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대구에 세워진 ‘전태일 공원’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목소리 모여야"

23:05

형이 대구에서 태어나 6.25전쟁 시기 피난을 떠났다가 12년만에 다시 대구로 돌아왔습니다. 1년 7개월 가량 대구에서 보낸 시절이 아마 형의 22살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섯 식구가 잠시나마 모두 모여 살았고, 형이 유일하게 학교를 다니며 공부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대학생 친구가 한명만 있었으면 좋겠다던 전태일.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이듬해 6.25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간다. 전쟁이 끝나고 전태일과 가족들은 서울로 올라갔고, 전태일은 당시 국민학교 3학년으로 남대문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4.19혁명이 일어나 학교에는 군대가 주둔했고, 그는 수업을 들을 수 없었다.

재단사이던 그의 아버지는 학생복을 납품하는 공장을 꾸릴 정도로 집안을 일으켜세웠지만, 1960년 함께 일하던 동료의 사기로 살던 집에서도 쫓겨났다. 서울 이태원 사격장 근처 헛간 임시거처에서 지내던 전태일은 15살이던 해에 다시 대구로 내려온다.

21일 오후 1시, 대구시 중구 남산로 청옥고등공민학교(현 명덕초등학교) 앞에는 전태삼 씨와 시민 30여명이 모였다. 전태일이 다녔던 학교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45주기 대구시민문화제 추진위원회’는 전태일이 대구에서 보낸 발자취를 답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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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중구 남산동 한 골목, 전태일과 그의 가족이 살았던 곳.

전태일과 가족이 1년 7개월 가량 살던 곳은 대구시 중구 남산로 한 골목길이었다. 청옥고등공민학교에서 바라보면 배추밭과 염색공장 너머에 그의 집이 있었다. 파란 대문 주인집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갖고 있었다.

전태삼 씨는 “여기에 여섯 식구가 누으면 딱 맞았다. 다락을 만들어서 그 위에 짐을 다 올려놓고, 미싱 두대를 놓았다. 당시에 구호물자로 들어온 옷들이 크기가 커서 우리나라 사람한테 안 맞으니까, 그걸 가지고 와서 튿어서 아버지가 다시 재단했다. 엄마와 내가 튿어서 주면 아버지가 재단하고 형이 미싱을 했다”고 말했다.

재단한 옷은 어머니가 장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당시 전태일은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야간반에 다니며 공부했다. 전태일은 반장을 맡을 정도로 학구열이 넘쳤다고 한다. 서울 말투를 쓰던 그는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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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식구가 모두 모여 살았던 곳에서 기억을 회상하는 전태삼 씨.

태삼 씨는 “그때 형이 한쪽 벽에다가 영어 단어를 붙여 놓고 외우면서 미싱을 했던 기억이 난다. 형은 항상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마음이 깊이 있었던 것 같다. ‘태삼아,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면서 아버지가 재단한 잠바 7장을 챙겨 나를 데리고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다”고 말했다.

전태일은 동생 태삼 씨를 데리고 공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깡패를 만나 가진 돈을 다 빼았기고, 파고다 공원 근처에서 사과 궤짝을 사서 이동식 집을 만들었다.

태삼 씨는 “낮에는 파고다 공원 구루마 보관소에 짐을 맡겨 놓고, 밤에는 궤짝 집에 들어가서 촛불을 켜고 공부했다. 형은 나에게 구구단을 외우게 하고, 한글을 가르쳐줬다. 형은 그때도 영어 공부를 했다”며 “한달쯤 신문팔이, 껌팔이를 하면서 서울에서 살았는데 내가 병이 났다. 형이 나를 살리겠다고 다시 대구로 내려왔다”고 말했다.

다시 대구로 내려왔을 때, 이미 가족들을 뿔뿔이 흩어졌다.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떠났고, 아버지와 가족들은 남구 대명동 대명시장 근처 헛간에서 가마니를 깔고 임시로 살았다. 아버지는 대구역 뒷편에서 계속 재단일을 했다.

전태일은 “어머니를 찾으면 다시 내려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막내 동생 순덕을 업고 서울로 올라가 평화시장에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대구에는 그의 아버지와 태삼, 순옥 자매만 남았다.

태삼 씨는 “아마 대구에서 살 때가 형의 운명을 결정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 길로 올라가서 1970년 11월 13일 생을 마감할 때 까지 서울에 살았다”며 “나는 형을 찾으러 가고 싶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연락올 때 까지 기다리라면서 화를 내셨다. 결국 나도 혼자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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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중구 남산동 50번지, 전태일이 태어난 곳은 현재 ‘바르게 살자’라는 큰 비석이 서 있다. 70년대 창문 하나 없는 공장에서 실밥 먼지를 맡으며 일하던 청년들의 하루 임금은 커피 한 잔 값인 50원이었다. 졸지 않고 밤새 일하기 위해 주사를 맞았다. 있으나 마나한 근로기준법을 불살라 열악한 노동환경을 세상에 알렸던 그와 어울리지 않는 비석이다.

이날 추진위원회는 이곳에 ‘전태일 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규섭 추진위원장(대구참여연대 대표)는 “성문을 사이에 두고 성문 안의 사람들과 밖의 사람들의 삶은 너무나도 달랐다. 전태일은 성문 밖의 노동 형제들과 함께 성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 성문 벽을 허물고자 했다”며 “대구에서 전태일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의식의 변화다. 성벽을 허무는 많은 사람들이 손을 잡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태삼 씨는 “많은 이들의 관심과 실천이 있었기에 오늘 형의 공원이 생길 수 있는 것 같다”며 “지금 바라는 것은 지나간 역사를 좀 더 소중히 기억하고 복원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하는 바램이다. 지금의 서민, 노동자, 비정규직, 학생들이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목소리가 이 곳에?모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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