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먹칠] 불공정사회의 대안은 능력주의가 아니다 / 노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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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만하면 터지는 채용비리다. 작년 서울교통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과정에서 불거진 친인척 특혜 채용 논란에 이어 이번엔 KT 부정채용 청탁이 화두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 딸이 특혜 채용되었다는 의혹에서 시작돼 채용 청탁으로 합격한 부정입사자 9명이 추가로 확인됐다. 부정채용 의혹 당사자들은 모두 재벌 혹은 기업 고위 간부의 지인이거나 사회 유력인사의 자녀라는 공통점이 있다.

부모의 부와 지위에 따라 자녀의 삶이 결정되는 현실에 취업준비생들은 유난히 분노하고 있다. 취업문은 갈수록 좁아지는데, ‘능력은 없지만 부모 빽을 업은 자’들이 기회의 평등을 박탈한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분노의 기저에는 잘난 부모를 둔 자에 대한 암묵적인 부러움이 깔려있다. 그러나 부러움은 일시적이다. 타고나는 것은 내가 당장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개인의 좌절은 노력해서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이 평가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로 대체된다. ‘한국사회 공정성 인식조사 보고서’에서 개인의 능력에 따라 보수의 차이가 클수록 좋다는 입장이 66%를 차지한 것이 이를 방증한다. 부모의 빽은 가지지 못했더라도 그들에겐 없는 ‘능력’을 갖추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 우리가 개인의 ‘능력’에 집착하게 된 이유다.

한국 사회의 취준생들은 노동시장에서 자신을 효율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학업성적, 어학점수, 자격증 개수 등 수치화된 능력에 목을 맨다. 그들이 하는 말은 한결같다. 개인의 능력만을 공정성의 기준으로 추구하자는 것, 이른바 능력주의다. 그렇다면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은 노력이 전제되었으니 공정한 불평등일까. 여기서 말하는 능력이 어떤 능력인가에 따라 답은 달라진다. 예를 들어,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예서의 부모는 예서의 전교 1등을 지켜내기 위해 모든 자원을 총동원한다. 부모의 부와 지위가 개입된 전교 1등을 온전히 예서의 능력으로 볼 수 있을까. 물론 능력에 따른 공정성이 부정채용과 같은 노골적(1차적, 원초적) 불공정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으로는 유의미하다. 그러나 이는 ‘노력의 과정’을 배제하며 또 다른 차별을 만들어낸다.

능력주의는 공정함으로 포장된 사회적 폭력이다. 오랜 시간 곪아 온 사회 구조적 문제를 덮고 실패 이유를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 일축해버리기 때문이다. 문제의 본질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불법적인 부의 대물림으로 자녀의 교육수준과 경제적 성취를 공고화하는 가족주의, 이에 편승해 부당하게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 그리고 이를 제재할 수 있는 사회 인프라 부재가 맞물린 결과물이다. 그러니 공정함의 기준은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고자 하는 고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불공정함을 ‘더 노력하지 않은’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능력주의는 ‘완벽한 공정성’과 등치 될 수 없다.

능력주의가 힘을 잃을 수 있는 새로운 공정성을 찾아 나서야 할 때다. 각자가 생각하는 공정성을 발언하고 비교하며, 이를 다양하게 논의하는 것이 그 시작이다. 노력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는, 혹은 자의적이고 우연적인 노력의 성향을 포용할 수 있는 공정성을 확립해야 능력주의 이면에 가려진 문제를 제대로 직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 사회적 합의 기구를 마련하고 논의의 내용을 세부적인 법과 제도로 채워가야 한다. 그 속도가 더딜지라도, 능력주의를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고 있는 시민사회의 성찰과 정부의 장기적인 노력이 함께 갈 때, 우리가 그토록 요구하는 ‘공정사회’에 다가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