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고] ④ 대구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통용될 사랑 이야기 <혜영, 혜영씨> / 김상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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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7 10:23 | 최종 업데이트 2019-02-27 10:23

[편집자주]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가 최근 끝난 대구 독립영화관 오오극장 개관 4주년 기획전에서 관람한 대구 감독들의 신작 영화를 본 소감을 보내왔다. 지역 영화계에 대한 총론을 시작으로 각 영화에 대한 리뷰를 순차적으로 공개한다.

[연재기고] ① 대구 감독들의 신작 영화 3편을 본 후
[연재기고] ② 고령화 시대 가족의 초상 <할머니의 외출> 
[연재기고] ③ 차가운 도시, <이방인>으로 사는 현대인 /김상목

마지막으로 소개할 <혜영, 혜영씨>의 김용삼 감독은 이번에 소개한 영화 세 편 감독들 중 가장 오랜 경력을 갖고 있다. <나프탈렌이 되어줄래?>(2010), <가족오락관>(2010), <졸업 과제>(2011), <소멸불가>(2012) 등의 작품을 통해 픽션과 다큐를 가리지 않고 자전적인 이야기와 고민을 풀어내던 감독은 오랜 휴지기를 보낸 후 중편에 가까운 단편영화 <혜영>(2016)으로 2017년 18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 단편 경쟁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작업을 재개한다.

세 감독 모두 대구·경북이라는 지역에서 30대의 세대적 감성을 표출하는 작품세계를 보여주지만, 김용삼 감독은 10년에 가까운 활동 동안 자기 자신과 가족 이야기를 자연스레 끌어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특히 동시대 독립영화 감독들이 강박적으로 빠져들기 쉬운 사회적 주제에 대한 압박이 거의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세대적 고민을 빼먹지 않는 독특함은 바깥의 전문가들에게 더 주목받는 지점이다.

▲김용삼 감독의 <헤영, 혜영씨>

<혜영, 혜영씨>는 전작 <혜영>을 3배 넘게 늘려 장편으로 작업했다. 스스로의 작품세계를 “김용삼 시네마틱 유니버스”라고 지칭하는 감독은 전작들에서 자신을 과감하게 드러내던 요소들을 켜켜이 쌓아 올려 말 그대로 자신만의 우주를 확장하는 형식을 취한다. 그래서 본 작품은 감독의 전작 <가족오락관>을 봐야만 알 수 있는 유머코드가 존재하고, 단편 <혜영>을 봤다면 좀 더 이해가 되는 지점이 많이 있다.

세 감독 중 가장 경력이 긴 감독답게 이번 신작 장편으로 처음 김용삼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접한다고 해도 단품인 <혜영, 혜영씨>만 본다고 해서 기본적인 결함이 발생하진 않는 연출을 선보인다. 그러니 <혜영, 혜영씨>로 김용삼 감독의 우주에 발을 들인다고 길을 잃을 걱정은 너무 하지 않아도 될 테다(물론 예행연습 삼아 <혜영>을 먼저 봤다면 분명히 가이드 역할은 된다).

<반지의 제왕>과 <호빗>을 창조한 위대한 판타지 작가 J.R.R. 톨킨은 자신의 작품이 현실을 반영한 알레고리로 읽히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때로는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기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김용삼 감독 또한 자전적인 이야기들이 진하게 작품에 묻어나지만 그런 부분이 작품 해석에 지배적 영향을 미치는 걸 우려했다. 사적 이야기를 셀프 다큐멘터리로 찍어서 보여주는 게 아니라 픽션 극영화로 만든 것이기에 감독은 연출자의 실제 경험과 연출된 영화는 구분되는 것이 기본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혜영, 혜영씨>가 보다 많은 관객들, 특히 전작들을 보지 않은 이들에게 감독의 과거 사생활을 숨은그림찾기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노파심이 인다.

각설하고, <혜영, 혜영씨>는 사랑의 기억과 상실의 아픔이 타임루프물처럼 순환되는 이야기다. 그 속에서 또래 세대의 고뇌와 불안, 대구·경북이라는 지역적 코드가 이해될 때 빵 터지는 유머감이 적지 않지만, 영화는 감독의 연출에 의한 추상적이고 사적인 예술에 가깝다는 김용삼 감독의 지론에 충실하게 흘러간다.

단편 <혜영>에서 세 파트로 나뉘던 구분은 3배 넘게 늘어난 장편 <혜영, 혜영씨>에서 6.5 파트와 에필로그로 확대된다. 파트 구분만으로도 ‘김용삼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확장성을 드러내는 셈이다. 중요한 조연 두 명이 추가된 것도 단편과 장편의 차이다. 단편은 김용삼 감독이 직접 역할을 맡은 성우와 근래 독립영화계에서 주목받는 배우 문혜인이 맡은 혜영, 두 연인의 실내극에 가까운 구성이었다.

장편에는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혜영의 가족사를 해설하는 배우 고유준과 성우의 전 애인으로 분한 이태경 배우가 추가된다. 두 배우는 두 연인으로 집중되는 구조를 훼손하지 않고(오히려 강황시키면서) 숨어있던 이야기를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리는데 효과적으로 기능한다(대신에 전작에서 그 역할을 했던 이주노동자 캐릭터는 다소 역할이 축소되었다).

장편으로 변모하기까지 초반 세 파트는 단편 <혜영>의 전개를 고스란히 이어나간다. 그리고 전작을 본 이들이라면 익숙한 장면이 마무리되고 나서야 장편으로의 확장을 알리고 제목의 변경이유를 체감하게 하는 클로즈업이 활용된다. 프리퀄에 걸맞은 과거의 이야기들, 왜 단편 <혜영>에서 혜영이 그런 개성과 과장되어 보이기도 하는 액션들을 일삼았는지 하나둘 드러난다.

대부분의 시간을 원룸 안에서 보냈던 연인의 과거사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없는 커플의 기억을 우주적 이야기로 풀어내기 시작하면 위태로워 보였던 상영시간의 확장은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쯤 되면 전혀 시간 소모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혜영>은 <혜영, 혜영씨>로의 우주적 구조로 광대해져 한 커플의 사랑의 연대기를 완성한다.

▲김용삼 감독

영화를 본 이들에게 감독의 ‘페르소나’라는 호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문혜인 배우는 “혜영”이자 “혜영씨”로 기억될 것이고, 김용삼 감독은 ‘사랑이란 게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자신의 고민에 한 획을 긋는데 성공적인 전환점을 맞았다고 본다.

익숙한 소품은 적당히 지역적 색깔을 드러내고, 왜 두 연인은 멀리 떨어져 지내야 하는지 드러난 배경 정보는 세대적 감성에 조응한다. 가장 보편적인 인류적 이야기인 러브스토리에서 상실과 이별의 슬픔은 근래 본 한국 (독립/상업 막론한)영화들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감정적 응축을 선보이며 최루와 신파의 긍정적 기능을 보는 이들에게 선사할 것이다.

감독의 전작들도 지역적 배경이 묻어나지만 그게 결정적 요소로 쓰인 게 아니었다. 이번 작품은 굳이 ‘대구·경북 영화니까 밀어줘야!’ 같은 상투적 표현이 필요가 없어 보인다. 앞의 두 작품도 만만찮은 수작이자 기대치를 충족시켜주는 작품들이지만 <혜영, 혜영씨>는 지역 영화로 따로 우대 쿼터를 머릿속으로 설정하는게 오히려 작품에 대한 폄하가 될 정도다. 감독의 야심과 연출이 잘 맞아떨어지는 주목해야 할 작품이다. 이 슬픈 사랑 이야기는 북극부터 적도에 이르기까지, 대구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이르기까지 세대를 초월한 사랑과 이별의 원초적 체험담으로 통용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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