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박근혜, 아베, 트럼프라는 특수성에 맞선 대안 /김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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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9 14:51 | 최종 업데이트 2019-08-19 14:51

지난 광복절,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마에카와 기헤이 전 일본문부과학성 사무차관이 출연했다. 이 사람은 2017년 5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연루된 학원 스캔들에 대한 핵심 증언을 하고 권력에 탄압을 당한 인사이다. 아베 신조 내각이 자신들에게도 별 이득이 되는 것 같지 않는 경제 보복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이 사람의 해설을 들어보자.

“일본 관료는 외교 재정 등 모든 행정 분야를 관장해 무거운 책임감을 갖는다는 자각이 있었다. 하지만 2차 아베 정권 하에서는 책임감이나 사명감 등이 없어져 위험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베 신조 총리가 중앙행정의 관료 인사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면 각각 독립된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독립성, 전문성을 살려서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총리 관저의 방침에 맞게만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뿐 아니라 북한, 중국, 러시아, 미국 등에 대한 외교 방침도 그들이 정한다. 한국에 대한 이번 수출 규제 강화도 관저가 추진한 것이다.”

‘전문가’인 관료가 통치를 주도하면 하지 않았을 일을 정치적 편향을 가진 정권이 등장해 강행하는 바람에 문제가 됐다는 뜻이다. 이 주장은 현대 정치가 직면한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이 적대적으로 공생하는 전형적 구도를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징후적이다.

의외의 사실처럼 보이지만, 일본 정치에서 총리 관저 권한의 강화는 ‘개혁’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과거 일본 사람들은 자기 나라 정치의 문제가 정치인과 엘리트 관료들이 ‘끼리끼리 나눠먹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다. 건설족, 우정족, 상공족 등의 ‘족의원’과 관료, 대기업이 유착한 ‘삼각동맹’의 문제가 대표적이다. 따라서 강력한 리더가 등장해 이런 기득권 동맹을 해체해야 하고 그러려면 총리 관저의 권한이 강화돼야 한다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힘을 얻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같은 ‘강한 총리’는 이런 인식의 대표적 수혜자이다. 소선거구제로의 선거법 개정이라는 ‘원포인트’ 정치개혁을 내걸고 자민당 정권을 뒤집은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내세운 명분도 기득권 동맹의 기반이 되는 파벌정치를 무력화시키겠다는 거였다.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추진한 우정민영화 역시 같은 명분을 내걸고 국민의 호응을 얻었다.

심지어 아소 다로 내각의 붕괴로 등장한 민주당 정권이 내세운 슬로건도 그랬다. 집권 당시 민주당이 내놓은 정권구상 실현을 위한 5개 원칙의 첫 번째는 “관료주도 정치에서 정치가 주도 정치로”, 두 번째는 “정부여당의 정책이원화에서 내각 하의 정책일원화로”, 세 번째는 “부처할거의 성익(省益) 중심에서 관저 주도의 국익 우선으로”였다. 적어도 이 슬로건들로만 보자면 아베 신조 총리의 관저 중심 정치라는 비전과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마에카와 기헤이의 주장대로면 이제 일본 정치가 꾸준히 따라온 관저 중심 포퓰리즘의 흐름을 관료 주도 엘리트주의로 되돌려야 할 때일 것이다. 그러나 본질은 그것이 관저 중심이든 관료 주도이든 총체적으로는 포퓰리즘과 엘리트주의가 마치 동전처럼 기득권 정치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가 주도 정치’의 결과가 아베 신조와 같은 세습정치인의 권한을 오히려 확대해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관료 주도 정치의 부활을 말하는 마에카와 기헤이가 나케소네 야스히로 집안과 사돈관계로 맺어져 있다는 사실은 이런 아이러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본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세계의 호사가들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탄생을 어떤 악마적인 존재의 등장으로 평가하지만 그가 없는 것을 만들어 낸 건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와 그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것들은 미국 기득권 정치 내에 이미 존재해왔다. 중국과의 무역전쟁이나 장벽 건설 등으로 대표되는 적대적 이민정책, 인종주의를 필두로 한 ‘백래쉬’와 같은 것들이 그렇다. 기득권 정치 내부 요인에 의해 억눌러져 온 압력이 도널드 트럼프라는, 기득권 정치에 적대적인 상징으로 분출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재선을 가로막는 최대 장애물이 오바마 정권에서 일했던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앞서와 마찬가지의 ‘동전의 양면’을 떠올리게 한다. 도널드 트럼프는 (황당하게도) 기득권 관료들이 중심이 된 ‘딥 스테이트’의 음모에 맞서는 민의의 대변자를 자처한다. 그러나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상징하는 것은 전통적인 기득권 정치로의 회귀이다. 도널드 트럼프와 버니 샌더스라는 ‘이단아’들에 질린 민주당 지지자들이 합리적인 면모의 엘리트 정치로 회귀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드러낸 결과인 셈이다.

과거 트럼프의 참모로 활약했던 스티브 배넌과 같은 사람들은 바이든 필패론을 말하고 있다. 당장 여론조사 결과가 조 바이든 부통령에게 유리하게 나올지 모르지만 오바마 정권의 일원이면서 백인 남성 중심의 기득권을 상징이라는 점에서 확장력에 한계가 있는 카드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차라리 힐러리 클린턴의 재출마나 공화당 일부 표까지 흡수할 수 있는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의 불출마 번복, 아니면 미셸 오바마 차출 등이 민주당 입장에선 나은 선택일 거라는 게 스티브 배넌의 생각이다.

물론 위에 열거된 사람들 역시 선거공학으로 따졌을 경우의 강점을 갖고 있을 뿐 엘리트 정치의 일원이라는 점을 부정하긴 어렵다. 다들 백만장자이거나 법조인 출신이거나 전직 대통령과 가족관계이거나 하는 점이 부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도널드 트럼프의 ‘딥 스테이트’가 없다.

문재인 정권은 이러한 ‘동전의 양면’ 정치의 한국판을 보여준다. 문재인 대통령은 현 정권을 “피플파워를 통해 출범한 정부”라고 규정한 바 있다. 촛불시위를 통해 전직 대통령을 탄핵하고 들어선 정권이라는 게 근거이다. 그렇다면 이 정권의 임무는 기득권을 일소하고 ‘진정으로’ 민의를 대변하는 정치를 펼치는 것이 돼야 할 것이다. 이 정권이 말하는 ‘적폐청산’이란 이런 의미다.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같은 사람이 자신의 행보를 ‘앙가주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이러한 자기인식에 있다.

문제는 그렇다면 선언이 아니라 실천이란 차원에서도 그런 정치가 이뤄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정부 여당이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응한다며 환경규제를 완화하고 주52시간제의 예외 적용폭을 늘리는 등 대기업 편의를 더 봐주는 방향으로 정책 적용을 추진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위기의 상황에 국가의 필요를 근거로 자원을 배분하며 약자에게 위협적 상황을 만드는 정치로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고 평할 수 있다.

보수세력은 두 가지 차원에서 관료 주도의 엘리트정치로 회귀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첫 번째는 아마추어적 운동권 정치가 ‘전문가’를 배제해 부작용만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피플파워’ 정권이 실제 한 일을 보면 역대 정권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는 것이다. 양자의 논리는 서로 모순되고 충돌하는 듯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자신들과 이 정권이 앞서 일본과 미국 정치의 사례로 봤던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스스로 실토하고 있다.

이런 비유를 더 활용하면 결국 현대정치에서 ‘개혁’이란 동전을 뒤집는 것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인사청문회 시즌에 과거에 보던 장면을 똑같이 보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단지 ‘동전 뒤집기’만 반복하는 정치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

우려가 되는 것은 과거 동전 뒤집기의 운명에서 벗어나는 ‘대안’을 자처했던 정치도 동전의 앞뒷면의 일부가 되는 길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반-이명박근혜’, 일본의 ‘반-아베’, 미국의 ‘반-트럼프’, 나아가서는 영국의 ‘반-브렉시트’ 등이 모두 그러한 조건으로 기능했거나 기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시대의 보편성일까? 이명박과 박근혜, 아베 신조, 도널드 트럼프, 보리스 존슨 등의 ‘특수성’에 맞서 보편적 조건을 되살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보편성을 근본적으로 깨는 정치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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