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여성과 죽음 : 이희호와 박막례 /이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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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전 이사장의 별세 소식을 들은 엄마는 ‘시대의 어른’을 상실한 우울감을 표현했다. 빈소에 가고 싶은데 못가니 너라도 다녀오라며 전화가 왔다. 이희호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시 말해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행위는 오늘날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손녀딸을 돌보느라 꼼짝 못하는 엄마. 애기 할머니, 동네 할머니, 그냥 아줌마로 불리는 엄마에게 ‘이희호 별세’ 소식은 왜 특별했을까.

▲故 이희호 [사진=김대중평화센터]

야망을 가진 여성이 험난한 굴곡을 모두 헤쳐나가며 ‘시대의 어른’으로 남아 존경받다가 세상을 떠나는 모습은 매우 귀하게 마주한다. 개인적으로 썩 좋아하지 않고 사용하지도 않는 표현인 ‘시대의 어른’을 이번에는 의미 있게 생각해 본다. 여성의 성장을 방해하는 사회에서 ‘어른’은 남성형이다. ‘시대의 어른’에 대한 이미지는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야망’도 남성형이다. 여성이 가진 야망은 단속의 대상이다.

많은 여성들이 살아서 제 생각을 말하고 제 뜻을 펼치면서 부패하지 않은 모습으로 존경받고 박수받는 여성의 모습을 갈망한다. 한편 학대당해 죽거나 가부장제에 질식해 스스로 삶을 마친 여성들 소식은 쉽게 접한다. 모르는 사람에게, 아는 사람에게, 가족에게 폭력을 겪어 이 세상을 비참하게 떠난다. 생물학적으로 사라지지 않더라도 사회적으로 사라진다. 사회가 여성에게 꾸준히 메시지를 보낸다. 작아져라, 낮아져라, 가늘어져라, 끝내는 사라져라! 혹은 희대의 살인마가 되거나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좋지 않은 선례만 남겨 여성들을 되려 위축시키는 인물로 불려나온다.

유명세는 여성에게 안전하지 않다. 여성의 미덕은 ‘언급되지 않는’ 것이다. 사라지라는 뜻이다. 가장 훌륭한 여자는 죽은 여자다. 여성의 피해 경험이 사회를 전복시키는 발화로 작용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영원한 ‘피해자의 자리’에 처박아두고 관음하기 위해 가부장제는 ‘피해자로서의 여성’을 부추긴다.

창작, 곧 공적인 영역에 자신의 생산물을 발표하는 작가가 여성일 때 창작물보다 작가 자체를 작품으로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 비극적으로 죽었다면 더욱 매력적인 소비대상이다. 대표적인 예로 실비아 플라스가 그렇다. 그의 시보다는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가 더 회자된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끝없이 죽음을 탐한다. “스미스 대학 시절의 시들은 전부 참담한 죽음의 소망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일기에 써있듯이 그의 작품에서 죽음은 중요한 소재다. 실비아 플라스는 그의 죽음이 그가 남긴 최고의 ‘예술’로 남았다. 죽음에 대한 그의 사유가 아니라 그 자신의 죽음이 하나의 작품이 되어버린 현상. 여성 죽음의 미학화다.

에드가 앨런 포는 ‘작법의 철학’에서 예술에서 죽음이 여성과 어떻게 연결되어 미학화되는지 잘 밝혔다. 모든 주제 중 가장 우울한 주제인 ‘죽음’은 어떻게 가장 시적이 될 수 있을까. “그건 죽음이라는 주제가 ‘미의 여신’과 가장 밀접하게 동맹을 맺을 때지. 그러면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세상에서 가장 시적인 주제는 아름다운 여인의 죽음이야.”

이처럼 여성의 죽음은 ‘아름다운 예술’이다. “죽어가는 것은 예술이죠, 다른 모든 것처럼. 나는 그것을 뛰어나게 잘하죠.” 플라스는 그의 시 ‘나자로 부인’에서 자신이 ‘그것’, 곧 자살을 잘한다고 말한다. 강간문화를 집대성한 수전 브라운 밀러는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에서 마조히즘에 대한 여성의 환상을 부추기는 여러 문화적 요소를 언급하며 실비아 플라스의 예를 든다. “플라스는 평생 피해자에게 동일시했다. 그녀는 거기서 고개를 흔들어 깨어날 수 없었다.” 실제로 서른 살에 플라스는 자살했다.

2013년 패션 문화 잡지 ‘바이스’(Vice)는 여성 작가들의 죽음을 재연한 화보를 만들어 논란이 된 적 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버지니아 울프, 아이리스 장, 샬롯 퍼킨스, 실비아 플라스, 산마오, 엘리스 코웬의 자살 현장을 재연했다. 남성 작가들 중에도 자살한 경우가 있지만 여성의 죽음을 아름답게 소비하는 문화가 있기에 이런 패션 화보가 생산된다.

플라스가 죽음을 다루지만, 이는 한편 강력한 생명력에 대한 갈망이다. 그렇기에 “피의 홍수는 사랑의 홍수”(뮌헨의 마네킹)가 된다. 피 냄새가 나는 시. 응어리진 핏덩이가 보이는 시. 몸에서 꿀렁꿀렁 피가 쏟아지는 느낌을 경험하는 시. 비릿한 피맛이 나는 시. 300편에 가까운 플라스의 시 중에서 내게 더 가까이 다가온 시들은 공통적으로 피를 흘린다. 그에게 “솟구치는 피는 시다.” (친절)

“나는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다”고 자전적 소설 <벨자>에서 중얼거리듯, 실비아 플라스는 너무도 간절히 살고 싶어서 매번 자신을 죽인 사람이다. 자살은 그에게 살아있음에 대한 극단적 확인 절차였다. 첫 번째 자살이 실패한 후 다시 살아났고, 두 번째 자살도 실패하여 다시 살아났다. “내가 소생한 이 땅덩어리는 아담의 편이구나, 그러면 나는 고통에 신음한다.”(도착) 살기를 갈망하며 야망에 찬 이 시인은 고통을 통과한 뒤 부활을 꿈꿨다. 세 번째 자살은 성공하여 ‘드디어’ 죽었다.

여성을 ‘피해자’로 끝없이 소환하는 방식은 살아있는 여성들에게 저항의식을 고취시기키보다 좌절과 공포를 준다. 연대를 위한 공감이 아니라 공포와 불안을 자아내는 피해자와의 동일시가 여성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단순하지 않다. 특히 피해자에 공감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예민해진다. 실제로 플라스의 일기에 이러한 의식이 잘 드러난다.

“버지니아 울프는 왜 자살했을까. 사라 티즈데일을 비롯해 그 수많은 영민한 여성들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신경증때문에? 그들의 글은 과연 깊은 본능적 욕구의 승화(아, 이 끔찍스런 단어)였던 것일까? 그 해답을 알 수만 있다면. … (중략) … 자살이나 해버려야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 이 일기를 쓴 다음 해 플라스의 두번째 자살 시도가 있었다. 부활을 꿈꾸던 플라스는 자신의 글로 부활했다. 그가 죽기 6일 전 쓴 마지막 시 ‘가장자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여인은 완성되었다.
그녀의 죽은
육체는 성취의 미소를 띤다”

이제 여성의 죽음이 예술이 되지 말고, 살아있는 여성들이 여성이 살해당한 장소에 포스트잇을 붙이는 행위가 아니라, 살아서 목소리 낸 여성의 죽음 앞에 국화꽃을 꽂으며 명복을 비는 경험이 더 늘어나길 갈망한다.

이희호 선생이 성폭력 폭로 운동인 ‘미투’를 지지하며 남긴 말은 “여성들, 더 당당하게 나가길”이었다. 우리는 더 많은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싶다. 글을 배운 할머니의 글씨 연습과 일기장이 책이 되어 나오거나, 소박한 그림들이 그림책이 되어 출간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어디 글과 그림뿐일까.

▲박막례 [사진=유튜브 박막례 할머니 채널 영상 갈무리]

유튜브 크리에이터 박막례가 인기를 끄는 건 다 이유가 있다.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책 제목이 이미 많은 걸 말한다. 희생하는 할머니가 아니라 유머의 생산자인 할머니. 이대로 죽을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