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스카이 캐슬’의 사회학: 문제는 시험이 아니다 /박권일

14:31

드라마 ‘스카이캐슬’을 스릴러 또는 막장극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 생각에 이 드라마 장르는 재난물이다. 자녀입시라는 ‘자연 재난’ 앞에서 인간군상이 어떻게 바닥을 드러내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태풍과 지진의 발생을 차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한국인은 대학입시를 없앨 수 없다. 아니, 없앨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렇게 ‘자연화’되어있다는 의미에서 입시는 ‘자연 재난‘이다. 불가항력의 사태. “인내는 쓰지만 열매는 단” 과정. 태풍, 지진과 다른 점은 일정이 정해져 있다는 점 정도다.

드라마의 스타일은 극사실주의다. 캐슬에 사는 부모들은 자식을 서울대 의대에 보내기 위해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매회 ‘세상에 이런 일이’ 급의 사건이 펼쳐지는데, 기시감이 강렬하다. 많은 경우 실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에피소드인 까닭이다. 캐슬 주민뿐 아니라 그들의 행동에 반기를 드는 ‘정의의 화신‘ 이수임조차도 현실에 있을 법한 캐릭터다. 많은 시청자들이 “내새끼 이기주의자 한서진보다 사사건건 훈장질하는 이수임이 더 싫다”고 아우성이었다. 본인 역시 캐슬에서 ‘의사 사모님’으로 살아가면서 입바른 이야기만 늘어놓는다는 것이다. 이수임의 어떤 대사에서 “(난 거기 살지만) 모두가 강남 살 필요는 없다”던 전 청와대 고위 인사를 떠올린 이도 있었으리라.

일탈과 광기,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야 드라마로 즐기면 그만이지만, 입시지옥이란 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들의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그만큼 대학들도 사라질 것이다.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경쟁압력이 극적으로 낮아지진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성적표를 받아든 학생이 어느 건물 옥상에 서 있을지 모른다. 모든 이가 반쯤 체념한 채, 반쯤은 분노한 채 피로감 가득한 눈으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어찌할 것인가? 명쾌한 대안은 아직 이르다. 그게 쉬웠다면 상황이 이 지경이 됐을 리 없다. 이렇게 다시 묻자. 어디서부터 실타래를 풀어 가야 하는가?

▲[사진=JTBC 스카이캐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원인을 정확히 짚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모든 걸 ‘시험(만능주의)’ 탓으로 돌리는 태도다. 그럴듯하게 들리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관점이다. 예컨대 정치학자 이관후는 이렇게 주장했다.

“한국은 아마도 전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시험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나라일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 제도를 능력주의,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라고 하는데, 아니다.”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는 오로지 단 하나의 능력만이 필요하다. 요령을 터득하여 짧은 시간에 많은 문제를 푸는 능력이다. 이것은 메리토크라시가 아니라 시험주의, 곧 테스토크라시(testocracy)다.”
(이관후, 시험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한겨레>, 2018.11.20.)

이관후는 또한 “국어 31번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과 좋은 시민이 되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서 “시험으로 판사와 공무원을 뽑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럼 뭘로 뽑을 거냐고? 그 답을 회피해서 세상이 이꼴이다.” 결론은, 시험을 대체할 능력평가의 대안적 방식을 열심히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험을 대체할 선발방식에 대해 우리가 정말로 ‘답을 회피’하기만 했을까? 그렇지 않다. 지금의 학종(학생부 종합전형)만 하더라도 “한 번의 시험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비인간적 제도”라는 문제의식이 쌓여 탄생한 대안이다. 취지는 아름다웠지만 지금 불만은 팽배하다.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못한”, “금수저만 유리한” 제도라는 비난이 빗발친다.

다시 학력고사 시절로 돌아가 전국 1등부터 전국 꼴찌까지 일렬로 줄 세워야 한다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온다. <스카이캐슬>에서도 묘사되듯 가진 자들의 편법과 반칙이 판을 치기에, 그나마 한날한시에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으로 결정하는 게 가장 “공정”하다는 논리다.

대한민국이 ‘시험왕국’이 된 건 사람들이 시험에 특별한 페티시가 있어서가 아니며, 그것이 최선의 방식이라 믿어서도 아니다. 다들 문제 많은 방식임을 잘 안다. 알고 있지만 포기할 수가 없다. 그것이 논란의 소지를 가장 줄일 방법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공정성과 정의에 민감할수록 시험만능주의는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시 이관후의 글을 보자. 원인과 결과가 뒤집혀 있다. ‘시험주의(테스토크라시)’가 정말로 문제의 원인일까? 그렇지 않다. 그건 원인이라기보다 차라리 결과 또는 효과다. 우리는 ‘미션 X’를 해결하려 노력하다가, 혹은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기에 시험만능주의에 다다른 거다. 그렇게 강화되고 확산된 시험만능주의는 다시 여러 부작용을 일으켰다. 요컨대 시험을 없앴다고 해도 궁극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미션 X’는 무엇인가? 바로 ‘능력자를 뽑는 가장 공정하고 정의로운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 미션, 임파서블(impossible)하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인사는 만사’이므로, 세상일이 참 쉬웠을 게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미션에 집착한다.

왜? 소수의 특권을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정당화하고 싶어서다. 너무 냉소적인가? 그러나 진실이다. 한국에서 ‘공정‘과 ‘정의‘라는 말은 굉장히 독특하게 사용된다. 많은 사람들이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기준과 과정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반면, 승자가 너무 많은 걸 가져가거나 패자가 너무 비참해지는 결과에는 놀라우리만치 무관심하다. 간혹 볼멘소리를 하면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비아냥만 돌아올 뿐이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가장 혐오스럽고 폭력적인 인물인 로스쿨 교수 차민혁이 자식들 귀에 피가 날 정도로 강조하는 말이 있다.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야 해!“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사회는 피라미드이고, 꼭대기에 서기만 하면 상상 이상의 특권과 면책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문제는 시험이 아니다. 승자독식의 피라미드다. 요컨대 극도로 불평등한 자원 배분 방식이야말로 ‘암흑의 핵심‘이다. 이 불평등은 너무나 심각해서 ‘기여에 따른 분배’, ‘재능에 따른 분배’, ‘노력’에 따른 분배’라는 기준 중 어떤 것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또한 자원을 독점한 승자들은 ‘지대추구(rent-seeking)‘와 ‘사다리 걷어차기‘에 몰두하며 공동체의 활력마저 떨어뜨린다. 해결책은 명료하되 지난하다. 더 강한 평등주의를 통해 피라미드에 균열을 내고 끝내 박살내는 것. 오직 그것만이 이 지옥을 끝장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