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과 함께] ⑤ 점점 넓어지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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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7 14:47 | 최종 업데이트 2019-07-17 15:12

한 달 전, 용산참사 철거민이 도봉산 숲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10년 전, 용산 재개발 4구역 상가세입자인 중화요리 공화춘 김 씨는 절반에 불과한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인사동 재개발 당시 무일푼으로 쫓겨난 적이 있었다. 망루에 오르며 장기 농성과 협상을 예상했지만, 경찰은 특공대를 투입해 초기 진압에 나섰다. 그는 남일당 건물 망루에서 조준된 최루액에 맞아 옥상으로 떨어져 살아남았다. 망루 안 사람들 다섯과 경찰관이 사망했다. 생존자들은 죄인이 되어 있었다. 김 씨는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 혐의로 3년 9개월 감옥에서 살다 2012년 출소해 치킨 배달을 하며 홀어머니와 살았다.

[사진=김용욱]

2018년 9월,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는 용산참사를 우선 조사하였다. 불충분한 협상과 조기 과잉진압, 안전대책 미비, 사이버 수사대를 동원한 조직적 여론 조작 책임이 경찰에 있다고 발표하였다. 경찰지휘부의 잘못과 강제부검 사과, 조직적 여론대응 행위 금지 등을 권고했다. 참사 9년 만이었다. 생존자들이 ‘도심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혀 가해자로 몰려 감옥에 다녀온 후였다. 경찰과 검찰은 사과하지 않고 있다. 김 씨에게는 이 모든 것이 뒤늦거나 부족했을 것이다.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홀연히 어머니를 두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유서는 없었다.1

일곱 번의 철거, 일곱 번의 재건축
1970년 5월 들어, 전태일이 사는 쌍문동 무허가촌 일대에 시청 철거반원들이 줄기차게 들이닥쳤다. 브로크 벽돌과 나무판으로 엮은 판잣집은 금방 헐렸지만 끈질기게 다시 지어졌다. 불시에 찾아오는 철거반원을 보고 태일은 일 나가다 말고 돌아와 스스로 집을 해체하기도 했다. 다시 지으려면 벽돌이 온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곧 도착한 철거반이 뭐하냐 물으니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당신들을 이해한다며 자기도 집을 지어야 살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철거반장은 머쓱했는지 이 집은 벽돌이 깨지지 않도록 망치질을 하지 말라고 했다. 이런 미담은 거친 싸움 속에 간혹 섞여 있을 따름이다.

강제 철거가 실시되는 날이면 철거반원과 주민들 사이에 욕설이 난무하고 요란한 실랑이가 벌어졌다. 철거반의 완력과 욕설은 거셌을 것이다. 수차례 철거, 화재를 겪으며 도봉산 기슭까지 밀려난 쌍문동 사람들의 비명과 오기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철거반이 도착하기 전까지 재빨리 집을 해체한 태일은 철거반이 지나가면 다시 블록을 쌓았다. 기습 철거를 피할 수 없었던 한번은, 철거반원들이 태일에게 법을 지키라고 충고했나 보다.

심사가 뒤틀린 그는 이렇게 응수한다. “법이 어떻게 되어 있든, 살기 위해서 집을 짓는 것이니 죄 될 것 없다.” 약자들에게만 법을 지키라는 현실을 비꼬는 볼멘소리다. ‘근로기준법이 있어도 평화시장 여공들을 착취하며 법을 어기는 게 누구인가. 또, 밀리고 밀려 공동묘지까지 온 사람들이 집꼴을 갖추고 산다고 집요하게 철거를 해대는 것은 또 뭐란 말인가. 천막은 되고 벽돌과 판자는 안 된단 말인가. 이게 법이라면 도대체 법은 사람을 살리는 것인가, 죽이는 것인가.’ 그 마음을 짐작해 본다.

1970년 서울 변두리 철거는 극성이었다. 1965년 300만을 돌파한 서울 인구는 1970년 두 배인 600만에 육박한다. 1966년 2월 동아일보 기사는 ‘서울은 초만원’이라며 허허벌판이던 산기슭마다 ‘성냥갑’ 집들이 숨 막힐 듯 들어서 집 문제가 심각하다고 썼다. 변두리 무허가 판잣집들은 불편한 산꼭대기까지 불 번지듯 올라갔고 달에 가까워져 ‘달동네’라 불렸다.

저곡가 정책으로 농사가 힘들어지자 젊은이들 대다수는 대도시 공장에서 일하거나 막노동, 노점, 행상 등 밑바닥 일로 생계를 꾸린다. 풍부한 노동력은 수출 경쟁력 확보 명분으로 저임금에 묶였고, 저임금 노동을 유지하는 명분으로 저곡가 정책은 유지되어 이농은 가속화된다. 이렇게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면서도 박정희 정권은 판자촌이 늘어나자 ‘무허가’로 몰아 철거한다. 사람들은 밀려나고 또 밀려난다.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최고권력자의 판단이 기준이었다. 권리는 없고 어디서든 알아서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명령이 삶을 좌우했다.

박정희의 측근 서울시장 김현옥은 군 출신으로 불도저라는 별명답게 두 가지 대책을 밀어붙였다. 시민아파트를 보급하고 서울 외곽으로 판자촌을 옮기는 것이었다. 시민아파트는 교통이 불편하면서도 권력자의 눈에 잘 보이는 가파른 산기슭 등지에 1969년 하반기 6개월 만에 400여동이 지어졌다.

1970년 4월 땅이 풀릴 무렵 기둥에 시멘트와 철근을 덜 넣은 와우 아파트가 무너졌다. 갓 입주한 사람들과 아파트 아래 판자촌 주민을 합해 33명이 사망했다. 이후 7년 동안 400여 동 가운데 100여 동이 철거되었다. 총체적 부패가 날림 공사로 이어진 것이다. 물, 화장실, 가게, 일자리 등의 기반 없이 땅과 천막만 나눠준 경기도 광주 대단지 강제 이주는 빈민들의 격렬한 투쟁으로 귀결되었다. 10만 명을 모아두면 어떻게든 살 줄 알았다는 담당 공무원의 웃지못할 답변은 사람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주거권, 인권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었던 독재 정권은 지저분한 바닥을 쓸어내듯 하층민을 변방으로 밀어냈다.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 전에는 달랐다. 판잣집 철거가 중단되고, 취로사업이 확장되고, 밀린 노임이 청산되었다2. 평화시장 여공 신순애의 아버지는 “매일 대통령 선거만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선거의 알량한 선심이 닿지 않던 1970년 봄, 서울 곳곳에서 강제 철거가 하루걸러 자행되는 상황에서 태일은 일곱 번 무너진 집을 다시 쌓아 올리고 있던 것이다. 몇 달째 깎지 않은 머리는 덥수룩하게 장발이 되어 있었다. 직장에서 쫓겨나고 집은 부서지는 일상. 서민의 고통은 외면하고 삶의 터전은 불법이라며 파괴하는 법 앞에서, 태일의 마음은 어땠을까. 주저앉고 싶었을까. 태일의 행동이 이상했다.

방을 넓히는 이유
태일은 무너진 집을 새로 지을 때마다 오히려 안방을 넓혔다. 천장이 머리에 닿았지만 방은 커져갔다. 어머니가 이유를 묻자, 앞으로 친구들이 많이 올 거라 모여 앉으려면 넓어야 한다고 답했다. 이전에 평화시장 친구들을 7~8명씩 데려와 둘러앉아 이야기 나누기가 좁았던 모양이다. 잦은 철거 덕분인지, 결국 안방은 스무 명이 회의를 하다가 쪼그려 잠을 잘 수도 있을 만큼 넓어졌다. 어머니가 보기에 1년 가까이 시무룩하던 태일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주소는 쌍문동 208번지였지만 창동 종점에서 버스를 내려 걸어오는 탓에 모두들 ‘창동집’이라 불렀다. 이 집은 바보회 창립총회 밤샘 토론에서 시작해 태일이 죽고 나서는 친구들이 만든 청계피복노동조합의 본부가 되었다. 1971년 1월 태일의 친구 최종인, 임현재, 이승철이 이사를 들어와 살았다. 매일 열 명, 때로 스무 명씩 노동자들이 함께 밤새 토론하고 밥과 술을 나눴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작은 방을 썼다. 사람이 많을 때면 그나마도 내주고 이웃집에 건너가 잤다. 이후 조합원들에게 ‘창동집’은 추억이 쌓인 소중한 장소가 되었다.3

태일이네가 쌍문동까지 밀려온 사정은 이렇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던 1964년으로 가야 한다. 서울에 먼저 가 있던 어머니를 만난 그해 겨울 어머니와 태일, 태삼 형제는 함께 살게 된다. 남산동 판잣집이었다. 짓다 만 건물 골조에 빈민들이 모여 나무와 거적을 대고 살았다. 이후 동생 순옥이와, 다시 한 번 술 끊고 성실히 살겠다는 아버지를 만나 함께 산다. 천호동 보육원에서 막내 순덕이도 데려왔다.

1966년 1월, 태일이네 남산동 50번지에 불이 났다. ‘남산동 판자촌 큰불’, ‘영하 12도의 연옥4’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1면에 보도됐다. 이 화재로 30명이 불타 죽는다. 철거를 위한 방화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난민들은 남산국민학교에 수용되었다가 상도동, 상계동, 봉천동, 신림동, 쌍문동으로 흩어진다. 태일이네는 미아리를 거쳐, 도봉산 쌍문동 208번지로 흘러들어간다.

몇 세대당 하나씩 천막이 지급된다. 공동묘지 무덤 사이에 천막을 치고 살다가 하나 둘 움막을 짓기 시작한다. 땅을 깊이 파 브로크로 벽을 쌓고 슬레이트나 루핑5으로 지붕을 덮은 다음 타이어나 돌로 눌렀다. 태일은 이 집에서 평화시장엘 다녔다. 버스비를 털어 여공들과 풀빵을 나눠먹고 세 시간씩 걸어오던 집이 바로 여기다. 태일이 살아 끊임없이 다시 짓고, 넓히던 쌍문동 집은, 아니 ‘창동집’은 태일의 바람대로 그가 없어도 친구들의 광장이, 보금자리가 되었다. 지금 쌍문동 창경초등학교 뒷담에는 덩그러니 전태일 옛집 터 표지판만이 서 있다. 길 건너 오래된 아파트가 표지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대구 남산동 골목에서 주거권을 생각한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 선포 이후, 국제법적 힘을 확보하려고 사회권 규약 11조는 ‘살 만한 집에 살 권리’를 명시한다. 1991년, 가장 권위 있는 국제법적 해석으로 인정받는 ‘유엔 사회권위원회’의 일반 논평은 안전하고 평화롭고 존엄하게 살 주거의 권리를 선언한다. 이어서 땅, 부동산 투기를 주거 안정성을 위협하는 대표 문제로 꼽았다. 이런 인류 보편의 노력 속에 강제 퇴거 금지 원칙도 자리잡았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서 집은 개인이 해결해야 할 몫으로, 서둘러 차지해야 할 재산으로 인식되었다.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라는 주장은 한가한 말이 되었다. 주거권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개발에 앞서 인권 영향 평가와 포괄적 재정착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말해 왔다. 어떤 사람도 개발 이전보다 삶의 조건이 후퇴해서는 안 된다6고 외쳐왔지만 멀리 가닿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투기를 투자와 재태크라고 바꿔 말하면서 부담감까지 덜게 되었다.

1996년 ‘세계주거권회의’에서 한국과 남아공은 가장 비인간적인 철거를 하는 국가로 선정되었다. 1970년 서울에서 본격 시작된 강제 철거는 1988년 상계동7을 지나 한국 재개발의 오랜 전통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개발할 땅에 허름한 집을 짓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보이면 안 되는’ 존재들이 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 2000년대 초반 화려한 브랜드 아파트들이 경쟁적으로 하늘을 찌르며,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줍니다’라는 ‘계층 구분’의 광고 문구까지 나온다. 임대 아파트는 곳곳에서 거부되었고, 주상복합 아파트는 울타리를 두르고 통행과 출입을 통제하였다. 재개발은 도시 환경을 정비하는 ‘수리’나 원주민 보호, 삶의 재생이 아니라 건설사와 유주택자의 이윤과 자산을 폭증시키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재산권의 아우성에 주거권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며칠 전, 대구 중구 남산동 재건축 4-5지구를 찾았다. 대부분 주택과 상가에 빨갛게 ‘철거’ 칠이 되어 있고 셔터는 내려져 있었다. 상가세입자들은 ‘재개발’이 아닌 ‘재건축’이라 이주보상비를 한푼도 못 받게 되어 전철연과 함께 싸웠다. 업종별로 다르지만 수차례 싸워 간신히 보상을 받아 대부분 떠났다.

짐을 빼러 나온 네일샵 주인에게 문방구 옆 조명가게에 세 들어 과일을 팔던 할머니의 행방을 물었다. ‘어디라더라’는 안내를 받고 가는 길에 몇 번을 더 물어 결국 찾았다. 옛 복덕방 간판을 그대로 둔 채, 더 좁아진 공간에 과일을 쌓아두고 할머니는 오도카니 앉아 계시다 일어나 옛 단골을 반갑게 맞아주신다. 월세는 더 비싸고 공간과 매상은 절반으로 줄었다. 팔순을 바라보는 할머니는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행인이 드문 가게 앞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로 건너 남산동 언덕에는 회색 시멘트 아파트 골조가 올라가고 웅장한 타워크레인들이 하늘을 조각조각 분할하고 있다.

▲남산4-5지구 재건축지역

조각난 하늘처럼 소박한 삶이, 골목이, 정다운 이웃이 사라져간다. 가난한 세입자들이 어느 순간 보이지 않고, 그들의 삶은 좀더 빠듯하게 재조정되어 흩어진다. 드문드문 기억되다가 잊혀진다. 기억하는 사람들도 어디론가 떠나고 새 아파트 주민들은 경쾌하게 핸들을 틀어 주차장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수십 년째 한국 재개발의 옆모습이다.

법원은 남은 세입자들이 나가지 않을 경우 7월 20일 강제집행을 예고하고 있다. 재개발이 아닌 재건축일 경우 보상을 안 해도 되는 ‘법’은 무엇인가. ‘주거권’이 아닌 ‘재산권’으로 판결을 내리고 강제 집행을 명령하는 ‘법’원의 법‘철학’과 법‘감정’은 무엇인가. 정비사업의 명목 아래 시내 역세권 땅을 빈틈없이 노리는 건설사와 유주택자들, 인허가를 남발하는 관이 맺는 ‘욕망의 오래된 동맹’은 어디까지인가.

대구 남산동에는 아직 태일이가 1963년에 살던 집이 조각 땅에 버티고 서 있다. 높아만 가는 고층 아파트들 너머 신학교 옆 골목 자투리땅이다. 태일이는 이제 그 집이 무너져도 다시 짓지 못한다. 대신 시민들이 작은 힘을 모아 전태일 기념관을 지으려고 매입 운동에 나섰다. 가난한 이들의 삶터, 작은 땅조차 허락하지 않는 이 시대의 욕망은 뜨거운 혀를 날름대며 작은 공간을 쳐다보고 있다. 기념관이 지어지면 사람들은, 철거를 당해도 다시 집을 짓고 방을 넓혀가던 전태일의 ‘긍지와 자존감’에 전염될 것이다. 용산 뉴타운의 광풍 속에 억울하고 힘겹게 살다가 돌아가신 철거민 김 씨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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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 죽음이 묻는다 용산참사는 끝났는가〉, 시사인 616호(2019.7.9.)를 주로 참고해 정리하고,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 브리핑〉,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 피해자 입장 발표 기자회견문〉 (2018.9.5.)을 전반적으로 참조하였다.
  2. 〈전태일 평전〉, 조영래, 아름다운전태일, 263쪽
  3. 〈청계, 내 청춘〉, 안재성, 80쪽에서 주로 인용, 정리하였다. 이번 글은 안재성의 책을 전반적으로 참고하여 썼다.
  4. 1966년 1.19일자 동아일보 기사 제목. ‘연옥’은 ‘연기지옥’의 준말.
  5. 아스팔트나 콜타르로 방수처리한 종이를 지붕에 얹고 살았다.
  6. 〈집은 인권이다〉, 주거운동네트워크, 이후, 2010,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활용하였다.
  7. 올림픽 개최시 외국인들에게 부끄럽다는 이유로 상계동 달동네를 강제 철거해, 주민들은 명동성당에서 지내다가 부천에 땅을 얻어 모여 살았다. 그 옆으로 올림픽 성화가 지나간다 하여 다시 철거를 당했고, 성화가 지나가는 시간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 숨어있어야 했다. 다큐 〈상계동 올림픽〉의 줄거리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그 날을 위해”라는 대사로 다큐는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