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돋보기] 내 친구 란펑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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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면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중국 산둥에서 한국 남성을 만나 연애를 했고, 한국에서 아이 셋을 낳고 살고 있는 란펑친 여사이다. 같은 아파트 1층과 3층 이웃으로 처음 만났다. 1층 베란다 밖에서 중국어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이 마주치자 노랗게 염색한 머리, 찢어진 청바지와 해골무늬가 프린트된 티셔츠의 여성이 눈인사를 건넸다.

“이사 오셨어요? 3층 살아요” 내게 진한 눈웃음을 동반한 미소를 반갑게 보내주었다. 인사를 나누고 동네 휴민트(사람을 통해 상대편의 정보를 캐내는 것)를 가동해 3층에 살고 있다는 과감한 패션을 한 여성의 정체를 밝혀냈다. 4층에 사는 동장님께서 알려주신 정보였다.

“중국에서 시집왔어. 남편은 아직 못 봤지? 나이 꽤 많아. 띠동갑쯤 되나? 애는 둘인데, 그래 그 집 애랑 같은 초등학교 다니네. 그래도 저 친구는 적응 빨리했어. 와서 중국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문화센터 같은데도 잘 나가나봐.”

정리하면, 중국에서 한국으로 시.집.을 왔고, 초등학생 자녀가 2명 있으며 남편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한국에 적응하는 시간이 좀 빨랐다.

그 이후 학교운영위원 회의에서 란펑친 여사를 다시 만났다. 내 아이가 다니는 학교 운영에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기꺼이 의견을 개진하리라 다짐하고 학교운영위원이 됐다. 첫 회의에서 란펑친 여사를 같은 운영위원으로 마주했다. 란펑친 여사는 여전히 환한 미소와 눈웃음으로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아침에 애들도 제가 태워서 학교 데려다줘도 되니 8시 30분에 내보내 주세요”

맞벌이 부모는 그저 누가 애를 조금이라도 돌보아 주는 것은 다 반갑다. 다음날 란펑친 여사의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인 후 약속한 시간에 애들을 내보냈다. 란펑친 여사가 운전해서 나온 차는 요즘에야 불이 붙어 난리긴 하지만, 고급스러운 외제승용차였다.

사실, 지금에야 란펑친 여사와 친해져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나누는 사이지만, 당시만 해도 란펑친의 여러 모습은 인권 업무를 담당하는 내게도 당황스러운 상황이 있었다.

우리는 ‘다문화’라고 규정하는 가족의 여성들을 대략 이렇게 가정하고 있다. 남편과 나이 차가 많고,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이주했고,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며,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 힘든 사회적 약자로. 이런 이미지 고착에는 미디어의 영향도 컸다.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상까지 받은 한 공영방송의 프로그램 ‘러브 인 아시아’에서 다룬 다문화 가족의 여성을 머릿속에 한 번 그려보면 될 것이다.

란펑친도 그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한국이 낯설고 한국말이 서툴렀을 때 유모차에 아이를 태워 놀이터에 나가면, 또래 엄마들이 다가왔다가 어색한 한국 말투와 중국에서 왔다는 말 이후 자신은 배제되었다고 한다. 가끔 연세가 조금 있는 어르신들이 와서는 ‘한 달에 중국집으로 돈은 얼마씩 보내주는지’, ‘남편은 잘해주는지’ 하고 물었다고 한다. 란펑친은 아직도 그 이야기를 하면서 발끈한다.

“내가 결혼할 때 이 차도 사 오고, 남편 사업자금도 내가 대줬어. 우리 엄마, 아빠가 처음에 아이 아빠 나이 많다고 결혼 얼마나 반대한 줄 알아요, 언니?”

▲란펑친은 지역 배드민턴 클럽 활동에 참여하면서 전국 다문화가족 배드민턴 대회에도 참여했다.

내 친구 란펑친은 학교 운영위원도, 도서관 도우미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리고 지역 배드민턴 클럽과 이주여성 지원센터에서도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여성이다. 얼마 전에는 동 대표 선거에 나가 당선됐다고 한다. 거기다가 한국의 다자녀 정책에 기여하겠다는 큰 포부는 없었겠지만, 얼마 전 셋째 아이도 얻었다.

따지고 보면, 나도 대구에서 경기도로 이주한 이주민, 란펑친은 중국 산둥에서 경기도로 이주한 같은 이주민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경기도 일산의 작은 마을에서 같은 공동체로 즐겁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아니, 오히려 란펑친 여사가 우리 마을에서는 더 소중한 구성원일 수도 있겠다 싶다.

설날에는 그녀가 한국에 없다. 설날은 중국인들이 가장 큰 명절로 생각한다는 춘절과 겹친다. 이때 그녀는 가차 없이 중국으로 명절을 보내러 온 가족이 떠나버린다. ‘한국의 시댁은 어떡하냐?’ 라고 질문하면 그녀는 대답한다.

“추석 있잖아 언니. 명절이 두 번이니까 한번은 우리 집 가고 한번은 남편 집 가면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