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우리는 땅에 속해 있다 /이라영

10:35

엄마 쪽 할아버지 산소로 가는 길이었다. 얼마 만일까. 30년은 넘었다. 이정표도 없는 산길에서 부모님은 어찌 조상들의 묘를 잘도 찾는지 신기했다. 오랜만에 찾기도 했지만 내가 건물과 잘 닦여진 도로가 없는 산길을 다 비슷하게 보는 탓이다. 흙과 돌, 나무, 바닥에 떨어진 밤송이들, 이름을 모르는 풀잎에 둘러싸인 길에서 이 길과 저 길이 비슷해 보이고 이 무덤과 저 무덤이 비슷해 보였다.

그때 아버지가 “여기 멧돼지가 지나갔군.”이라고 했다. 그걸 어찌 아냐 물으니 우리 발 아래 흙바닥을 가리키며 멧돼지가 파헤친 흔적이라고 했다. 기껏해야 개 발자국이나 분간할까, 짐승의 흔적을 말끔히 청소한 문명의 세계에 익숙한 나는 동물의 습성에 무지하다.

얼마 전 다섯 살 조카는 내게 물었다. “밥 먹고 바로 누우면 돼지가 되는 거야? 내가 돼지가 되면 여기서 못 살고 동물원에 가는 거지?” 돼지와 동물원을 연결할 생각은 미처 못했는데 조카가 이렇게 묻자 나는 어정쩡하게 답했다. ‘돼지가 사는 곳’에 대한 내 머릿속 이미지는 어릴 때 친척 집에서 본 돼지우리다. 두 마리가 작은 원룸 크기의 우리 안에서 뒹굴고 있었다. 적어도 소, 돼지, 닭, 가끔 염소와 토끼까지, 이들은 마당이 있는 집 주변에서 인간과 가깝게 사는 동물이었다.

▲[사진=flcik.com @Farm Watch]

가축이라 불리는 이 동물들의 삶의 공간이 공장식 축산제 속에 포섭되기 전의 모습을 떠올리던 나는 조카의 ‘동물원’ 발언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공룡처럼 자신이 보지 못한 동물은 산속 어딘가에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자신이 보았던 동물의 공간으로는 동물원을 떠올렸다. 반려동물과의 생활이 인간에게 동물에 대한 이해를 폭넓게 만들어주진 않는다. 대신 동물을 구별한다. 여성이 정숙한 아내와 창녀로 분리 통치받듯이 동물과 자연도 인간에게 이러한 분리 통치를 받는다. 먹거리가 되기 위해 공장식 축산제 속에서 길러지거나 보호라는 명목 하에 동물원에 갇혀 볼거리가 된다.

인간은 동물의 장소를 계속 빼앗으며 지배의 영역을 넓혀왔다. 동물원에서 태어나 8년 내내 동물원 밖을 나가보지 못한 퓨마가 문이 열려 있길래 잠시 걸어 나왔다가 인간의 총에 맞아 죽었다. 우리는 동물을 보지만 보지 못한다. 그들을 먹지만 먹이가 되기 이전 모습을 잘 모른다. 흙을 딛고 성장하는 생명을 대면하지 않기에 ‘볼거리’ 혹은 ‘먹거리’의 범주를 넘어선 동물 앞에서 당황한다. 우리는 누구와 대면하고 사는 걸까.

“얼마 후 그들은 땅으로부터 멀어지고
얼마 후 그들은 태양으로부터 멀어지고
얼마 후 그들은 식물과 동물들로부터 멀어지고
그들은 생명을 보지 못한다.
그들이 보는 것은
오직 물체일 뿐,
그들에게 이 세상은 죽은 것,
나무와 강은 살아 있지 않으며
산과 돌도 살아 있지 않다.
사슴과 곰은 물체일 뿐,
그들은 생명을 보지 않는다.”

나는 미국 뉴멕시코주를 배경으로 원주민의 삶을 이야기로 살려내는 레슬리 마몬 실코의 <의식>을 떠올린다. 뜨거운 태양 아래 사막에서도 자연을 ‘개발’하기보다는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왔던 그들의 삶이 유럽 백인의 등장으로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이는 더 이상 백인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과 근대의 이름 아래 모두가 앞다투어 저지르는 일이다.

주인공 타요는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원주민이다. 소설은 전쟁 속에서 군인일 때만 ‘미국인’으로 여겨지던 그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서서히 회복하는 과정이다. 더구나 타요는 원주인 엄마와 백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라 반쪽짜리 원주민으로서 어디에서도 온전히 환영받지 못한다. 레슬리 마몬 실코는 이 ‘혼혈’ 정체성을 통해 문화적 혼종을 이야기한다. 온전한 순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자연을 순수의 대상으로, 문명을 이기의 산물로만 놓을 수는 없다. 다만 문명과 물질에 지독히 익숙한 인간이 자연과 동물을 대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캘리포니아의 산타 모니카에서 일리노이의 시카고까지 3,945km가 이어진 66번 도로는 현재 그 도로 자체가 일종의 유적지처럼 남아 관광 코스가 되었다. 대공황 시기에 만들어서 1985년 공식적으로 ‘고속도로’의 역할이 끝날 때까지 약 60년 동안 미국에서 자동차 여행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의식>에서 원주민들은 이 66번 도로를 따라 늘어서 있는 술집을 오가며 주정뱅이 삶을 산다. 쭉 뻗은 길은 누군가에게는 세계를 연결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세계를 파괴했다. 땅과 인간과 소와 말, 풀잎이 모두 연결되어 있는 이들의 삶의 터전이던 뉴멕시코주는 바로 원자폭탄 실험이 이루어진 장소다. 푸레블로 족에게서 빼앗은 땅에 미국 정부는 원자 폭탄 실험장을 만들었다. 타요는 2차 대전을 통해 원자폭탄의 쓰임새도 경험했다.

“재래식 전쟁에서는 다른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을 모르면서 혹은 결과를 보지 않으면서 죽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다. 직접 대면하지 않고도 사람을 죽이는 핵폭탄처럼 인간은 잔인함을 느끼지 않고 잔인해질 수 있다. 마당에서 기르던 닭과 돼지를 잡아먹는 것보다 마트에서 ‘고기’를 구입하는 게 더 윤리적일까. 공장식 축산제 ‘덕분에’ 잔혹함이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마트에서 붉은 살은 용도에 맞게 카레용, 불고기용, 구이용 등으로 깔끔하게 포장되어 나온다.

사냥이 ‘스포츠’이며 ‘취미 활동’인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좀 혼란스러웠다. 그들은 사냥한 동물을 박제하여 온 집에 전시한다. 뱀, 곰, 사슴 등. 언젠가 이 동물들의 잘려진 머리통이 박제된 채 벽을 둘러싼 공간에서 만찬을 한 적 있다. 식탁 위에는 고기가 올라와 있고 그 고기를 먹는 인간을 박제된 동물이 내려다본다. 사슴과 곰은 정말 물체일 뿐이었다.

우리는 땅에 속해 있다. 그러나 동물은 인간의 장난감이고 부동산은 어른들의 고급 쇼핑 대상이다. 땅과 돌과 퓨마와 물고기와 바람이 모두 연결된 존재임을 인식하지 않은 채 우리는 그저 ‘먹고 본다’. 눈으로 집어삼키고 입으로 집어삼킨다. 퓨마가 동물원의 철장을 벗어나 거닌 시간은 4시간 정도다. 그마저도 마취총을 맞아 몇 시간은 기분이 안 좋았겠지만, 그래도 그 잠깐이나마 뽀롱이가 짜릿한 해방감을 느꼈기를 바란다. 처음으로 자연 속에 있었던 시간이니까. 수목장으로 장례를 치른 뽀롱이의 몸은 다시 흙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영화 ‘옥자’ 스틸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