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언어와 집에서 추방된 존재 /이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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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저녁에 KBS에서 방영하는 ‘우리말 겨루기’를 가끔 본다. 우리말이 참 어렵다. 한 번은 트로트 가수들이 출연했다. 그중에 제임스 킹이라는 가수가 있었다. 그는 트로트 가수 데뷔 전에는 ‘혼혈이라’ 한국인이어도 어쩔 수 없이 영어로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피부색이 조금 다른 그는 아무리 한국어를 잘하는 한국인이라 해도 외국인으로 규정되었다. 결국은 생김새의 차이가 가장 강력한 경계선을 만드는 씁쓸한 현실이었다.

▲가수 제임스킹 [사진=EBS 리얼극장 갈무리]

‘프랑스에도 인종차별 있어요?’, ‘북유럽이 더 심하다면서요?’, ‘미국에 인종차별 심하죠?’ 외국에 거주하면서 종종 들을 수 있는 질문 중 하나다. 이 질문은 내게 또 다른 의문을 남긴다. 우선 인종차별 없는 나라가 어디 있을까. 게다가 대부분 이런 질문을 할 때 ‘인종차별 당할 수 있는 한국인인 나’를 생각한다.

‘인종차별에 가담할 수 있는 나’는 그 질문에서 고려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북유럽이 더 심하대”라고 말한 몇 분 뒤에 “아랍 애들 보면 왜 유럽에서 싫어하는지 이해가 된다니까”라고 한다. “왕따 당하는 애들 보면요, 왕따 당하는 이유가 다 있어요”라고 말해서 나를 놀라게 하던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의 목소리가 기억난다.

차별은 물리적 폭력이나 명확히 드러나는 조롱과 따돌림에 한정되지 않는다. 어떤 종류든 차별에 숨겨진 공통점은 한 사회의 다수를 구성하는 이들이 스스로가 ‘피해자’가 될 가능성만 생각하는 점이다. 막상 사회의 소수자에게 어떤 피해가 발생했을 때 그 피해자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피해자가 내게 폭력을 자극할만한 행동을 했다, 그래서 나도 피해자다, 이렇게 피해자의 자리를 두고 경쟁한다.

가난하고 언어가 원활하지 않은 외국인은 마치 피부를 상실한 사람과 같다. 가족과 헤어져 있고 자신을 보호해줄 국가가 사실상 부재하다. 이들에게 언어는 타인과 연결되는 도구가 되지 못하고 이들을 더욱 고립시키는 무형의 벽으로 자리한다. 동시통역 서비스는 권력이 있는 사람만이 누린다.

아무리 원활한 소통이 가능해져도 한 박자 느리게 답하고, 한 박자 느리게 웃는 일상은 외국인에게 보편적이다. 언어는 외국인을 일상적으로 추방한다. 소통의 동시성을 얻을수록 외국인은 현지인의 삶에 가까워진다.

외국어에 둘러싸인 사람이 어려움을 겪는 순간은 다양하지만, 그중에서 ‘신속함’을 요하는 상황은 외국인을 더욱 곤란하게 만든다. 응급 상황에서도 언어는 느리게 전달되거나 혹은 전달되지 못한다. 아예 엉뚱하게 전달되어 더욱 위험해질 수도 있다. 외국인은 이렇게 외부의 언어로부터 단절된 한 사회의 외부인으로 존재하고 만다. ‘불이야’를 알아듣지 못해 삶을 잃은 우즈베키스탄 출신 두 아이가 이를 잘 보여준다.

지난 10월 경남 김해의 한 원룸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때 다치거나 사망한 사람 4명은 모두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어린 아이들이었다. 보호자인 어른이 화재 당시 없었고, ‘불이야’라는 한국어를 아이들이 못 알아들어서 피해가 더 컸을 것이다. 그들의 죽음이 개인적인 불운이 아니라 사회적 관심을 받아야 하는 이유다.

저유소에 불이 나는 대형 사고가 났을 때 한 스리랑카 노동자가 날린 풍등을 원인으로 놓고 ‘스리랑카’ 노동자가 집중 조명을 받도록 했다. 한국에서 화재로 사망한 외국인보다 화재를 일으켰다고 여겨지는 외국인이 더 많이 호명되며 대중의 뇌리에 오래 남는다. 비한국인의 빈곤과 고통은 그렇게 쉽게 잊혀지지만 그들이 ‘한국인’에게 손해를 끼쳤다고 판단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기억하여 여론으로 응징한다.

이와 같은 상황은 얼마 전 인천에서 발생한 중학생 집단폭행 추락사 사건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사건의 피해자는 언론에 따르면 “러시아 국적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온 ‘다문화 한부모 가정’의 자녀였으며, 이 같은 사실을 이유로 과거 많은 놀림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외국인이 벌인 범죄에 대해서는 꼬박꼬박 그들의 국적을 강조했지만, 정작 생김새가 다른 이들이 피해자가 되었을 때 이 사실은 쉽게 잊혀진다.

빈곤은 젠더화, 인종화 된다. 나도 한국에서 집을 구하며 ‘외국인들 많이 사는 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들었다. 여기서 ‘외국인’은 외국에서 온 이주노동자에 한정되는 표현이다. 그 외국인들에게 한국인은 안전한가요? 묻고 싶다. 아니, ‘같은 한국인’끼리는 서로 안전해요?

미국 중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 시카고. 대도시에는 이민자들도 그만큼 많이 모여든다. <망고 스트리트>는 시카고에 온 멕시코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어린 여자아이의 시선을 빌어 전달한다. 작가 산드라 시스네로스의 첫 작품으로 실제로 그는 시카코의 빈민가에서 자라났다.

▲소설 ‘망고 스트리트’

발랄한 어린아이들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망고 스트리트>은 맑시즘과 페미니즘을 관통하는 성장기 소설이다. 빈민가 아이들이 자전거를 공유하는 방식, 남편 때문에 집에 갇힌 여성들, ‘보쌈’을 당해 결혼한 주인공의 할머니 등을 통해 양파처럼 겹겹이 싸인 차별을 드러낸다.

<망고 스트리트>는 책의 시작을 “세상의 모든 여성들에게”로 연다. 이민자 중에서도 어린 여자아이들의 취약한 상태를 잘 보여준다. 이중 인상적인 대목은 한 아시아계 남성이 주인공 에스페란자를 성추행하는 장면이다. ‘같은 이민자’ 아저씨의 친절함에 마음을 열었더니 그 아저씨는 상냥하게 다가와 강제로 입술을 추행한다.

그들에게 집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인간관계와 법적인 보호망이 취약한 이들에게 물리적 공간인 거주지마저 취약할 때 이들이 겪는 고통은 배가 된다. 물리적 공간과 언어의 불안정성은 외국인을 한 세계의 바깥으로 끊임없이 밀어낸다. 이민자들은 모여 살면서 자신들이 사는 동네를 하나의 국가로 만든다. 리틀 차이나, 리틀 이탈리아의 형성은 이민자에게 부재한 국가를 대신하는 하나의 보호구역이나 다름없다.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 우리 동네에 오게 된 낯선 사람들은 잔뜩 겁을 집어먹는다. 그들은 우리를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번쩍번쩍 빛나는 칼을 들고 다짜고짜 공격할 거라고 생각한다. 길을 잃고 실수로 이곳에 오게 된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멍청이들이다.……갈색 피부색에 둘러싸여 있을 때 우리는 안전했다.”

주인공 에스페란자는 집과 방을 갈망한다. 남자들이 주인인 집이 아닌 오직 자신의 집. 그 집은 안전한 장소이자 오직 나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그런 집. 식탁에서 누구의 시중을 들 필요 없는 그런 집. 고시원에서 불안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나 외국인들도 그런 집을 꿈꾸리라 생각한다. “시를 쓰기 전의 깨끗한 종이 같은” 그런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