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의 독립운동가, 내 이름은 O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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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기준으로 독립유공자는 15,689명, 이 가운데 대구경북 출신(1945년 이전 본적지 기준이므로 대구도 경북에 포함)은 2,241명이다. 전체 유공자의 14.28%로 가장 많다.

<뉴스민>은 경북에 왜 독립운동가가 많았는가? 라는 질문부터 시작했다. 인구가 많아서? 1925년을 기준으로 경상북도 인구는 2백3만 명으로 전체인구의 11.95%를 차지했다. 당시 서울인천을 포함한 경기도 인구가 2백만 명으로 전체인구의 10.34%이었다. 단순 비율만 놓고 봐도 인구 비율보다 독립유공자 비율이 높다.

구한말 의병장을 지낸 구미 출신의 왕산 허위(1854~1908),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는 안동 출신이다. 파리장서운동에 나섰던 유림 심산 김창숙(1879~1962)은 성주 출신, 신흥무관학교·서로군정서를 이끌었던 일송 김동삼(1878~1937)은 안동 출신, 해방 이후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김상덕(1891~1956)은 고령 출신이다. 이렇게 널리 알려진 이들의 뿌리를 찾아보면, 유학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서원을 중심으로 한 유생들이 많았던 경북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나왔다는 분석도 있다. 선비정신,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데 앞장 서야 한다는 보수적 가치를 실천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유림이 독립운동에 나선 것은 아니다.

경북의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사회주의’ 계열도 많다.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인물 가운데는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으로 6.10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안동 출신 권오설(1887~1930), 김천 출신 김단야(1899~1938)가 있고,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를 역임한 의열단 김재봉(1890~1944)도 안동 출신이었다.

19세기 중반 태어난 이들은 유학을 바탕으로 의병,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었다. 19세기 후반 태어난 이들은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1919년 3.1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그리고 그즈음 서구에서 일어난 러시아혁명은 독립을 바라는 많은 조선인들에게 어떤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김희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은 “당시 세계사적인 변화, 러시아혁명으로 인한 사회주의의 유행이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또,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분들 가운데 유학의 대동사회와 연결될 수 있다는 점도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었던 한 토대이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올해 현충일 문재인 대통령이 김원봉(1898~1958)을 언급하면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서훈 논란이 불거졌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서훈 기준에서 독립운동가의 사상을 따지는 항목은 없다. 2000년대 이전까지는 사회주의 계열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배제됐지만, 2000년대 들어서 서훈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행적이 뚜렷하다면 배제할 이유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에 기여한 공로가 있다면 배제된다.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다고, 독립운동이 아닌 것은 아니다. 물론, 독립유공자 유족에 대한 지원, 국가적인 예우 문제는 과제로 남는다.

<뉴스민>은 언론의 역할이 무엇인가 질문을 했다. 독립운동가를 유공자로 만드는 일을 차치하고서,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독립유공자는 없을까. 길거리에 나가 시민들을 만나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이름을 물었다. 대부분이 열 손가락 근처에 가지 않았다. 선택적 선양, 선택적 기억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민들의 잘못이 아니다.

시민들은 김원봉, 윤동주, 박열 등 영화나 드라마라는 대중매체에서 다뤄진 인물을 쉽게 기억해냈다. 기억할 수 있도록 시민을 돕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뉴스민은 2019년 4월부터 ‘이것은 독립운동이 아니란 말인가?’라는 질문을 들고 시민을 만나고,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쫓았다.

첫 번째 키워드는 ‘남과 북에서 모두 잊혀진 사람’이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했다고, 또는 북한 정권 수립에 협력했다고 잊혀졌다. 북한에서는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났다는 이유로 숙청됐다. 이들은 한반도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지만, 사후에는 그것마저도 잊혀졌다. 떠도는 원혼이 남쪽에 있는지, 북쪽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누가 이러한 선택적 기억을 하도록 했는지, 20세기 초중반 어떤 고민을 안고 독립운동에 매진했는지 전할 필요가 있었다. 모두 서훈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이다.

구미 출신 허형식(1909~1942)은 1930년 하얼빈의 일본총영사관 습격을 주도하였고, 1936년부터 동북항일연군에서 무장독립운동을 벌이다 전사했다. 많은 수의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만주를 떠나 소련으로 건너갈 때도 허형식은 만주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2014년 공고한 항일영웅 열사 300명 중에 포함된 인물이다. 김일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벌였으니, 남쪽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았다. 북에서도 김일성 우상화 정책 탓인지 밀려났다. 허형식이 의병장 허위 일가인지라 언급될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칠곡 출신 이여성(1901~?)은 좌우합작운동에 매진한 독립운동가이다. 6.25전쟁 당시 인민군 종군화가였던 동생 이쾌대(1913~1965)가 더 알려졌지만, 이여성은 식민통치 기간부터 독립운동에 나섰던 인물이다. 그는 여운형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근로인민당 등 중도좌익계열 활동을 함께 했다. 여운형 암살 후 좌우합작운동도 좌절되자, 이여성은 1948년 월북한다. 이후 북한에서 숙청당했다. 고향 칠곡에서도 그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안동 출신 이원조(1909~1955)는 이육사(1904~1944)의 동생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육사의 유고를 모아 시집으로 발간한 것이 이원조이다.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함께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뉴스민> 취재 결과 고증된 기록은 없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에 근거한 ‘인민적 민주주의 민족문학론’을 내세웠던 문학이론가였다. 해방 이후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동했던 그는 월북했고, 박헌영·이승엽 등에 대한 간첩사건으로 함께 처형됐다. <뉴스민>은 이원조를 시발점으로 일가 다수가 독립운동에 참여한 배경을 쫓았다.

대구 출신 정칠성(1897~1958)은 일제강점기 전체를 통틀어 손꼽히는 여성독립운동가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사회운동에 눈을 뜬 이후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시작한 정칠성은 신간회, 근우회 창립에 참여했다. 기생 출신이었던 정칠성은 여성해방과 반제국주의 독립운동을 분리시키지 않은 운동가였다. 소련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여성해방론을 국내에 소개하면서, 여성의 자유 연애를 언급함과 동시에 식민지 조선의 형편을 고려할 것을 강조했다. 특히, 여성해방을 위한 경제적 독립을 설파하면서 직접 직업 교육에 나서기도 했다. 1948년 미군정의 좌익 탄압을 피해 월북했으나, 1958년 숙청당했다. 정칠성은 두 번째 키워드와도 이어진다.

두 번째 키워드는 ‘시대와 함께한 여성독립운동가’다. 여성독립운동가 취재를 하면서 <뉴스민>은 2가지를 고려했다. 서훈을 받은, 또는 받지 못한 이유와 서훈 시기를 살폈다. 그리고 취재한 인물의 독립운동 방식이었다. 현대적 기준으로 보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지는, 독립운동가 집안을 위해 헌신하는 여성으로서의 정형을 살아온 인물도 있다. <뉴스민>은 주어진 시대정신을 체화하고, 독립운동에 기여한 여성의 삶 그 자체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고 봤다.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가치와 불화하면서 독립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을 함께한 인물도 있다. 그래서 오늘날 20대 여성을 초청해 좌담회를 진행했다. 그 어떤 것도 독립운동이 아니라고 할 이유는 없다.

구미 출신 허은(1907~1997)은 경북 독립운동의 흐름을 꿰뚫는 인물이다. 허은의 삶을 통해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방식과 특징을 살필 수도 있고,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한 처우 문제, 당대 여성의 삶을 살필 수도 있다. 허은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거미줄처럼 얽힌 독립운동가들의 고리가 보인다. 왕산 허위의 5촌 조카 허발의 딸이면서, 그의 동생은 이육사 형제들의 어머니다. 육사와 원조 등이 그와 이종사촌 지간인 것이다. 또 허형식은 그의 5촌 당숙이 된다. 가족들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서 결혼을 하는데, 남편은 석주 이상룡의 장손자였다. <뉴스민>은 돌봄노동, 재생산노동에 대한 가려진 평가를 들춰내 보여주고자 했다.

허은의 회고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고달픈 발자국이었긴 하나 큰일 하신 어른들 생각하면 오히려 부끄러울 뿐이다. 그 대신 머지않아 여러 영령등 뵈옵고 이토록 살기 좋은 세상이 된 것을 말씀드릴 생각하면 마음 뿌듯하다. 선열들의 피 흘린 노력의 보람을 오늘 이 나라의 성공에서 찾을 수 있으시겠지.”

안동 출신 김노숙(1906~1936)은 만주로 망명한 이후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가 30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간부였던 남편 이동광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동북항일연군 부녀대로 참여했다. 동북항일연군 봉제대대장이라는 군에 편제된 직책을 맡았다. 한 항일무장군의 부인으로서의 지위가 아니라, 독립적인 역할을 맡은 것이다. 만주에서 무장항일투쟁을 벌인 우리 독립군들 내에도 군복을 만들어내는 역할은 대부분 여성이 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한데, 김노숙의 역할은 명시적이다. 이는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이 담긴 사료도 선택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김노숙 역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다. 그가 남긴 후손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중국공산당에 소속되어서 일 수도 있다. <뉴스민>은 김노숙을 통해 독립운동 기록이 놓친 것들을 쫓았다.

영천 출신 김정희(1896~?)는 1919년 전국으로 퍼진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4월, 영천에서 들었다. 혈서로 쓴 깃발을 챙겨 거리에 나가 만세를 외쳤다. 결혼한 여성이 밖으로 나와 ‘만세’를 외치자 경찰이었던 그의 동생은 정신이상자로 몰려 검찰에 넘겼다. 옥살이 이후 대구로 간 정희는 여성단체에 합류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평범한 여성이 독립운동에 나선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그 고리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였고, 김정희는 누군가의 부인에서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 길을 걸었다.

<뉴스민>은 7명의 독립운동가의 삶을 통해 당대 상황을 전하고,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를 짚고자 한다. 잊혀진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 시민들과 함께하고자 한다. 10월 3일부터 한 달 동안 취재 기사와 영상을 연재합니다.

#취재
김규현, 박중엽, 이상원, 천용길 기자, 정민혜 뉴스민 데이터저널리즘연구원

#도와주신 분들
경북독립운동기념관
대구영상미디어센터
강성희(칠곡군 신리 웃갓마을 주민)
강윤정(전 경북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
김균탁(안동 이육사문학관)
김윤오(칠곡문화원장)
김인혜(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김희곤(경북독립운동기념관 관장)
박도(소설가)
박명현(대구문화재단 예술진흥본부)
석은동(대구 대륜고등학교 인문사회부장)
손산문(영천 자천교회 목사)
신용균(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이옥비(이육사문학관 상임이사)
이원창(이육사 형제의 6촌)
이중희(계명대학교 명예교수)
이한용(느티나무 헌책방(바우북) 대표)
이항증(국무령이상룡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장세윤(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
최유창(이원조의 이질)
최재성(성균관대학교 연구교수)
허영길(연변박물관 연구원)
허창수(허형식의 조카)
박하경, 이기쁨, 현유림, 최지혜(20대 여성 집담회 참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