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과 함께] ⑨ 버려진 말들을 모아, 삶을 찾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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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1 14:18 | 최종 업데이트 2019-09-11 14:18

9월이다. 태풍 링링에 쓰러진 창밖의 나무를 보다가 전태일의 수기를 다시 넘긴다. 문장 사이사이 박힌 외로움과 떨림, 분노와 그리움, 두려움을 읽는다. 1969년 9월, 그는 혼자였다. 평화시장은 그의 자리를 모두 뺐다. ‘청년 백수’ 태일은 종일 떠돌다 돌아와 산 속 골방에서 9월에게 편지1를 쓴다. 그렇게 시작해 가을, 겨울, 이듬해 봄에 걸친 침묵 속에서 글을 써내려간다.

소년 시절의 거리 이야기를 쓴다.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평화시장의 자전적 경험을 소설로 쓴다. 그 공책 속에서 태일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본다. 대통령에게, 근로감독관에게 엄한 문장으로 편지를 쓴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모범업체 설립 계획서를 치밀하게 작성한다. 지칠 때는 유행가 가사로 행간을 채운다. 태일의 글들은 나침반 바늘 끝처럼 파르르 떨린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평화시장의 부조리와 폭력을 곱씹기 위해서라도 그는 글을 써야 했다. 글쓰기는 닫힌 세상의 문을 찾는 통로이자, 앞날의 불안과 두려움에 맞서는 수단이었다. ‘근로기준법’에 나온 대로 해야 한다고 떠들던 청년의 추방된 말들은 노트 안에 둥지를 튼다. 독백인 줄 모르는 독백 속에 태일은 치열하게 집중하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시간을 태일은 살고 있었다. 그는 방에서 글을 쓰며 평화시장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간다.

‘사내’와 ‘사나히’ 설움을 봉인하다
취업을 준비하던 청년 김용균은 토익점수로 스트레스받던 어느 날, 휴대폰 메모장에 편지를 쓴다. ‘용균아 나다 너, 요즘 군기가 빠진 듯한 너를 보니 나도 힘이 나지 않는다.’로 운을 뗀다. 이 상황은 자신에게 ‘주어진 당연한 숙제’이니, 토익 준비 시간과 기초가 부족했던 결과를 받아들여 우선 물러서자고 한다. 하지만 그게 포기는 아니며, ‘기하급수적’으로 잘해주신 부모님을 생각할 때, ‘세상이 아무리 모질고 힘들더라도, 너 김용균은 굳세어야 한다’고 나 김용균은 쓴다2.

이 시대 청년의 성실한 자기 주문이다. 불확실한 미래와 주눅 든 자신을 애써 추스르고 있다. 일이 잘 안 되는 것은 군기 빠진 자신의 노력 부족 탓이다. 용균의 낱말들은 학교와 군대, 어른들이 그동안 가르쳐준 것들이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 며칠 전 부모님에게 불쑥 날카롭게 굴고 세상을 원망하는 퉁명스러운 말을 내뱉은 게 명치 끝에 걸려 있었다. ‘어린 마음에 부모님이나 어른들에게 본심을 나타내는 건 옳지 않은 일’이라며 반듯하게 수습은 하고 있지만, 용균은 이렇다 할 ‘일자리’를 환영하며 내주지 않는 사회에 거친 ‘본심’이 생겼던 듯하다. ‘세상이 뭐 이래!’에서 ‘헬조선, 현실은 시궁창, 또는 극혐’ 사이였을 그 ‘본심’은 번번이 일자리를 거절당하던 날마다 불뚝불뚝 일어섰을 것이다.

공손한 용균은 ‘본심’을 ‘예의’로 누른다. 그러나 이미 생긴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다시 한 번 다독인다. 본심을 드러낸 걸 반성하면서 스스로 ‘울지 마, 넌 사내야’라고 한다. 군대와 사회가 쥐어 준 ‘사내’라는 말로 겨우 마음을 다잡는다. 결국, 숱한 도전 끝에 이 ‘사내’는 화력발전소에 ‘현장운전원’으로 취직한다. 문화 자본도, 화려한 스펙의 발판도 없는 공단 하청 노동자의 아들에게 세상이 드디어 자리를 내준 것이다.

태일은 방에 들어앉아, 재단사가 된 1967년의 일기장을 넘겨보았다. 그 해 2월의 일기에는 ‘일 끝나고 2시간씩 공부해서 입시를 보고 군입대까지 돈 모아 집 한 채를 장만하자’는 거창한 꿈이 씌어 있었다. 평화시장에서 3년 일하면서 가혹한 노동 환경에 ‘억울한 생각’이 쌓였지만 원하던 재단사가 되었으니 재량과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여긴 시절이다.

자신에게 일자리를 준 ‘주인의 공을 갚고 완전한 재단사가 되자’고 씌어 있다. 한미사에 ‘온 생애를 걸다시피 한’ 마음이었다. 세상의 선의를 믿고 긍정 마인드와 열정 페이로 비수기의 가혹한 무급을 견디며 눈물을 삼킨 만큼 포부는 컸다.

재단사가 되기 직전, 설 이후 비수기 내내 가게와 공장 허드렛일을 도맡아하지만 사장 부부는 임금을 주지 않았다. 사모에게 청한 500원의 ‘최저 생존비용’은 묵묵부답이다. 아끼던 맘보바지, 할부도 안 끝난 곤로를 헐값에 판다. 밥은 뒤로 하고 통신강의록 중학 1권을 산다. 노트까지 한 권 사고 3일 금식에 들어간다. ‘나에게는 배움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고 되뇌며 빈 배를 속이지만 두 끼를 참고는 밥을 넣는다.

그날, 정신력으로 겨우 막고 있던 설움과 고독이 ‘역습’해 온다. 이유를 설명하기 힘든 눈물이 난다. 자신도 모를 설움에 북받쳐 펑펑 운다. 주인집의 선의를 목매 기다리던 그는 그렁그렁한 눈물을 ‘사나히답지 못하게’라는 말로 닦으며 겨우 수습했다.

그 시간을 통과해 시작한 재단사 생활은 ‘못 견디게 괴로’운 나날이었다. 세 명 일을 혼자 하는 심신의 고통을 3월 18일 일기에 썼다. 일기는 3월 말에 끊긴다. 한참 후 가을 일기에, ‘자신은 일의 방관자’라 씌어 있다. 멍한 의식과 기계적인 노동, 무감각한 퇴근과 세면, 형식적 인사와 밥상, 꿈 없는 잠. 이런 일상 속에 태일은 우리의 스무 살이 그렇듯, 가혹한 착취 노동 속에서도 ‘자기 훈련’이라는 메모를 쓰던 날이 있었다.

‘자기 훈련’에는 모두 20개의 체크리스트가 적혀 있다. ‘맡은 일에 매일 정력을 다 기울이고 있는가? 나는 일에 빈틈이 없고 또한 일하는 태도가 훌륭하다고 볼 수 있는가? 수입의 몇 할을 저축하고 있는가? 나의 교양과 지위 향상 준비를 위해서 수입의 몇 할을 정해서 쓰고 있는가? 인생의 건축기사로서 사람은 그 일에 온갖 정력을 퍼붓지 않으면 안 된다.’ 등의 질문과 명제가 눈에 띈다. 요즘 우리처럼 ‘노오력’의 근거를 마련하던 2년 전 자신의 마음을 생생하게 느낀다.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자기가 열심히 살면 된다는 희망의 언어로 억울함을 지웠다. 태일과 용균은 ‘사나히’와 ‘사내’로 간신히 뜨거운 억울함을 덮고 있었던 것이다.

위원회 보고서의 낯선 문장들
1년 열심히 하면 한전에 정규직으로 입사할 수 있다는 직장의 실체는 달랐다. 사내 하청 비정규직이었다. 2001년 분할된 5개의 발전 공기업은 경쟁 시스템을 갖춰왔고 2013년 발전정비에 전면 경쟁이 도입된다. 서부발전 등 원청회사는 연속 공정을 쪼개 민간 업체에 나누어준다. 원하청 사이, 하청업체와 노동자 사이의 상호 소통은 단절되고 위험은 급증했다. 김용균들에게는 위험을 감수할 책임이 생겼지만 위험을 해결할 물품과 권한은 없었다.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조사결과 종합보고서

최근 5년, 발전 산업 재해는 급증했고 사고 사망자는 모두 하청 노동자였다. 원청은 책임이 없었다. 8년간 11명이 죽었어도 원청 서부발전은 무재해인증을 받아 오히려 산재보험료를 감면받았다. 하청업체들은 청년들을 현장에 졸속 투입해, 부족한 인력으로 고강도 노동을 시키는 한편, 원청에서 받은 임금을 절반까지 착복해 큰 이윤을 남긴다. 2인 1조는 지켜지지 않았다. 설비 개선, 인원 충원을 요구한 2018년의 28회 현장 요청은 답을 얻지 못했다. 헤드랜턴도 지급되지 않았다. 용균은 휴대폰 손전등으로 컴컴한 점검구를 비추며 일했다. 이상은 지난 8월에서야 4개월에 걸친 조사 끝에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석탄화력발전소 특별노동안전위위원회’가 밝혀낸 총체적 진실의 일부이다.

위원회 보고서는 발전소 자체 보고서와 달리, 노동자의 입장에 섰다. 인권에 주목해 사고 원인에 깊게 접근했다. 발전소의 구조적 불안과 위험한 고용, 예견된 죽음의 문제를 실증적으로 밝혔다. 매뉴얼을 무시한 채 20톤짜리 컨베이어벨트 아래 머리를 디밀고 시키지 않은 과잉 행동을 한 게 아니라, 점검구에 머리를 넣고 기계 사이에 낀 탄덩어리를 후비고 롤러를 육안으로 확인해 이상시 사진을 찍어 보내야 하는 원청의 업무상 지시를 성실하게 수행하다가 변을 당했다고 썼다. 용균의 사수는 한 발은 저승길에 들여놓고 일해 왔다고 말했다. 늘 사고 원인을 개인에게 전가하고 직원들을 입단속하던 발전소는 할 말이 없게 됐다. ‘기도문’ 같은 보고서 문장에서는 피땀이 묻어나온다.

용균 어머니는 아들이 힘들게 일하는 걸 보며 할머니의 이야기3를 떠올리곤 했다. “야야, 돈 벌 모퉁이가 죽을 모퉁이대이.” 대수롭지 않은 속담이 자기 일이 되어 험한 일터에서 자식을 잃고 뒤늦게 그 말을 다시 떠올린다. 돈 버는 게 힘들다는 보통 말이 아니었다. 이 말에는 일제 강점기 이래 근대 산업화와 독재 아래 한국인들이 겪어온 불안하고 위험한 노동에 대한 경험이 누적되어 있다. 민중은 생명을 경시하는 구조적 폭력을 간파하고 있었다.

추방된 언어, 친구들과 둘러앉다
태일은 노동자들을 이윤의 ‘거름’으로 여기는 업주, 그 뒤를 봐주던 독재국가의 관리인들에게 순진하게 ‘근로기준법’을 들이댔다. 현 실정에 안 맞으니 지킬 수 없다고 하자 태일은 알겠다고, 더 열심히 일하겠다고 안하고 친구들을 모아 잘못되었다고 떠들고 다닌다. 평화시장은 불순한 학생을 퇴학시키듯 태일을 쫓아냈다. 태일의 말들이 ‘자기 울타리’를 넘어 주제넘게 ‘세상’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태일의 언어는 개인의 출세, 가족의 언어의 울타리를 넘어 있었다. 1969년 말일, 새해로 넘어가면서 결연한 투쟁의지를 밝힌 태일은, 자기 생명을 거는 일까지도 선택지 속에 넣기 시작한다.

1970년 4월에 쓴 태일의 소설 초고에는, 주인공의 유서가 눈길을 끈다. ‘사랑하는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 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주게.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굴리다 못 굴린… 덩이를…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못 다 굴린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 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태일은 친구들 사이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자리’를 갈망한다. 끊임없이 의자를 빼는 ‘생존 경쟁이라는 악마’의 사회가 아니라, 자리를 내주고 앉으라는 수평의 환대를 갈구한다.

‘사회 없는 사회’의 새로운 언어들
한국사회는 노력, 능력의 말 속에 삶을 가둔다. 가까운 사람을 잃지 않은 사람들은 개인과 가족의 언어 속에 여전히 산다. 세상은 ‘사회는 없다! 개인과 가족이 있을 뿐4’이라며 고속 컨베이어를 돌린다. 죽음은 개인 책임이어야 하므로 재해, 재난의 진실은 뭉개진다. ‘사회는 없는’ 사회의 틈에서 ‘사회는’ 계속 청년들을 잃고 있다. 선령 규제를 완화해서 들여온 중고 세월호에서 수많은 삶을 잃고도 여전히 세월호 같은 세상에서 김군을, 현장 실습생 이민호, 김동준, 김동균을, 청년 김용균을, 김태규를 잃고 있다. 누군가는 ‘사람을 잃고’ 고통 속에 살지만, 비용과 이윤을 더 중시하는 ‘생각’과 ‘정책’이 스며든 사회 곳곳의 시스템은 사람을 잃었다고 느끼지 않는다. 사람이 아닌 부속품이 빠졌다고 인식하고 라인을 재가동한다.

우리가 쓰는 말은 어디까지 가 닿는가. 진실에 닿으려는 말들은 ‘사회는 있다’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청년들은 그동안 눌러둔 말들을 하기로 했다. 세상을 겪으면서 마음에 고인 ‘본심’을 말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사내’로 눌러둘 수 없는 말들이 터져나온다. 용균은 피켓을 들고 대통령에게 이대로 비정규직을 방치할 거냐고, 만나자고 했다. 태일은 ‘무고한 생명들이 시들어가는 평화시장 어린 동심의 곁’으로 돌아가겠다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고 세상의 벽에 자신의 온몸을 갈아 글을 썼다. 삼각산 수도원 공사장에서 고된 노동에 몸을 맡긴 지 여러 달이 지난 1970년 8월 9일, 태일은 평화시장에 돌아가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학교에서 배우지는 않았지만, 생명을 지키려는 저항의 언어로 쓴 시, 피켓을 들고 함께 외칠 시간이 왔다고, 이 시대의 본심들도 마음을 먹고 있다. 제주 이민호 군의 카톡에서처럼, 43도의 더운 공장이 ‘실화’이며, 고딩이 고장난 메인 기계를 책임지는 ‘극혐’의 세상은 끝내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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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9월, 너는 가을이라는 친구와 변함없는 우정의 상대자. … 모두 혼자만이 낙엽이라고, 이 나무 아래 떨어진 낙엽은 가을의 발 아래에서 썩는구나. 낙엽따라 9월은 가지만 나, 나는 누굴 따라 어떻게 간단 말이냐. 나는 삼거리에 이정표처럼 누가 같이 하자고 하는 이가 없구나. 바람이 부나, 눈비가 오나,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나.” (1969년 9월의 일기에서)
  2. 아들의 휴대폰 메모장에서 발견한 편지를 용균 어머니는 인터뷰에서 보여주고 공유해 주셨다. (2019.5.19.)
  3. 이 단락의 주요 내용은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조사결과 종합보고서’(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석탄화력발전소 특별노동안전위위원회, 2019.8) 요약 부분을 주로 참고하였다. 또한 김용균의 죽음과 남겨진 이들의 마음을 담은 낭독노래극 ‘기다림’ 작품집(대본 장민지) 또한 전반적으로 참고하였다.
  4. 1980년대, 신자유주의로 나라를 바꾼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가 한 말.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사회에 떠넘기고 있다며 무한 경쟁 속에 개인의 노력을 강조했다. 기업의 이윤과 시장의 효율을 절대시하며 세계 곳곳으로 퍼진 신자유주의는 사람의 안전과 생명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