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침묵은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이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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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5 09:37 | 최종 업데이트 2018-09-25 09:38

오래 앓고 있는 질병이 있는데 최근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얼마 전에 의사가 “관리를 잘 하셨어야죠.”라고 하거나, 나의 질문에 “이건 교과서에도 다 나와 있는 겁니다”라고 답한 적 있다. 의사는 나의 관리 부실을 탓하고, 교과서에도 나와 있다는 의학적 지식에 대한 나의 무지를 탓했다. “관리라는 게 어떻게 하는 건가요?” 나는 속에서 터져 나오는 커다란 한숨(내가 관리를 안 했겠니?)을 간신히 잠재우며 이렇게 반문하는 게 전부였다. 내 몸이지만 내 몸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이 의사라는 점은 그의 말 앞에서 나를 함구하게 만들었다. 그는 내게서 원인을 찾고, 나를 훈계할 수도 있으며, 상황에 따라 나를 통제할 수도 있다.

질병이 주는 고통은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사회에서 소외된다는 감정에 있다. ‘보는 문제’가 내게 심각한 문제가 되다 보니 응시, 관점, 시각, 시선 등의 단어 하나하나가 내 동공을 찌르는 느낌이다. 물론 나는 구조맹, 성맹 등의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조폭 영화에서 각막 불법매매에 대한 내용만 봐도 가슴이 후들거린다. 얼마 전에는 SNS에서 누군가 안구 하나 1억이니 그저 건강하기만 해도 돈 버는 거라는 ‘따스하고 재미있는’ 말을 하는데 나는 싸늘한 공포에 시달렸다. 타인의 질병서사를 통해 위안을 얻으려 했지만, 그 어떤 질병서사를 찾아봐도 결국 그들도 다 ‘보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나를 더 절망하게 만들었다. 말하는 사람은 결국 보는 사람이던가. 이 ‘보는 문제’가 나를 앞으로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으나 ‘보는 문제’를 겪고 있는 내게도 관점과 시선이 있다.

장애나 질병에 대한 서사는 당사자의 목소리보다는 이들을 바라보는 비장애인이나 비환자의 시각에서 쓰인다. 질병 중에는 완치가 불가능한 경우도 많고 완치는커녕 결국 그 질병으로 삶을 마감할 때도 있다. 질병서사를 쓸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살아남은’ 경우다.

20세기 중반 이후 ‘트라우마 회고록’ 형식의 글이 많이 나왔다. 질병서사pathography는 글쓰기의 한 장르다. 의학의 치료 대상으로 침묵당하는 이들이 적극적으로 서사를 구성한다는 면에서 아픈 사람의 질병서사와 상대적으로 목소리가 없는 여성의 서사 복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페미니스트인 미국 시인 오드르 로드Audre Lorde(1934~1992)가 1980년 <암일기 The Cancer Journals>를 쓴 게 우연이 아닐 것이다. 또한 비슷한 또래의 수전 손택은 1978년 <은유로서의 질병>을 쓴 적 있다. 두 사람 모두 유방암을 겪었다. (오드르 로드는 다시 간암으로 죽고 수전 손택은 백혈병으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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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르 로드는 자신의 이름 오드리Audrey에서 y를 뺀 이름을 더 좋아했다. 이 글에서 오드르 Audre라고 표기하겠다.) 오드르 로드는 <암 일기>의 첫 장에서 질병서사를 쓰는 목적이 ‘침묵을 언어와 행동으로 바꾼다는 것’이라 한다. 이 글은 이번 여름 한국에도 번역된 <시스터 아웃사이더>에도 실려 있다.
“내가 가장 후회하는 부분이 바로 내가 침묵했던 순간들이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47쪽)

이 글이 두 책에 모두 실려 있다는 사실은 환자의 침묵과 사회적 소수자의 침묵에 대해 면밀히 들여다볼 점이 있음을 시사한다. 정의내리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 누구에게 있는가. 오드르 로드의 <자미 : 내 이름의 새로운 철자> 역시 자전적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정체성을 고백하고 기록한다. 오드르 로드는 미국 뉴욕 맨해튼의 북쪽에 위치한 잘 알려진 흑인 밀집지역 할렘에서 나서 자랐다. 그는 흑인으로서, 여성으로서, 레즈비언으로서 모든 면에서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아갔다. 그가 가진 소외의 결이 그의 생각을 더욱 촘촘하게 짜주었다고 생각한다.

오드르 로드가 특히 강하게 제기하는 문제는 흑인 남성 지식인의 성차별적 인식이다. 민권운동을 하며 여성을 억압하는 위치에 있는 흑인 남성 지식인의 모순들. 이는 흑인 사회 내부 균열을 만든다고 비판받곤 했다. 그렇다면 여성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나는 ‘보는 문제’를 겪고 있는 여성으로서, 여성에게 보는 폭력을 일상적으로 행하는 남성들이 끔찍하다 못해 이제는 불쌍할 지경이다. 자신의 삶에서 그 귀한 눈을 폭력의 도구로 사용하다니. 미를 모른 채, 미를 갈구할 줄도 모른 채, 그저 폭력을 통해 재미를 찾고 지배를 통해 ‘나’의 위치를 확인해야만 하는 이들이 불쌍하다. 폭력은 사소한 특권을 인식하지 않는 몰인식 속에서 번성한다.

말하기는 여러 방식이 있다. 여기서 ‘말하기’는 누가 누구에게 누구의 입장이 되어 말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모든 말하기에는 입장이 있고 시각이 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는 내 자신을 고백하거나, 누군가의 권력에 도전하는 폭로를 통해 사회에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 이는 통념적으로 소수자에게 권장하는 말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질문을 받는 입장이지 질문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며, 보여지는 대상이지 감히 본 것을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여성의 성폭력 생존기도 일종의 트라우마 회고록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저항 서사다. 질병이 흔적을 남기듯, 폭력도 사람의 몸과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이는 극복과 치유의 대상으로 머물기보다 적극적으로 공유되어야 하는 이야기다. 말하지 않는 피해자가 진정한 피해자가 되는 문화를 휘청거리게 하기 위해서는 기를 쓰고 말해야 한다.

연극 연출가 이윤택이 유죄를 받았다. 그가 18년간 ‘관행으로’ 저지른 폭력에 비하면 그의 형량 6년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윤택이 누리던 위상은 이제 전과 같을 수 없다. 적어도 그의 폭력은 세상에 알려졌다. 마찬가지로 법적으로 무죄가 나왔으니 안희정의 전 비서 김지은의 말하기는 실패했는가. 아니다. 안희정은 ‘김지은의 말하기’가 있기 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침묵을 강요당하는 이들은 계속하여 침묵을 거부해야 한다. “설사 입 밖에 낸 말로 상처를 받거나 오해를 받을 위험이 있다 해도, 말하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 다른 어떤 결과보다 내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요.” (<시스터 아웃사이더>, 46쪽)

환자에 머물지 않고 질병을 기록하고 자신의 고통에 대해 말하듯, 여성은 피해자로 남지 말고 자신의 서사를 적극적으로 써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정의하지 않으면,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환상에 산 채로 잡아먹히게 될 거란 걸 알게 됐다.” (242쪽) 침묵은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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