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젖과 피로 써야 할 이야기 /이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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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2 13:14 | 최종 업데이트 2019-09-02 13:16

지난 8월 5일 <가장 푸른 눈>을 시작으로 <빌러비드>, <재즈>, <술라> 등 인상적인 작품을 우리에게 선물한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이 삶을 마쳤다. ‘흑인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가 등 그를 설명하는 화려한 수상 이력도 많다. 미국사회에서 베트남 전쟁을 화두로 소수자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역할을 했던 비엣 타인 응우옌이 많이 참고한 작가가 토니 모리슨이다. 백인의 시각을 의식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의 이야기를 펼칠 것인가. 자신이 읽고 싶은 글을 직접 썼다는 토니 모리슨이 나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고마울 정도다.

모리슨은 개인의 몸에 관한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공공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뻗어가는 글쓰기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엘런 식수가 말한 ‘젖과 같은 하얀 잉크’로 쓰여진 글을 꼽아보라면 나는 아마도 <빌러비드>를 떠올릴 것이다. 비릿하면서도 달큰한 젖냄새가 나는 글자 위로 뜨거운 피가 떨어지는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사진=영화 '빌러비드'의 한 장면]

할머니-엄마-딸로 이어지는 인물 관계에서 모성은 이들의 관계를 지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글을 모르는 할머니는 생전에 ‘심장의 소리’에 따라 숲에서 설교를 했다. 여러분을 몸을 사랑하라, 손을 사랑하라, 목을 사랑하라, 등가죽을 사랑하고, 내장을 사랑하고, 그리고 입을 사랑하라고 할머니 베이비 석스는 설교한다. 입, 특히 입은 우리에게 영양분을 주고 목소리를 주기에 ‘주인’들이 몹시 싫어했던 몸이다. 그 몸을 사랑하라고 문맹의 할머니는 말씀을 전한다. 태초의 목소리(아버지-신)와 다른 이 흑인 여성의 목소리는 역사의 목소리를 재구성하는 시도다.

할머니가 ‘목소리’라면 엄마는 ‘젖’이다. 엄마인 세서는 사람(노예)을 매매하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도망치고, 착취하는 백인에게서 도망치고, ‘젖을 빼앗은’ 남성들에게서 도망쳤다. 세서는 만삭의 몸으로 목숨 걸고 켄터키주 농장에서 탈출하여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다다른다. 그곳에는 먼저 탈출시킨 세 자식들이 제 할머니와 산다. 노예제가 사라지기 전 19세기. 남자들은 감옥에 가거나 죽었거나 사라진 ‘여자들의 집’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세서의 가슴과 등은 이 작품 전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미지다. 자식들을 먹이며 악착같이 노예제에서 구해내기 위해 세서는 ‘젖을 가지고’ 자식들에게 왔다. 그에게 젖가슴은 자식들을 살리는 생명줄이며 자신의 존엄함을 상징한다. 그렇기에 농장의 백인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했을 때 그는 ‘그들이 내 젖을 가져갔어!’라고 외친다.

젖과 모성의 연결이 누군가에게는 여성의 몸을 모성에 가두는 걸로 보이겠지만 흑인 여성 노예에게는 그렇지 않다. 주인의 자식들에게 젖을 먹이느라 정작 제 자식에게 젖을 먹이지 못하는 노예. 이 여성 노예는 암컷 가축이라 주인들이 마음대로 ‘짝짓기’를 시켜서 ‘새끼 빼는’ 도구로 이용했다. 노예제에서 여성의 몸은 노동력을 제공할 뿐 아니라 재생산을 위한 가치를 가진다. 이 재생산은 철저히 주인에 의해 통제당한다. 여성 노예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하거나 원치 않는 낙태를 당하거나 원치 않는 출산을 한다. 그렇기에 이 흑인 여성에게 온전히 주체적인 모성의 경험은 매우 귀하다. 제 자신도 엄마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라거나 가족을 형성한 경험이 없다. 모성과 가족관계를 박탈당한 노예의 입장에서 제 자식에게 젖을 먹이는 행위는 백인과는 다른 해석을 필요로 한다. ‘번식’의 도구가 아닌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의식이나 다름없다.

한편 세서의 등에는 벚나무가 자란다. 그가 자신의 강간 피해를 발설했을 때 이 강간범들은 세서를 채찍으로 때려 등에 굵직한 흉터를 만들었다. 살갗이 벗겨지며 피고름이 만든 이 흉한 상처의 모양은 마치 벚나무처럼 등을 뒤덮고 있다. 이 흉터의 나무에서 화사하게 꽃이 피고 버찌가 열리리라 생각하며 세서는 상처를 보듬는다.

실제로 노예의 유명한 등 사진이 있다. 1863년 <허퍼스 위클리>에 실린 ‘고든의 상처난 등’ 사진은 많은 노예제 폐지 운동가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도망친 노예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 등 사진 한 장은 많은 것을 말해줬다. 하지만 이 이미지에는 고든이라는 한 개인의 이야기는 없다. 이 강력한 이미지는 오히려 흑인 노예의 몸에 대한 단순하면서도 자극적인 상상의 한계를 만들었다. 피해자로서의 몸만 남을 뿐 그들의 이야기가 들어설 자리는 여전히 없었다.

<빌러비드>에서 세서의 ‘벚나무 같은 등’을 중심으로 뻗어나오는 이야기는 바로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젖을 먹으며 자란다. 세서에 의해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재기억’은 폭력적 과거를 소환한다. 과거가 그의 현재를 집어삼키며 계속 지배한다. 자신의 몸이 지배당했던 기억이 강렬하여 그는 자식은 기필코 농장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려 한다. 도망간 노예를 잡으러 온 사람들을 보자마자 세서는 스스로 제 딸의 목을 잘라 버렸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 ‘젖을 가져온’ 그가 자식을 노예로 만들지 않기 위해 직접 죽여 제 손에 피를 묻힌다. 이는 실제로 있었던 한 영아살해 사건을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쓰여진 이야기다. 소설에서는 죽은 딸이 유령이 되어 엄마 주위에서 맴돈다. 이 참혹하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는 ‘모성’과 ‘친자살해’가 인종과 계급에 따라 전혀 다른 담론을 형성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세서가 미처 죽이지 못해 살아남은 딸 덴버는 죽은 언니의 피와 뒤섞인 엄마의 젖을 물었다. 언니가 죽은 직후 덴버는 피로 물든 엄마의 젖을 먹으며 살아남는다. 언니의 피와 엄마의 젖. 죽음의 흔적인 피와 생명줄인 젖이 혼합된 이 ‘피젖’을 먹은 덴버가 유일하게 이 작품에서 과거에 지배받지 않는 인물로 나온다.

젖을 가진 엄마 세서는 자신이 ‘잉크’를 만들었다는 아리송한 말을 한다. 살아남은 딸 덴버는 엄마의 젖과 죽은 언니의 피, 할머니의 목소리를 물려받은 살아있는 역사다. 다시 말해 덴버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상속받아 엄마의 젖(잉크)으로 죽은 자매를 생각하며 제 이야기를 쓸 것이다. 죽은 ‘빌러비드’는 사라진 모든 딸들이다. 소중한, 사랑받는, 그러나 사라진 여자들이다. 덴버는 바로 ‘피젖’을 먹고 자란 수많은 살아남은 여성들을 상징한다. 이 소설이야말로 토니 모리슨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젖과 피가 흐르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덴버는 써야할 이야기가 많은 수많은 ‘나’다. 모리슨은 떠났으나 여전히 ‘피젖’으로 써야할 이야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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