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적산에 피는 꽃은 /김수상

제1회 성주 적산 기림 예술제 진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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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1 13:08 | 최종 업데이트 2018-10-09 11:30

[편집자 주=오는 9일(화) 오전 11시 덕암정가연구회는 경북 성주군 벽진면 장수랜드에서 임진왜란, 정유전쟁 희생자 넋을 기리는 ‘제 1회 성주 적산 기림예술제’를 연다. 2012년 가을에 창단한 덕암정가연구회는 이순신 장군의 호인 ‘덕암’을 따서 이순신 장군 본인이나 관련한 시와 문학을 기리는 정가공연을 기획, 제작하고 있다. 정가는 선비들이 즐기던 가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이날 열리는 승전 기림제에는 진혼제와 4명(이수일, 제말, 정기룡, 배설)의 장군을 기리는 시조창 4곡을 진행한다. 이날 낭송할 김수상 시인의 진혼시 ‘적산에 피는 꽃은’을 뉴스민에 싣는다.]

적산에 피는 꽃은
제1회 성주 적산 기림 예술제 진혼시

김수상

지켜줄 줄 알았어요
나라가 우리를 지켜줄 줄 알았지요
땀 흘려 일하면 뿌린 만큼 거둘 줄 알았지요
군주는 북쪽으로 제 한 목숨 살자고 도망을 가고
성주 땅에 남은 우리들은 찔려서 죽고, 맞아서 죽고
빼앗겨서 죽고, 굶어서 죽었어요
나라가 우리를 지켜 준 게 아니고
우리가 나라를 지켰어요

저 산이 울긋불긋하네요
임진년 우리가 흘린 피 때문입니다
정유년 우리가 흘린 피 때문입니다
동학 때, 6. 25 때, 4.19 때, 5.18 때,
우리 후손들이 흘린 피 때문입니다
이 적산의 만산홍엽(滿山紅葉)은 우리 백성의 피눈물이었어요

1592년 임진년 4월 27일, 겨우 3백여 명의 왜군들에게
우리 성주가 함락당한 것은
밭 갈고 씨 뿌리며 소처럼 순하게 살아온
우리 때문이 아니에요
순했기 때문에 나라를 빼앗겼다면
그것은 하늘의 마음이 아니지요
착취를 일삼았던 무능한 관리들 때문이에요
왜놈들보다 무서웠던 관리 놈들의 학정 때문이에요

아, 저 산이 울고 있네요
임진년 4월, 성주의 밤을 적산은 다 내려다보았어요
화염이 성안에 가득하였고
가옥을 태우는 불길이 하늘 끝까지 치솟았지요
지켜줄 이 하나 없는 우리는 어찌할 줄 몰라서
서로 부둥켜안고 비 오는 숲속에 쥐들처럼 엎드려 있었어요

오호라, 넋이야 넋이로다!
비는 퍼붓고 우리는 진흙에 빠졌어요
흙속에 미끄러지면서도 서로의 이름을 불렀어요
비는 계속 퍼붓고 옷은 다 젖었지요
우리는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빗속에서도 졸았어요
왜놈들조차 우리가 불쌍하였던지
사족(士族)들만 골라서 척살했지요
그들의 집을 불태우고 노략질을 했어요
큰길에 있는 기와집과 부자동네만 골라서 약탈했지요
사족 놈들은 살기 위해 머리를 풀어헤치고 얼굴에는 흙칠을 하였어요
사족 놈들은 살기 위해 거친 옷을 입고 손에는 호미를 들고 다녔어요
가렴주구를 일삼고 우리를 도탄에 빠뜨리던
짐승 같던 놈들이었는데
백성들보다도 죽음이 더 두려웠던 것이지요
전쟁도 모자라서 가을부터 대기근이 성주를 덮쳤어요

오호라, 넋이야 넋이로다!
우리는 밭이랑에 떨어진 보리 이삭과 소나무 껍질로 연명하였어요
굶어죽은 이웃은 들판에 널브러졌고
까마귀와 솔개들이 시체의 눈알을 파먹었지요
아이들은 어른이 나누어준 보리밥을 급하게 먹다가
밥알이 목에 걸려 죽었어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도 드물지 않았지요

오호라, 넋이야 넋이로다!
우리의 고혈을 짜낸 탐관오리 성주목사 이덕열과
권세가들에게 아부만 하는 고현이라는 판관 놈 아래 사느니
차라리 왜군들 밑에서 종노릇을 하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적산사의 찬희라는 중놈까지 왜놈의 앞잡이가 되어
우리를 괴롭혔으니
적산 아래 우리는 의지할 데가 하나도 없었어요

오호라, 넋이야 넋이로다!
우리는 기억해요
제 목숨부터 살겠다고 변장을 하는 사족 놈들도 있었지만
우리와 함께 피를 나누며
성주를 지킨 장군들과 선비들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요
그들의 북소리를 따르며 우리는 싸웠어요
성주를 지켜야만 내 아이들과 내 가족들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성밖숲을 감돌아나가는 백천의 흰 모래톱에 뿌려진
우리들의 붉은 피를 기억해요
꽃 같은 누이와 내 아내가
적들의 배에 깔려 능욕을 당했지만
적산에 핀 참꽃의 맑은 얼굴과 독용산성의 밝은 달만
기억하기로 해요

오호라, 넋이야, 넋이로다!
경상우수사 배설의 혼령이시여!
당신이 아니었다면 이순신 장군에게 12척의 배가 있었겠으며
당신의 아버지 배덕문 공이 아니었다면
성주 백성들이 독용산성에서 목숨을 부지했겠나이까
수군으로 순국한 당신의 동생 배건과 배즙이 아니었다면
임전무퇴가 있었겠나이까

성주목사 겸 금오산성수비대장 충무공 이수일 장군의 혼령이시여!
당신이 아니었다면 용감무쌍 결사항전으로
왜군의 씨를 말리는 적산의 장대한 승리가 있었겠나이까
영남의 선봉대장 정기룡 의병대장 혼령이시여!
제말 장군의 혼령이시여!
이름 없이 죽어간 억울한 성주 백성의 혼령들이시여!

정유재란이 끝난 421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당신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가만가만 불러보나이다
당신들의 이름을 들으며
적산의 가을꽃들도 잠에서 깨어납니다
적산이 올려다 보이는 이 참숯찜질방 마당에 모여
피의 이마를 간직한 산정을 바라봅니다
성주의 혼령들이시여!
당신들이 우리를 오늘 여기 불러 세운 까닭을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묻습니다

나라는 어떻게 지키나요

큰 힘에는 더 큰 힘으로
큰 무기에는 더 큰 무기로
큰 폭력에는 더 큰 폭력으로

아니에요, 그건 아니에요
폭력은 폭력을 부르고
힘은 힘을 부르고
무기는 무기를 부르지요

저기 저 적산에 피는 가을꽃을 보아요
구절초 마디마디에 사연을 담아
우리에게 평화로워라, 부디 평화로워라!
싸우지 마라,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살아보니 그렇더라, 서로 사랑하여라!
천년의 바람이 적산의 그 말씀 실어다
우리에게 전해주네요

오호라, 넋이야, 넋이로다!
성주 백성의 넋들께 비나이다!
이곳 별고을의 사람들이 하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고
우리나라를 전쟁 없는 평화의 나라가 되게 하소서!
저기 소성리에 들어와 있는 전쟁무기 사드도
어서 빨리 자기 땅으로 돌아가게 해주시고
우리 성주가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소서!

저기 저 적산에 철따라 피는 꽃을 보면
난 줄 아시라 하셨으니
임을 본 듯 반기겠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적산의 신령님께 비나이다!
먼저 가신 성주의 혼령들께 비나이다!
통일 세상, 해방 세상, 평등 세상, 사랑의 세상을
우리가 힘 모아 이루겠사오니
흠향(歆饗)하시고 편히 잠드소서!
적산이여, 이제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미움은 가고 사랑이 오게 하소서!
전쟁은 가고 평화가 오게 하소서!
분단은 가고 통일이 오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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