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철의 멋진 신세계?] 에르빈 샤르가프와 생명조작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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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전해진, ‘유전자편집아기’ 출산 소식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충격이었다. 생명공학 기술이 인간의 생명을 편집하고 만들어내는 단계까지 이르렀다는 데 대한 놀라움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무지막지한 기술을 인간에게 사용할 생각을 했으며 실제로 감행했는지, 그 오만과 만용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실 생명공학기술은, 여러 우려와 경고에도 이론적으로는 이미 유전자편집을 통해 인간의 생명체를 편집하고 만들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합성생물학과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와 같은 생명공학 기술은 이 같은 사태를 충분히 예견하고도 남을 만큼 급격하게 발전해왔다. 특히, 중국의 가세로 과학기술 강국들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기술 폭주 양상이 더욱 거세졌다. 미래의 가장 확실한 ‘돈벌이’라 불리는, ‘생명산업’의 바탕인 생명공학기술을 국가와 자본이 가만둘 리 만무하다.

이번 ‘유전자편집아기’ 출산은, 중국의 허젠쿠이 교수가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 어느 과학기술자가 언제 어디서 이 무모하고 불경한 실험을 실행에 옮겼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허젠쿠이 교수가 아니라 이러한 비윤리와 무모함을 가능하게 하는, 한도를 넘어선 생명공학기술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지난날 황우석이나 지금의 허젠쿠이처럼 특정 과학자의 연구 윤리 위반이나 부정을 문제 삼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유전자편집아기’ 출산 소식이 전해진 다음, 전 세계적으로 깊은 우려와 비판이 여기저기서 제기되었지만, 결국 ‘생명윤리 논의’나 ‘연구윤리 규정 마련’과 같은 그동안 흔히 있었던 미봉과 방책을 답습하는 데 머무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목소리마저도 벌써 잘 들리지 않는다.

에르빈 샤르가프, <생명과학의 딜레마>

그런 의미에서 격월간 《녹색평론》(제164호, 2019년 1~2월)에 실린, 저명한 생화학자이자 과학문명비평가였던 에르빈 샤르가프의 <생명과학의 딜레마>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에르빈 샤르가프(Erwin Chargaff, 1905~2002)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 체르니우치 출생으로 히틀러 나치 지배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 뉴욕의 콜럼비아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쳤다. 생화학자로서 샤르가프는 1940년대 후반, 유전자 암호 해독에 있어서 불가결한 ‘샤르가프 법칙’을 발견하여 이 분야에서, “다윈과 멘델의 업적에 비견될 중요한 발견”이라는 칭송을 들을 정도로 큰 획을 그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과학 연구가 점점 비대해지고 상업화하는 경향이 짙어지자 샤르가프는 이에 대한 비판과 경고의 목소리를 쉬지 않고 내었다. 《녹색평론》 164호에 실린 <생명과학의 딜레마>는 과학기술과 생명과학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을 담고 있는 글이다.

▲녹색평론 2019년 1-2월 164호

놀라운 것은 샤르가프가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과학자들의 무모함과 무지, 현대과학의 배후에 있는 국가와 자본의 타락, 생명과학이 지닌 특수한 문제, 그리고 진정한 과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읽어도 전혀 이질적이지 않은 내용이라는 점이다.

당대 누구보다도 뛰어난 과학자였지만 과학계의 타락과 무도를 눈앞에서 경험한 샤르가프의 혜안이 돋보이는 부분이지만,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만큼 현대과학의 고질적 병폐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 없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본질적으로 치유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샤르가프는, 현대과학이 다윈 시대 이후 악화 일로를 걷다가 이제는 “극단적으로 오만해져버렸다”고 진단한다. 그 결과 과학자들은 “큰 소리로 그리고 흔히는 어리석게도, 거의 모든 문제에 관해 발언할 특권이 자기들에게 있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샤르가프의 말처럼 과학자들이 연구실이나 실험실의 좁은 공간에 갇혀 평생 거품상자나 원심분리기(지금은 첨단장비로 대체되었겠지만)를 돌리면서 인간과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과 예지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과학자들은 인간과 생명에 대해 혹은 자연 현상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극히 일부의 사실이나 진실을 갖고 마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행세한다.

샤르가프는 “과학이라는 것은 자연의 부분들에 관한 진실을 알려는 노력”이라고 말한다. 자연은 인간이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하고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에 이를 연구하는 과학은 개별적으로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특정한 분야의 과학을 연구하는, 특히 직업적 과학자들의 시야는 좁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시간이 갈수록 더 원자화되고 미세하게 분화되어 가는 과학계의 추세를 생각할 때, 더욱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과학과 기술이 자연과 세계를 통찰하는 지혜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은 ‘현대의 미신’이 되어버렸다. 물론 근래에 이르러서는 과학자들 스스로 이러한 기대나 소망조차 이미 걷어차버렸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과학이 나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샤르가프는 ‘인간적 규모’를 넘어서지 않는 ‘작은과학’을 제안한다.

“과학자가 자신을 고용해준 흥행주를 위해 ‘뱀 기름(가짜 만능약)을 생산하여 그가 다른 흥행주들에게 그것을 팔도록 하는 시스템(거대한 실험공장) 속에서 일을 할 것이냐, 아니면 ‘작은과학’–소수의 선택된, 헌신적인 개인들의 활동–을 재건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이 ‘작은과학’을 행하는 실험실의 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힌 쪽지가 붙어 있을 것이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서둘러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샤르가프가 이 글 말미에서 언급하고 있는 ‘작은과학’이란, 국가나 자본에 의해 주도되는 거대 프로젝트, 예를 들면 인간의 생명을 볼모로 오로지 ‘돈벌이’만을 위한 생명산업에 철저히 복무하는 생명공학기술과 정반대 지점에 있는 과학을 말한다. 그가 말한 생명과학의 ‘딜레마’는 결국, 오로지 ‘돈벌이’가 목적인 거대한 실험공장(생명산업시스템) 속에서 고용주를 위해 ‘뱀기름’을 만들어 파는 존재가 될 것인가, 아니면 소수지만 독립적이고 헌신적인 활동을 재건하는 데 힘쓰는 ‘작은과학’을 추구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문제다.

“우리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끔찍한 사태에 익숙해져버렸다.”

에르빈 샤르가프를 처음 접한 것은 황우석 광풍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던 시기에, 《녹색평론》에 실린 <자연의 탐구와 인간의 변질>(제83호, 2005년 7~8월)이라는 에세이와 <”우리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끔찍한 사태에 익숙해져버렸다”-생물학자 에르빈 샤르가프와의 대담>(제86호, 2006년 1~2월)을 통해서였다.

안타까운 일은, 이처럼 우리에게 큰 울림과 각성을 주는 과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의 글을 소개하고 언급하는 것은 《녹색평론》 지면과 발행인 김종철 선생의 칼럼뿐이다. 이는 그만큼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 수 없다.

샤르가프는 근대과학의 대안을 떠올리는 일에 대해 목적이나 목표의 변경을 통해서 개혁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하며, “현재의 자연과학의 연구방법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세계사에 있어서 가장 큰 패러다임 변환의 하나이며 불교의 성립 혹은 기독교의 융성과 비견할 만한 것”이라 진단한다.

그만큼 근대과학의 극복과 대안은 부분적이고 지엽적인 실천으로는 어렵다는 뜻이다. 샤르가프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근대 이후 오늘날까지 초고속으로 변질되어 온 과학연구 방법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지금의 관행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일지도 모르지만, 달리 말한다면 파멸을 향해 가는 근대과학기술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는, 지금의 과학연구 방법과 정신으로부터 이탈해야만 가능한 일이 된다.

▲에르빈 샤르가프(Erwin chargaff, 1905~2002)의 젊은 시절, 1930년.

유전자편집기술과 같은 생명조작기술이 가져온 거대한 폭력 앞에서 무엇보다도 무서운 일은, 샤르가프가 말한 바대로, 우리가 이러한 “상상할 수조차 없는 끔찍한 사태에 익숙해져버렸다.”는 것이다. 인간적 규모와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가공할 거대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우리는 그 폭력 앞에서 공포에 떨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사이 온갖 부작용과 병폐를 인내해가며) 익숙하게 수용해 왔다.

인간의 한도를 넘어선 기술이란 결국 인간의 수용 범위를 넘어선다는 뜻이다. 앞으로도 우리가 익숙하게 적응해 갈지는 몰라도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점점 우리 자신이 인간이 아님을 증명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그 한도의 극점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당연히 한계가 있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며, 자연과 우리 스스로에 대해 다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자신 스스로, 과학자이자 비판자로서 20세기 근대과학을 온몸으로 겪었던 에르빈 샤르가프의 말처럼 “알지 못하는 것은 은총이며, 불확실함은 삶의 소금”이란 사실을 되새겨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유전자편집과 같은 생명조작기술은 윤리나 규제 이전의 문제로 인식되어야 한다. 생명조작기술은 과학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상상해서도 안 되는 인간 스스로에 대한 범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