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빵과 시 /이라영

10:40

홍차는 내게 제인 오스틴을 떠오르게 하고, 호밀빵은 에밀리 디킨슨을 떠올리게 만든다. 홍차와 빵이 오스틴이나 디킨슨과 동격이어서가 아니다. 제인 오스틴이 아침에 홍차 마시기를 좋아했기 때문이고, 에밀리 디킨슨은 빵을 잘 구웠기 때문이다. 그들이 좋아했던 대상과 만들었던 대상을 떠올린다.

디킨슨은 1856년 그가 살았던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애머스트에서 열린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있을 정도로 빵을 잘 구웠다. 부엌에서 달큰한 호밀빵과 옥수수빵을 굽는 에밀리 디킨슨의 모습을 상상하면 오븐 속의 열기처럼 마음이 뜨거워진다. 미국이 아직 서부의 자원을 덜 착취하던 시절, 밀 재배가 어려웠던 미국 동부 사람들은 호밀과 옥수수를 이용한 빵을 주로 만들었다.

호밀빵 주세요. 아침식사를 주문하며 토스트를 고르라고 할 때 늘 나는 호밀빵을 찾았다. 밀가루로 만든 빵보다 색이 짙고 조금 더 거칠다. 호밀빵 위에 버터와 계란과 훈제 연어를 올려 먹으면 맛있다.

생뚱맞게 왜 먹는 타령인가 하니, 여자와 음식이 동격이 되는 문화가 지긋지긋해서다. 여성의 몸과 먹거리를 문학의 이름으로 뒤섞어 놓은 진부한 표현들은 말의 낭비처럼 여겨진다. 음식을 사이에 두고 여자와 마주 앉아있기보다 음식과 여자를 모두 ‘먹으려는’ 입속에 꾸역꾸역 ‘여자의 말’의 집어넣고 싶다.

“소멸할 권리란 분명
당연한 권리 –
소멸하라, 그러면 우주는
저쪽에서
저의 검열관들을 모으고 있으리니 -”

많은 여성 작가들이 그렇듯이, 시인 에밀리 디킨슨도 죽은 후에 재발견됐다. 그의 몸은 소멸했으나 그의 말은 남아 그를 부활시켰다. 그가 살았던 19세기에 여성의 열정과 야망은 지금보다 훨씬 더 위험했다. 그는 시를 통해 ‘소멸’과 ‘무명’을 긍정하지만, 그에게도 ‘야망의 맥박’이 뛰었다. 그는 입을 다물지 못해 시를 썼다. 전통적으로 여성들은 ‘야망의 맥박’이 느껴지면 이를 잠재우려 했다. 여성이 ‘셀럽’이 되고 싶다는 목소리는 셀럽파이브의 재미있는 노래처럼 희화화될 때 안전하게 퍼져 나간다.

과거에는 은둔이 내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은둔은 사회와 단절한 채 자신을 은폐시키며 세상의 갈등에서 회피하는 자세라 생각했다. 요즘은 그 생각이 점점 바뀌어간다. 인정받기에 대한 불안을 잠재울 용기가 없으면 은둔할 수 없다. 대부분은 ‘셀러브리티’를 욕망하지는 않더라도 ‘노바디’가 될까봐 두려워한다. 그에 비하면 ‘무명인’ 곧 ‘나는 아무나다’라고 말하는 자세는 내면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단단함이 있기에 가능하다. 종교적 관념을 거부했던 개인주의자이며 당시 여성에게 강요되던 관습을 따르지 않았던 그가 집 밖을 나오지 않았던 것은 자신만의 안전한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에밀리 디킨슨 박물관(왼쪽)과 에밀리 디킨슨(오른쪽) [사진=flikr.com, 예일대 소장 자료 편집]

보스턴에서 서쪽으로 자동차로 2시간 이내에 도착하는 애머스트가 있다. 디킨슨이 56년간 살았던 이 마을에는 에밀리 디킨슨 박물관이 있다. 살아서 그의 물리적 활동 반경은 좁았을지 몰라도 생각의 반경은 무한했다. 흥미롭게도 ‘무명인’을 노래하던 그는 유명인이 되었고 집 밖으로 나가지 않던 그의 집으로 전 세계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는 집 안으로 세계를 빨아들였다.

알베르투 카에이루의 시 한 구절처럼 “아름다우면서 인쇄되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는 말은 디킨슨에게 딱 들어맞는다. 1700 편 정도의 시를 썼지만 살아서는 한 권의 시집도 내지 않았고 약 일곱 편 정도의 시만 발표했던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사후에 출간되었다. 비록 뒤늦게라도 그 아름다움이 발견되면 인쇄된다. 출판(publishing)은 공중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행위다.

시집은 출간하지 않았지만, 쿠키와 케이크를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일이 그에게 일종의 ‘출판’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를 쓰는 행위는 여성적이지 않았으나 빵을 만드는 행위는 전통적으로 여성적이었다. 위험한 말은 서랍 속에 고이 넣어두고 대신 사람들의 입속에 그가 만든 빵을 넣었다.

부엌은 디킨슨이 집안에서 오래 머물렀던 장소다. 그가 편안하게 느꼈던 공간이다. 먹을 것을 만드는 행위는 삶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의욕적 행동이다. 그렇기에 막연히 생각하는 ‘은둔’의 이미지와 실제 디킨슨의 삶은 거리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시만큼이나 강했던 꽃에 대한 그의 관심도 그가 얼마나 생명에 집중했는지 알 수 있다.

시인의 빵 굽기는 돌봄과 창작 행위의 결합이었다. 코코넛 케이크를 잘 만들었고, 생강향이 감도는 진저브레드를 만들어 이웃 아이들에게 나눠주기를 즐겼다. 가족들이 먹는 빵도 그가 주로 담당했다. 대문자를 많이 사용하거나 기존의 운율에서 벗어난 시를 시도했듯이 그는 새로운 방식으로 빵 만들기도 즐겼다. 여성에게 새로운 언어는 위험하지만 새로운 조리법은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시가 독자가 있어야 한다면 빵도 먹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에게 시와 빵은 발언의 도구이며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매개였다. 특히 그의 요리는 주로 디저트에 특화되어 있었다. 제 삶을 스스로 달콤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역사에서 시의 주체로 살아온 남성들은 여성들과 마주앉기에 종종 실패한다. 여자를 과일로 만들거나 고기로 만들어 식탁 위에 올리지 말고, 여자의 말을 먹어 보길. 기존의 언어가 전복될 것이다.

“행위는 처음에 생각을 노크하지
그리곤- 의지를 두드려
그것이 제조의 현장
또한 평화와 행복의 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