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철의 멋진 신세계?] 생명을 마음대로 편집할 권한은 누가 주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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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의 전설적인 왕 길가메시는 죽음을 없애버리려는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기나긴 항해를 떠나지만, 결국 불사와 영생을 얻는 데는 실패한다. 인류 최초의 문학으로 인정받는 ‘길가메시 서사’는 영생을 향한 인류의 욕망을 빗대는 이야기로 곧잘 일컬어진다. 그런 점에서 구글 자회사 칼리코(Calico)가 추진하고 있는 노화 극복과 생명연장 기획의 이름이 ‘길가메시 프로젝트’인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영생을 향한 열망만으로는 불멸의 비결을 손에 쥘 수 없었던 고대의 영웅과는 달리 오늘날 과학기술이 추진하고 있는 ‘길가메시 프로젝트’는 생명연장의 가능성을 이미 실현하는 데 이르렀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길가메시 프로젝트’가 모든 과학기술의 주력 상품이 되었으며, 앞으로 이를 막는 것은 불가항력이라고 단언한다.

용맹 하나만으로 정진했던 수메르의 길가메시와는 달리, 오늘날 길가메시의 어깨에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목말을 타고 있다는 것이다. 하라리는 인류의 영생을 향한 오랜 욕망 위에 역사 최초로 이를 가능하게 하는 ‘지적 설계’가 작동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이러한 판단을 근거로 인류의 미래를 ‘사피엔스의 종말’로 전망한다.

생명공학의 무한 질주

하라리의 이 같은 선언과 전망이 그럴듯하든 아니든 간에 현실에서는 생명공학을 필두로 과학기술의 질주가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고 있다. 2003년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가 99.9%의 정확도로 완성된 이래, ‘합성생물학’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를 이어받아, DNA 단계부터 인간이 직접 디자인하여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내겠다는 기획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기존 생명체 유전자 몇 개를 조작하는 방식을 벗어나 인간이 다양한 생명체의 유전자를 조립해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합성생물학은 기존 생명체를 모방하거나 자연에 존재하는 생명체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은 인공생명체를 제작하거나 합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합성생물학 분야의 연구를 선도한 크레이그 벤터는 2006년에 자신의 이름을 딴 유전체 연구 기관을 설립하고 2010년에는 세균의 유전체를 인공적으로 합성한 후 다른 종의 세균에 이식해 새로운 생명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생명체는 자기복제에 의한 재생산이나 대사와 같은 정상적인 생명체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지난 2016년에는 최소 유전자만 지닌 ‘최소세포’를 합성해냈다. 유전체 지도를 이용해 컴퓨터 설계와 화학적 유전자 합성 방식으로 인공 박테리아를 만들어낸 것이다.

합성생물학에 더해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 시스템의 창안은 ‘DNA 혁명’이라 부를 만큼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송기원 연세대 교수는 그의 저서 <송기원의 포스트 게놈 시대>에서, “크리스퍼 기술을 이용하면 인간 유전체에서 유전자를 하나씩 제거해 볼 수 있고 그때마다 표현형이 어떻게 바뀌는지 관찰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 방법을 이용하면 유전체를 이루는 유전자들이 각각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이 연구를 통해 유전자 연구의 획기적이고 새로운 기반이 마련됐다고 평가한다.

또한 이 기술의 발견으로 거의 모든 생물에서 유전체 변형이 가능해졌고 이들을 모두 모형 생명체로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신약의 효과나 발병 원인을 연구할 때 인간의 신체와 유사한 동물 모형을 연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이용한 유전학적 방법론인 ‘유전자 드라이브’는 말라리아모기 퇴치를 위한 유전자 변형에 처음 도입된 이래 여러 방면에 지속적으로 응용하고 있다.

합성생물학이나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생명공학의 눈부신(?) 성취임이 틀림없지만, 위험성과 부작용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합성생물에 대한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일어날 사태는 걷잡을 수 없다. 2012년에는 합성생물학 기술을 적용하여 만들어낸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는 연구가 발표되었다.

특히, 최근에는 기술의 개방화와 대중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져 합성생물학의 재료와 방법이 인터넷을 통해 쉽게 공유되고 있어서 위험성이 훨씬 커지고 있다.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독성물질을 만들어내는 생물체를 합성해 유포하는 일이 벌어지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이 지닌 위험성은 더욱 분명하다.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서 유전자 교정과 편집이 이루어지면 우리가 알 수 없는 유전자의 DNA 변이가 일어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영국 웰컴생어연구소에 진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가 세포 안에서 작동할 때 의도치 않은 유전체 염기서열의 변이를, 우리에게 흔히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일으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대량으로 일어나는 DNA 변이가 진행되면 유전자 가위의 치료 대상이 되는 수많은 세포 중에서 암 발병으로 진행되는 세포가 생겨날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유전자에 돌연변이를 일으키거나, 복제와 같은 변화를 줄 경우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많은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생명공학의 윤리 문제와 맘몬 숭배

생명공학의 위험성과 윤리적 문제가 제기된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우리는 지난 2005년에 있었던 이른바 ‘황우석 사태’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황우석 사태는 생명공학 연구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전무했던, 우리 사회에 커다란 경종을 울렸다.

황우석 사태를 ‘연구논문 조작’이나 ‘연구비 횡령’ 같은 연구윤리 문제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줄기세포 연구를 비롯한 생명공학 연구의 발전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지만 논문 조작과 같은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더구나 황우석 사태가 환기했던 생명공학 연구에 대한 문제의식마저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희미해져 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국가와 자본에 의해 요란하게 진행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은, 생명공학 기술과 바이오산업의 폭주를 한층 더 가속화하고 있다. 최근 들어 빅데이터, 인공지능, 나노 기술과 같은 급진적 기술과 결합한 생명공학 기술을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로 간주하고 있다. 이에 따라 생명공학을 미래의 가장 확실한 먹거리로 여기는 자본과 산업 논리가 전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주류 언론과 학계를 중심으로 생명공학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나 윤리적 문제 제기를 한낱 반대론자들의 상투적인 발목잡기쯤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미래 성장 동력’이라는 해묵은 논리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다.

생명공학의 급진적 발전은 국가와 자본의 적극적인 추동으로 가능하다. 생명공학 기술 발전이 우리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으로 질주하는 것은 결국 ‘돈’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엄청난 규모의 자본이 투자되고 있고, 의료 및 바이오산업에서 얻을 수 있는 이윤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라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글로벌 자본이 앞다투어 생명공학 기술에 투자하는 추세를 보면 이 같은 진단이 결코 과장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를 두고 영국의 생명윤리학자 도나 디켄슨은 <한 손에 잡히는 생명윤리>에서 “의생명과학의 상업화와 부패에 대한 우려는 전보다 훨씬 커졌다”라고 진단하며, 생명공학의 맘몬(재물의 신) 숭배를 강력히 비판한 바 있다. 이익과 효용 논리로 밀어붙이는 생명공학 기술의 무한 폭주는 이제 제어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디켄슨은 “돈벌이를 위한 지식 사용”이 생명공학기술 상업화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생명윤리, 혹은 그 이전의 문제

생명공학자들은 기술적으로 이미 스스로 생명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고 선언하고 확증한 바 있다. 이러한 사태를 두고 인간이 이제는 창조자의 반열에 올랐다는 호기로운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의료와 생명과학, 바이오산업이 만들어내는 장밋빛 청사진이 나부낀다. 물론 이들의 반대편에서 생명윤리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미 판도라의 상자는 열려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비판론자를 포함한 대다수 사람들이 이러한 변화를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허나 정말 그러한가? 정말 그렇다면 생명에 관한 우리의 오랜 윤리와 관습은 기술의 폭주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굴복해야 할까.

결국 이 문제는 생명윤리에 반하는 기술의 폭주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논의로 귀결되겠지만, 그 이전에 우리는 우리의 권한과 한계 밖에 있는, 우리의 불완전하고 무모한 힘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한다. 생명을 조작하고 만들어내는 이 엄청난 비윤리를 생래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