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의 공허한 싸움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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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8 10:33 | 최종 업데이트 2018-10-08 10:46

TV를 켜면 10개 채널 가운데 최소한 서너개는 먹방이다. 요리의 맛을 경쟁하는 방송, 외국 여행을 하면서 먹는 방송, 외국인이 한국 음식을 먹는 방송, 쉽게 맛을 내는 비결을 알려주는 방송, 숨겨진 맛집을 알려주는 방송, 그냥 맛있게 먹는 모습 그 자체로 충분한 방송 등 그 유형도 다양하다. 요즘에는 먹는 장사를 컨설팅하는 방송, 무턱대고 포장마차를 차리고 먹는 장사를 하는 방송도 인기다. TV만이 아니다. 유튜브 등 1인 미디어는 먹방의 주요 무대다. 유튜브 통계 사이트인 소셜블레이드에 의하면, 9월 말 기준으로 국내 유튜브 크리에이터 가운데 구독자 수 상위 10위권에 먹방 크리에이터가 2명 포함되어 있다. 먹방을 하는 벤쯔(5위)의 구독자 수는 287만 명이고, 떵개떵(7위)의 구독자 수는 260만 명이다.

먹방을 통한 ‘푸드 포르노’가 6~7년 가까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작동한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사회비평가 박권일의 분석을 경청해볼 필요가 있다.

“‘불황기의 상실감과 공허감, 불안이 가장 본능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테다. 또 ‘복잡하고 논쟁적인 주제를 회피하다 보니 결국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인 욕구로만 쏠리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둘 다 일리가 없지 않으나 딱 하나의 정답은 없다. 해석이 있을 뿐이다. 나는 영상기술의 발전도 음식 콘텐츠의 인기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HD, UHD, 초고화질 디지털 픽셀로 구현되는 음식의 이미지는 실물보다 더 실물 같은, 과잉의 핍진성을 선사한다. 우리는 레스토랑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지만, 그릴에서 슬로우 모션으로 튀어 오르는 최고급 안심의 육즙과 아산화질소 거품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스푸마의 ‘분자요리적 순간’을 레스토랑의 좌석에서 TV보다 생생하게 감상하기란 불가능하다.” (박권일 ‘후각사회, 그리고 후각사회적 현상으로서 ‘푸드 포르노”)

그는 이어 ‘푸드 포르노’가 범람하는 사회를 두고 “실제로 발현되지 않는 감각을 상상적으로 재현하면서 대리만족한다는 점에서, 설득이나 논쟁 따위가 일절 필요 없는, 오직 매혹과 열광만이 존재하는 세계”라고 지적했다.

‘불황기의 상실감과 공허감, 불안이 가장 본능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것’이라는 박권일의 설명대로, 빅카인즈 검색에서 한국 사회에 ‘먹방’이라는 용어가 언론에 처음 등장한 건 2012년 6월 즈음이다. 아프리카TV 등을 통한 1인 미디어가 조금씩 확산하고 있던 시점이기도 하지만,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해 한국에도 불황의 여파가 남아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대기업 취업이나 전문직 종사보다 정기적으로 한 달에 200만 원만 벌 수 있다면 어떻게 든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청년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도 그 시점 즈음이다.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가 더 이상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대이고, 그 헤게모니가 좌가 됐든 우가 됐든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를 원하는 특정 엘리트 집단에만 이익을 안겨줬다는 진실을 모두가 알고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거대 담론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에 냉소한다. 그 냉소의 자리에 삶의 의미를 던져주는 요소가 바로 취향에 부합하는 소소한 행복이다. 소소한 행복에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위다.

게다가 2010년대 초반의 한국 정치는 그야말로 단순 명확한 시대였다. 이명박처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 버는 일에 올인하거나 혹은 반이명박 시대 정신에 따라 다가온 박근혜 시대를 거부하거나. 이어서 박근혜처럼 노골적으로 우직하게 욕망하거나 혹은 반박근혜로 위선 없는 정의감을 앞세우거나. 여기에 ‘복잡하고 논쟁적인 주제’, ‘설득이나 논쟁’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다. 그것은 보수 정권의 허구성이 만천하에 드러나 정권이 바뀐 지금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먹방과 푸드 포르노라는 1차원적인 미각의 세계는 복잡한 담론을 거부한 채 모두가 ‘매혹과 열광’에 쉽게 동의할 수 있게 만드는, 보편성이 지배하는 세상을 상징한다.

보편성이 지배하는 세상이 단 한 명의 인간으로 체화할 수 있다면, 그는 바로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일 것이다. 백종원은 특별한 전문성을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대중에게 전달할 줄 아는 사람이다. 가장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음식점에서 먹을법한 요리를 집에서 만들어 먹을 수 있게 해주고, 음식과 요리에 대한 전문 지식을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언어로 쉽게 설명해주며, 한국 사회에 가장 보편적으로 통할 것 같은 프랜차이즈 음식점 요리 비법을 식당 점주들에게 컨설팅하는 역할도 한다.

수돗물과 누룩으로 막걸리를 만든다는 한 청년 사장에게 대중적인 일본식 입국과 아스파탐, 감미료를 넣은 막걸리를 컨설팅한 <골목식당> 막걸리 편은 백종원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보편성이 지배하는 세상’을 상징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소비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건 보편적인 대중의 취향이 무엇인지 파악해 그 보편적 취향을 자신만 특수하게 생산할 수 있는 것처럼 홍보하는 일이다. 백종원은 거기에 더해 보편적인 대중의 취향을 창조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왼쪽), 더본코리아 대표 백종원(오른쪽)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의 백종원 비판은 그런 점에서 ‘보편성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의문 제기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황교익은 왜 대중에 의해 거센 비판을 받고 있는 걸까. 물론 황교익이 비판받는 이유에는 음식에 대해선 자신의 논리가 절대적이고, 이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무지하고 미개한 이들인 것처럼 발언한 문제도 있고, 떡볶이나 만능 간장, 프랜차이즈를 비판해놓고 정작 떡볶이와 만능 간장, 프랜차이즈 커피 광고에 출연해 이 음식들을 좋게 평가한 이중성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다. 그런 비판은 충분히 타당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황교익이 정말 하고자 한 말이 무엇인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황교익의 말을 살펴보면, 대체로 단맛이나 매운맛 등 자극적인 양념이나 조미료로 낸 맛이 아니라 좋은 원재료를 정직하게 사용해 원재료 본연의 맛을 담백하게 살려낸 맛을 이상향으로 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가 달고 매운 양념이 들어간 떡볶이나 걸쭉하고 진한 양념을 쓰는 전라도 음식에 대해 비판적인 이유도 자신이 삼고 있는 이상향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고, 백종원이 쓴 설탕에 대해 거세게 비판한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나름의 일관성은 있다고 할 수 있다. 떡볶이나 전라도 음식을 비판하면서 내민 근거나 한국인들의 설탕 소비에 대해 발언한 내용 가운데 오류가 있음을 고려하고서라도 말이다.

그런데 황교익의 문제는 따로 있다. 황교익이 바라는 맛의 이상향을 추구한다고 해서 정작 우리 사회가 그 이상향을 통해 어떤 가치를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가 말하는 맛의 이상향은 특정한 소수를 위한 이상향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대로 좋은 원재료를 정직하게 사용해 원재료 본연의 맛을 담백하게 살려낸 맛을 즐길 수 있을 만한 경제적 혹은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소수다. 좋은 원재료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건 원재료 생산지에 쉽게 갈 수 있거나 혹은 굳이 가지 않고도 그만한 비용을 지불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시간적 여유가 없다면 좋은 원재료가 있다고 해도 본연의 맛을 낼 수 있는 요리를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그것은 결코 보편적이 될 수 없는, 애초부터 특별한 어떤 이들을 위한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다.

황교익이 ‘보편적 대중’과 논쟁하고 다퉈서 대중을 계몽하기 위해 내세우고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교익은 되레 복잡한 논쟁을 거부한 채 ‘자신만의 취향’의 절대성을 인정하길 강요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황교익과 대중의 논쟁을 보면서 황교익의 ‘지성’을 인정하지 않는 대중의 ‘반지성’을 염려하지만, 정작 이번 논쟁에서 ‘반지성주의’적 면모가 더 부각된 건 대중이 아니라 황교익이다.

황교익이 말하는 한국 음식의 고유성을 지키자는 얘기에서도 별다른 가치를 찾을 수 없다. 음식 문화란 민족적 고유성보다 지리적으로 접해 있는 문화권 간에 서로 교류하면서, 보편적인 재료와 지역 특성을 가진 재료가 합쳐진, 그 지역만의 특별한 그 무엇이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황교익이 비판적으로 말하는 ‘오염된 한국 음식’과 ‘진정한 한국 음식’을 구분해야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문화는 그 자체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정작 문제는 문화적 취향을 통해 드러나는 특정한 사람들의 사회적 위치다. 문화적 이슈에 대한 논의의 관건은 어떤 이들의 취향이 은연중에 그들의 계급 위계를 강화하는 기제로 쓰이진 않는지, 그들이 말하는 ‘이상적인 그 무엇’이 어떤 이들을 소외시키고 있진 않은지 살피는 일이다. 그런데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는 백종원에 대한 황교익의 문제 제기, 그리고 황교익과 다수 대중의 논쟁에는 정작 음식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없고, 서로 진정성의 주체임을 선점하려는 공허한 다툼만 난무하고 있다. 그런 다툼에 우리가 왜 소모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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