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먹칠] 폭염의 비극을 여름의 신화로 바꾸는 방법 / 이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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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는 더울수록 빨리 굳는다. 더울수록 콘크리트 타설 작업속도는 빨라지고, 이에 비례해 공사 마감일도 앞당겨진다. 비용 또한 자연스레 절감되니, 날씨가 더우면 더울수록 공사효율은 높아지는 셈이다. 그 ‘공사효율’ 뒤에 사람이 서 있다. 작업 특성상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고, 콘크리트가 굳으면서 뿜어내는 열과 요즘 날씨가 더해지면 40도는 기본으로 넘어가는 환경에서 ‘사람’이 일한다. 그러니 콘크리트 타설은 더울수록 빨리 끝나는 작업이 아니라, 더울수록 사람에게 힘든 작업이라는 것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그러나 건설비용의 절감은 노동자 한 명의 목숨값보다 중요했다. 광주에서 콘크리트 타설 작업을 하던 한 건설노동자가 숨졌다. 그는 사망 후 병원으로 옮겨졌고, 따라서 온열질환으로 인한 신체적 반응을 확인할 수 없었다. 때문에 산업재해대상자가 되지 못했고, 마땅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 콘크리트의 열기와는 상반되는 냉혹한 현실이다.

죽음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명제는 이제 마침표 대신 물음표가 더 어울린다. 누구에게나 찾아간다고 해서 평등한 것은 아니다. 죽음은 불평등한지 오래다.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죽음이 다가가는 속도는 다르고, 속도는 대개 부의 정도와 반비례한다. 극단적인 불평등이 건강에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다는 연구 문헌이 많은 것이 이를 방증한다. 사람들은 반복되는 재난과 참사, 그리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식의 대안 수립에 지쳤다. 폭염으로 인한 불평등한 죽음 역시 매번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되고 있고, 올해 여름에만 벌써 48명(8월 18일 질병관리본부 자료 기준)이 사망했다. 폭염이 비극의 시작은 아니었다. 양극화로 인한 사회적 재난은 우리 사회의 오랜 문제였고, 폭염을 계기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지금 우리가 불평등한 죽음에 대해 논하고, 최소한 생명 앞에서는 평등하기 위해 어떤 변화를 이끌어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폭염을 재난으로 규정짓고 취약계층을 돌보겠다는 정부의 발표는 반갑지만 무력하다. 국민재난안전포털에 따르면, 건설현장 등 실외 작업장에서는 오후 2시~오후5시 사이의 취약시간에 ‘무더위 휴식 시간제’ 적극 시행 및 폭염안전수칙 준수를 권장한다. 하지만 생산성에 집착하고, 사업주와 노동자의 갑을관계가 명확한 우리 사회에서 ‘무더위로 인한 휴식시간’이 잘 지켜질 리 없다. 건설노조가 7월 토목·건축 노동자 230명에게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폭염 특보 발령 시 규칙적으로 쉰다고 답변한 사람의 비율은 8.5%가 다였다. 포털에서는 전국무더위쉼터가 어디 있는지 자세히 안내하고 있지만, 무더위쉼터를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을 이용해 조회할만한 사람들이 쉼터에 가는 사람과 동일한지는 의문이다. 폭염 시 외출을 자제하고 물을 많이 마시라는 ‘재난 경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오지만, 경보를 무시하고 밖으로 나가 일해야 생존할 수 있는 이들에게는 공허하기만 하다. 폭염은 재난이고 인권의 문제라는 것에 다수가 동의한다면, 이제 실효성이 있는 대안을 모색해야 할 단계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방법은 사회과학적으로 폭염에 접근해 제대로 된 매뉴얼을 만드는 것이다. 여러 학자가 이미 제안한 바 있듯 ‘사회적 재난’으로 폭염을 규정하고 대비해야 한다. 콘크리트 타설 노동자가 현장에서 죽었지만 온열 질환 관련 산재보상을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죽음에 대한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고, 당연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 건설노동자 외에도 살펴야 하는 사람들은 많다. 위험수당 없이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배달노동자, 시간에 쫓겨 휴식시간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택배노동자, 직사광선을 그대로 맞으며 일하는 농·어업관련종사자 등이 그 예다. 폭염의 공습에 그대로 노출되는 이들을 위해 직종별로 적합한 폭염 대비 매뉴얼을 만들고 보급하는 것이 필요하다. 단순히 1시간 일하고 10분 쉬기 정도의 권고가 아니라 현장에 알맞은 수칙 말이다.

더불어 고온 속에서 고독사하는 소외계층도 점차 줄여나가야 한다. 1995년 기록적 폭염으로 700여 명이 사망한 시카고의 대처법이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 그들은 사망자의 사회경제적 환경을 조사해 취약계층의 생활환경 파악에 나섰고, 그 결과 1999년에는 폭염 사망자를 110명으로 줄일 수 있었다. 부족한 사회복지사 인원을 충원하고, 폭염 등 기상이변에 대비한 응급관리부서를 신설하는 등의 방안을 고려하는 것은 어떨까. 그래서 통계의 사각지대에 놓여 정부의 관리망을 벗어난 차상위계층까지 신경 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폭염으로 인한 피해 정도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2012년 <폭염피해백서>에서 시행된 바 있듯, 온열 질환 사망자들의 월평균 소득과 학력, 가족관계, 동거인 유무, 냉방기기 보유 수, 주거지 사진 등을 기록하는 등 이른바 ‘사회적 부검’이 필요하다. 정확한 피해 규모 확인과 그에 알맞은 대책 수립은 소외계층에게 실질적 도움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폭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폭염의 비극을, 불평등한 죽음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 2018년의 여름은 상징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폭염하면 떠오르는 94년의 여름처럼, 뭔가 ‘바뀌기 시작한’ 여름으로 2018년을 떠올려야 한다. <폭염사회>의 저자 에릭 클라이넨버그는 “폭염에 관한 기관의 역사와 대중의 기억이 중요한 이유는 집단적으로 진화하는 재난의 신화를 구성하고 용어와 개념을 확립해 의미와 중요성을 해석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2018년의 여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폭염이 던지는 질문은 어쩌면 사회 변화를 위한 신호탄이자, 더 이상 변화를 미뤄서는 안 된다는 경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