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곳곳 3·1운동 재현···100년 전 대구는 '3·8만세운동'

1919년 3월 8일 만세 운동 시작
만세 운동 일어난 서문외장(西門外場), 서문시장 위치 아냐
만세 운동부터 친일파에 ‘암살 경고장’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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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8 09:51 | 최종 업데이트 2019-02-28 10:26

100년 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서울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읽었다. 인근 탑골공원에 모여있던 시민들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이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퍼졌고 우리는 이날을 ‘삼일절’ 국경일로 정했다. 전국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념식과 재현 행사를 연다. 대구시도 8개 구·군에서 동시에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거리 행진과 기념식 행사를 SNS로 생중계한다. 100년 전 대구는 어땠을까?

▲2018년 만세 운동 재현 모습(사진=중구)

대구 3·1운동, 서문시장에서 일어난 거 아니었어?
현 서문시장 위치 아닌 큰장, ‘서문외장(西門外場)’
중구, 달성공원·청라언덕·보현사 3곳에서 거리 행진

대구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건 서울, 평양 등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된 지 일주일 뒤인 1919년 3월 8일이었다. 이만집 목사(장로파 야소교회)는 이미 2월부터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대구 출신 이갑성에게 서울에서 만세 운동이 있을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난 며칠 뒤, 서울에서 읽었던 독립선언서를 전달받고 본격적으로 만세 운동을 준비했다.

거사 일은 3월 8일, 장소는 대구읍성 서문 밖 시장(西門外場) 이른바 ‘큰장’이었다. 큰장은 당시 전국 3대 시장에 속하는 말 그대로 큰 시장이었다. 마침 장날이었고, 토요일이라 학생들이 참여하기도 쉬웠다.

대구지방법원 판결문(1919)과 대구시사(1995) 등 기록에 따르면, 장소는 ‘시장정(市場町)’, ‘서문외장(‘西門外場)’이라고 표현한다. 대구읍성 서문 밖 시장이란 뜻으로 ‘서문시장’으로 부르기도 했지만, 위치는 현재 서문시장은 아니다. 당시 위치는 현 서성로네거리 일대였고, 이후에 현 위치로 옮겨졌다.

▲일제강점기 시절 시장정(市場町) 위치(사진=『대구경북 독립운동사적지 1』)

큰장 일대는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등이 모여있었다. 8일 오후 3시께 이만집, 김태련 등은 미리 시장에 들어와 학생들을 기다렸다. 학생들은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척, 빨랫감을 들고 빨래터에 가는 척 위장을 해 시장으로 모였다.

학생들이 모여들자 이만집, 김태련 등은 쌀가마니 등으로 임시 연단을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읽었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 남성정(현 약령시 일대),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방향으로 행진했다.

“지금은 한국이 독립할 시기로서 각자가 독립을 희망함을 외치면 자연히 독립하게 될 것이니 만세를 소리높여 부르자” -대구지방법원 이만집 외 75인 판결문(1919.04.18) 중-

학생들이 행진에 나서자 신명여학교 학생들도 약령시 방면에서 합류했다. 신명여학교 뒤편 미국인 선교사가 모여 살던 동산에는 나무가 우거져 몰래 이동하기 수월했다고 한다. 현재 ‘청라언덕’, ‘3.1만세운동길’이 조성된 일대다.

대구 중구는 세 경로로 행진하는데, 두 번째 경로가 청라언덕에서 출발해 큰장이 있었던 서성로네거리를 거쳐 100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다. 대한광복회가 출범한 달성공원에서 출발하는 첫 번째 경로 행진 대오도 서성네거리 일대에서 합류한다.

1919년 당시 만세운동 행진에 참여한 사람은 1천여 명이라고 한다. 판결문은 7~8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157명이 체포되고, 67명이 보안법, 출판법 위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1910년대 큰장(서문 외 시장) 모습(사진=『대구경북 독립운동사적지 1』)

8일 이후 이어진 만세 운동
상인들도 철시 운동 가세
혜성단, 친일파에 암살 경고 보내

만세 운동은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8일 경찰에 해산당한 뒤 그날 저녁 오후 8시께 학생들은 대구경찰서를 찾아 항의했다. 9일에도 계성학교 학생들은 만세 운동을 계획했지만, 경찰에 적발돼 무산됐다.

10일 두 번째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장소는  ‘남문외(南門外) 시장’ 또는 ‘덕산정(德山町) 시장’으로 기록돼있는데, 대구읍성 남문 밖 시장으로 현 염매시장 위치다. 이날 만세 운동은 경찰 경비가 삼엄해 행진은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날 65명이 체포됐고, 계성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4명과 상인 등 모두 9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30일 세 번째 일어난 만세 운동은 학생과 시민 3천여 명이 참여한 가장 큰 규모였다. 당시 판결문은 2천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화사 청년 학승들이 주도한 세 번째 만세 운동 역시 남문외(南門外) 시장(또는 덕산정(德山町) 시장)에서 일어났다. 학승들은 29일, 동화사 포교당인 지금의 보현사에 모여 태극기를 만들었다. 대구 중구가 세 번째 행진 코스 출발지를 보현사로 정한 이유다.

▲오는 3월 1일, 대구 중구의 만세 운동 재현 거리 행진 경로(사진=중구)

4월 15일 수성면 대명동(현 남구)에서, 4월 26일과 28일 공산면 미대동(현 동구)에서도 작은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만세 운동 외에도 시민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시장 상인들은 철시 운동으로 일본에 항의했다.

계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비밀결사  ‘혜성단(慧聖團)’은 시민들에게 만세 운동을 계속해야 한다거나, 상인들에게 일본인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경고문’을 뿌렸다. 따르지 않으면 좋지 못한 결과가 있을 거라는 내용도 덧붙였다.

혜성단은 당시 대구 경찰서장에게 “‘너는 왜 3월 8일 대한 독립만세를 부른 무고한 동포를 검거하였는가? 너희들과 같은 자는 암살당할 때가 있을 것이니 각오하라!”는 경고문을 보내기도 했다. 그해 5월 7일에는 군수, 면장 등 한국인 관리들에게 ‘관공리(官公吏) 동포’라는 제목으로 경고문을 보낸다.

“우리 동포는 각지에서 봉기하고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너희들 조선인 관공리는 원래 뿌리가 같은 나무, 근원이 같은 물이 아닌가. 그런데 너희들 조선인 관공리는 왜적의 수족이 되어 그 굴레에서 구속받으며 입에 풀칠을 하고 있다.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 같다. 너희들의 검으로 동족의 피를 흘리게 함을 종신의 업으로 하니 무지 몰식도 역시 심하다. 속히 미몽으로부터 각성하여 사직하므로 조국의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 -대구지방법원 김수길 외 10인 판결문(1919.07.19) 중-

▲대구복심법원, 김수길 외 3명 판결문 일부 (사진=국가기록원)

혜성단 주동자로 지목된 김수길은 당시 19세로 계성학교 학생이었다. 김수길은 3월 8일 만세 운동 이후 고향인 김천으로 가 만세 운동을 조직했으나 일본 경찰에 들켜 실패했다. 혜성단 단원들은 대구지방법원에서 2년 6개월~1년 6개월 징역형을 받았으나, 대구복심법원(2심)에서 김수길은 징역 4년 등으로 형량이 높아졌다. 이는 3월 8일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만집(징역 3년), 김태련(징역 2년 6개월)보다 높다.

대구 중구 외에 나머지 7개 구·군 만세 운동 재현과 거리 행진은 역사적 사실과 상관없이 각 거점에서 진행된다. 대구시는 오는 1일 오전 10시 30분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서 기념식을 연다. 태극기 7종 입장식, 독립선언서 낭독 등 행사를 한다. 각 구·군과 실시간 중계로 상황을 공유하고, 11시께 대구 전역에서 동시에 만세 삼창을 할 계획이다.  

※참고 문헌※
대구지방법원, 이성근 외 8인 판결문(1919.04.12), 이만집 외 75인 판결문(1919.04.18), 김수길 외 10인 판결문(1919.07.19)
대구복심법원, 김수길 외 3인 판결문(1919.10.19)
경상북도, 『경북독립운동사 3』, 2013.
광복회 대구광역시지부, 『대구독립운동사』, 2018.
대구광역시, 『대구시사』, 199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3권 삼일운동(하)』, 198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6권 학생독립운동사』, 1983.
독림기념관, 『대구경북 독립운동사적지 1』, 2010.
권영배, 「대구지역 3·1운동의 전개와 주도층」, 『조선사연구 6』, 조선사연구회, 1997.
이윤갑, 「대구지역의 한말 일제초기 사회변동과 3ㆍ1운동」, 『계명사학 1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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