌려온 지난한 과정의 증인이다.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 직선제를 쟁취한 기억은 뚜렷하지만, 민주화운동을 기폭제로 일어난 노동자대투쟁이 있었다는 기억은 우리에게 소거되어 있다. 노회찬은 이때 인천과 부천의 노동조합과 노동운동 단체들을 묶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인천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을 출범시켰지만, 1989년 인민노련 핵심 멤버들과 함께 검거돼 옥살이를 했다. 1992년 3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중당이 참패하면서 이우재, 이재오, 김문수와 같은 핵심 인사들이 보수로 전향하고, 1992년 연말 치러진 대선에서 민중 후보 백기완이 참패하면서 진보정당 운동에 회의가 팽배했지만, 출소한 노회찬은 묵묵히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사무총장과 대표를 맡았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또다시 많은 진보 인사들이 ‘최초의 정권 교체’ 명분을 좇아 김대중 후보 지지를 선언했지만, 그는 권영길 후보의 국민승리21에 남아 대선 득표율 1.2%를 딛고 민주노동당을 창당했다. 권영길은 “1997년 대선에서 진보 후보였던 내가 예상보다 낮은 득표율로 모두들 실의에 빠졌을 때, 다시 진보정당 추진 운동을 일으켜 세운 이가 노회찬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실패할 때마다 아직 오지 않은 시대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이들이 한 움큼씩 빠져나갔지만, 노회찬은 늘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런 노회찬이 남산의 한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아직 오지 않은 시대를 열고자 했던 희망을 노회찬마저 등졌다면 이제는 누구도 그 시대를 열 수 없게 된 것 아닐까 생각했다.

노회찬은 끝내 오지 않을 어떤 세상을 열기 위해 홀로 불가능과 싸웠다. 우리는 그에게 불가능과의 싸움을 위탁한 채, 무슨 일만 있으면 그를 비판하고, 그에게 책임을 물었으며, 그의 선택을 원망했다. “낡은 것은 죽었는데 새로운 것은 당도하지 않은” 상실의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노회찬을 낡은 것으로 규정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새로운 것을 하고 있다고 자위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하고 있는 건 우리가 아니라 노회찬이었다. 그는 새벽 버스를 타고 청소 노동 현장으로 가는 투명인간들에게 말을 건네 비로소 그들을 세상의 일원이자 정치적 동지로 불러냈고, 이제는 모두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삼성 권력이 모두의 열광적 지지를 받고 있을 때부터 삼성과 싸웠으며, 대체복무제 없는 법안이 위헌적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오기 14년 전에 이미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 법안을 발의했다. 장애인과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과 성소수자, 해고 노동자들이 줄줄이 추모 논평으로 노회찬의 삶을 증명할 때, 그는 우리 앞에서 다시 새로워졌다. 그러나 그가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는 말과 자신의 몸을 비수처럼 던지고 나니, 새로운 것은 꺾이고, 아직 오지 않은 시대를 열고자 했던 희망은 한 조각마저 다시 세울 수 없게 됐다.

진보 정치는 “암흑 속으로 돌진”한 상태다. 노회찬이 마지막까지 서 있던 세상은 기존의 체제에 대한 불신자들로 가득하다. 체제 불신자들은 정치가 기득권의 이익을 위한 짬짜미로 돌아가고, 지식인과 언론 역시 그런 체제에 부역한다고 여긴다. 체제에 대한 불신은 불온한 에너지가 되어 체제를 전복하는 동력이 되어야 하건만, 그 동력을 끌어안아야 할 좌파는 지리멸렬하다. 그 에너지는 고스란히 극우의 것이 되었고, 체제 불신자들은 나보다 더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가해자가 되어 소수자를 혐오하고, 고통의 책임을 전가할 희생자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들에게 좌파나 진보는 교육받은 엘리트의 것이고, 위선적 화법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따지기만 좋아하는 이들이 구축해놓은 말의 세계에 불과하다. 노회찬이 있다면, 이 체제 불신자들의 분노를 어떻게든 진보적 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을 것이다. “그 누구 탓도 하지 않”고 부딪혔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죽음을 뒤로하고, 더 이상 책임 물을 대상도 없는 상태에서, 이제는 무슨 일만 있으면 그를 비판하고, 그에게 책임을 묻고, 그의 선택을 원망하던 이들, 노회찬을 낡은 것으로 규정하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것을 하고 있다고 자위했던 이들이 나설 때 아닐까. “저항이란, 투쟁을 타자에게 떠넘기지 않고 지금 자신의 일상에서 실현하는 것”이라는 도미야마 이치로의 문장은 노회찬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처럼 들린다.

그렇게 명령처럼 돌진한다, 체제 불신자들의 에너지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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