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가 기록하지 않는 역사, 국가가 죽인 국민들

[99.9% 좌편향 한국사 교과서] 제가 한 번 읽어봤습니다②

14:19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사는 국가의 폭력과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찾아 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제주4.3사건 희생자 유가족들은 2003년이 되어서야 국가로부터 사과를 받을 수 있었죠. 2011년 교육과학기술부는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에 “정부 수립 전후 단독 정부 수립을 둘러싼 갈등으로 나타난 제주 4.3사건 등을 기술하도록 유의한다”고 명시해 8종 교과서 모두 빠짐없이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국가에 의해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 더 있습니다.

‘반공’을 국시로 삼은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는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반대, 미군정 철수 등을 요구했던 시민들은 모두 ‘빨갱이’ 취급을 받았습니다. 보도연맹이라는 단체에 이들을 가입시키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집단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었죠(보도연맹 사건, 1950). 공식적으로 확인된 피해자만 4,934명이고, 10만 명에서 최대 12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보도연맹 사건을 담고 있는 교과서는 <천재교육>, <교학사>뿐입니다. <천재교육>은 ‘정부 수립을 전후한 갈등’이라는 소제목에서 “(정부는) 1948년 좌익 세력 활동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려는 의도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이듬해 국민 보도연맹을 조직했다”고 설명합니다.

‘좌익 활동을 하던 사람들을 전향시켜 보호하고 자유민주주의로 인도한다는 명분을 조직된 반공단체이다. 6.25전쟁 때 보도연맹원 상당수가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천재교육)

천재교육
▲천재교육

<교학사>는 ‘6.25전쟁의 피해’라는 소제목에서 “남한에서도 민간인들에 대하여 살상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사례가 보도연맹사건이다”고 설명합니다.

‘보도연맹은 좌익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도하기 위하여 조직한 단체이다. 그러나 북한군이 남침하자 이들이 북한에 협조할지 모른다는 의구심 때문에 이들을 처형하였다. 대전 형무소에 감금되었던 보도 연맹원 3,500여 명이 처형당하기도 하였다'(교학사)

제주4.3사건을 벌였던 시민들 역시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쌀을 준다는 말에 이름을 적어냈다가 희생당하기도 했습니다. 보도연맹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는 바로 대구10월항쟁 희생자들입니다.

제주4.3사건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46년 9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주도 하에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벌였습니다. 이들은 미군정의 쌀 배급 정책과 친일 경찰 등용을 비판했습니다. 그해 10월 1일 대구에서는 노동자, 농민, 학생 등 시민들이 “쌀을 달라”며 거리로 나왔습니다. 이 항쟁은 전국으로 퍼져 12월까지 이어졌습니다.

8종 교과서 중 대구10월항쟁을 다루는 교과서는 <교학사>뿐입니다. <교학사>는 ‘단독 정부 수립 활동과 좌익의 방해’라는 소제목에서 “대구10.1사건 같은 무장 봉기를 일으키는 등 미군정과 정면 대치 상황으로 갔다”고 설명합니다. 앞서 제주4.3사건도 같은 항목에서 설명했었죠.

‘조선공산당 지시에 따라 파업을 벌이던 중 대구에서 폭력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시위자 한 명이 경찰의 유탄에 의해 사망하자 시위는 폭동으로 변하였다. 시위 군중들은 대구 경찰서를 점거하여 무기를 약탈한 후 수십 명의 경찰과 그 가족들을 살해하였다. 폭동은 전국으로 번져 수백 명의 사망자와 수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교학사)

교학사
▲교학사

해방 후 미군정의 쌀 배급 정책은 실패했고, 당시 대구에는 콜레라 유행으로 다른 지역과 교통도 끊어졌습니다. 쌀을 달라고 외치던 시민들을 향해 쏜 경찰의 총에 2명의 사상자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미군정의 실패한 쌀 정책에 굶주리던 민중들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는 교과서는 없고, 그마저도 ‘폭동’으로 기록하는 교과서뿐 입니다.

1994년 이른바 ‘국사 교과서 준거안 파동’이 있었습니다. 국사교과서개편연구팀은 ‘국사교육 내용전개의 준거안 연구보고서’(대표 연구자 이존희 서울시립대 교수)를 발표해, ‘제주4.3사건’을 ‘제주4.3항쟁’, ‘대구폭동사건’을 ‘대구10월항쟁’, ‘5.16군사정변’을 ‘5.16군부쿠데타’, ‘12.12사건’을 ‘12.12군부쿠데타’로 바꾸자는 제안을 합니다.

그러나 이 제안은 ‘5.16 군사혁명’이 5.16군사정변’으로, ‘4.19의거’가 ‘4.19혁명’으로 명칭이 바뀌는 정도에 머물렀습니다. 당시 준거안 파동으로 제주와 대구의 사건을 현행 그대로 표기할 것을 결정했고, 당시 논쟁이 심했던 대구10월항쟁은 아예 교과서에서 사라졌습니다.

또 있습니다.

6.25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던 이승만 독재 정권은 4.19혁명으로 스스로 물러납니다. 고등학교 한국사 집필 기준은 “5.16군사정변 등 정치변동과 4?19 혁명, 5?18 민주화 운동, 6월 민주 항쟁 등 민주화 운동, 헌법상의 체제 변화와 그 특징 등 중요한 흐름을 중심으로 설명한다”고 명시했습니다.

굵직한 민주화 운동을 중심으로 한 교과서는 독재 정권이 자행한 사법 살인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8종의 교과서는 박정희 정권을 설명하면서 한일 국교 정상화-6.3시위, 베트남 파병, 유신 체제 성립-YH무역사건과 부마민주항쟁을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경제 개발 자금이 필요했던 박정희 정권은 한일간의 국교를 정상화한다는 협정을 맺습니다(1965).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굴욕적인 한일 회담을 반대하는 시위가 대대적으로 일어났습니다(6.3시위). 이에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 사건을 조작해 학생, 언론인 등 41명을 잡아들입니다(1차 인혁당 사건). 북한의 지령을 받고 시위를 일으켰다는 죄였는데요. 유신 헌법 선포 이후인 1974년에는 2차 인민혁명당 사건을 조작합니다. 유신 반대를 외치던 시민 8명에 대해 혁명을 기도한다며 사형 선고를 내리고, 18시간 만에 집행한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들은 2007년 법원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2차례 벌어진 인혁당사건은 국가에 의한 명백한 사법 살인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다루는 교과서는 모두 4종입니다. <비상교육>, <미래앤>, <교학사>가 본문에서 언급하고, <두산동아>는 사료로 다루고 있습니다.

‘한일 회담 반대 집회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확산되자 정부는 휴교령과 계엄령을 선포하고, 1차 인민혁명당 사건 등을 일으켜 시위를 억누르려 하였다’(비상교육)

‘박정희는 유신 반대를 금지하는 긴급 조치를 연이어 발표했고, 중앙정보부는 인민 혁명당이라는 간첩단을 조작하여 관련자들을 잡아들였다’(미래엔)

‘인민혁명당 재건 위원회 사건에서는 피고인들을 1, 2심에서 군사 재판에 회부하고 대법원 사형 판결 후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하는 등 무리한 법 집행을 하였다’(교학사)

<비상교육>, <미래엔>, <두산동아>는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었음을 명시했지만, <교학사>는 별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또, ‘사법살인’을 지적한 교과서는 <미래엔>, <두산동아>뿐입니다.

두산동아
▲두산동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현대사 부분은 우리가 민주화를 이루어낸 자랑스러운 역사 중심으로 쓰여 있습니다. 독재 정권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된 국민들을 가린 채 말입니다. 한국사 교과서를 읽으면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부끄럽게 여겨진다고 누가 그러셨습니다.

민주주의를 억압했던 정권의 눈으로 읽으면 부끄러운 게 정상이겠죠.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책을 읽고 부끄럽고 부정적인 기운을 느꼈다는 게 저는 이해됩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해 발버둥 치고, 무자비하게 희생됐던, 지금도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로 나서는 이들의 눈으로 읽으면 한없이 모자란 교과서입니다.

역사 교과서, 누구의 눈으로 다시 써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