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이여성] (1) 이루지 못한 좌우합작의 꿈

미술, 복식연구가, 기자 이여성이 꿈꾼 해방
몽양과 약산의 동지로, 실패한 좌우합작에 좌절
경북 칠곡군에서 사라진 이여성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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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4 16:25 | 최종 업데이트 2019-10-07 10:58

해방을 맞은 한반도에 평화는 오지 않았다.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을 맞지 못했기 때문일까. 때가 무르익지 않은 탓일까,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정당과 지도자들은 반목했다. 주변 풍랑은 더욱 거세졌다. 열강의 갈등이 고조됐다. 종전 직후부터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싹트기 시작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표면적으로 한반도 정부 수립을 지원한다고 했지만, 주판알 튕기기에 바빴다.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동상이몽의 장이었다. 미국은 남한 단독선거를 염두에 두고 한반도 문제의 유엔 이관을 추진했다. 소련의 반대에도 남한 단독선거가 굳어지는 분위기였다.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다는 동아일보의 가짜뉴스와 함께,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유엔한국임시위원단[미소 공동위원회] [사진=국가기록원]

해방의 여명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민족은 분단의 길로 향했다. 분단만은 피하려는 여운형, 김규식 등은 좌우합작에 나섰다. 일제 패망을 예견한 여운형은 건국동맹을 결성하고 건국을 준비했다. 해방 직후, 여운형과 여운형이 몸담은 건국준비위원회는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미국도 이를 무시하지 못했다. 여운형은 다른 당파와 함께 합작 7원칙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미소냉전의 분위기를 뒤집을 만큼 다른 당파의 실질적 협력을 모아내지 못했다. 미군정은 단독정부 수립으로 마음을 굳혔고, 좌익진영 탄압을 시작했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됐다. 12월, 좌우합작위원회가 해산됐다.

▲1945년 8월 16일 휘문중 교정에 들어서는 (좌측부터) 이상백, 몽양 여운형, 이여성. [사진=몽양기념사업회]

여운형 암살과 함께 좌절한 인물이 있었다. 여운형의 참모였던 이여성(李如星, 1901~?)이다. 그는 건준, 조선인민당, 좌우합작위원회의 요인이었지만,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 행동하는 학자에 가까웠다. 학술과 이론, 해외 정세에 밝았던 이여성은 분단 없는 조국을 위해 일생을 던졌다. 사회주의자였지만, 민족주의를 배척하라는 코민테른의 결정(12월테제)을 따르지 않고 약소민족의 민족국가 건설을 최우선 과제로 여겼다. 아일랜드, 필리핀, 베트남, 인도 등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를 받는 약소민족을 통찰했다. 아일랜드 내전을 통해 약소민족의 독립 과정에서 방법론 차이로 민족 내 갈등이 생길 수 있다는 것도 파악했다. 이여성은 해방 이후, 열강의 간섭과 민족 분열이 하나 된 국가 건설에 장애 요소라는 것을 깨닫고, 좌우합작운동에 매진했다. 하지만 세계의 격동을 거슬러 꽃피우지는 못했다.

미군정은 본격적으로 좌익 세력을 탄압했다. 이여성은 여운형 장례 사무를 도맡아 처리하려 했지만, 미군정은 장례식에도 개입했다. 이여성은 미군정의 좌익 탄압 정책으로 1947년 8월 12일 구속됐다.1

분단에 저항하다 투옥된 이여성은 통일 조국이라는 비운의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 그는 1948년 황해도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했다가 되돌아오지 않았다. 이여성이 이북으로 향한 이유는 오늘날 정확히 전해지지는 않는다. 남한은 좌익 탄압 속에 암살되는 이들이 있었고, 결국 이승만의 주도로 단독정부가 수립돼 ‘하나의 조국’이 좌절된 참혹한 상황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이여성은 이북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교수직을 맡았지만, 후일 김일성에게 숙청됐다. 그 결과 이여성의 이북 행적 또한 기록으로 남지 않았다. 이여성이 꿈꿨던 하나의 조국이란 꿈은 한적한 고서점 한켠에 먼지 쌓인 책처럼 작은 기록으로만 남았다. 오랜 세월 그 책을 다시 뒤져보는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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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이여성의 초상, (오른쪽) 이쾌대. 모두 이쾌대의 그림이다. [사진=국립현대미술관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브로슈어 촬영]

반세기가 흘러 1998년, 대구 중앙대로에는 훗날 부도로 사라진 제일서적이 성업 중이었다. 대구시민들의 대표적 약속장소인 이곳에 기대에 부푼 얼굴의 한 청년이 들어왔다. 이한용(당시 31세) 씨다. 오래 기다렸던 책이 발행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기다렸던 책은 <조선복식고>이다.

<조선복식고>를 기다린 이유는 월북작가 이쾌대(1913~1965) 때문이었다. 이한용 씨는 1995년, 대백프라자에서 열린 이쾌대 회고전에 들렀다가 받은 충격을 잊지 못했다. <군상>(1948년 作)은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거대한 화폭에 조선 민중의 생동감이 담겼다, 민중이 고통과 좌절을 딛고 격랑의 시대를 헤쳐나가는 듯한 모습은 전에 본 적이 없었다. 이중섭, 박수근의 작품에서 볼 수 없는 거대한 스케일 때문인지, 생동하는 힘이 느껴졌다. 이쾌대의 형이 바로 이여성이다.

▲이한용 씨가 소장 중인 조선복식고

역사, 문화, 미술 관련 서적과 자료를 수집하던 이한용은 <조선복식고>를 알아보는 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회갈색 빛으로 신라 시대 수렵도와 전통 의복이 그려진 <조선복식고> 표지에는 ‘주요 벽화 고분의 인물화를 통해 본 상대(上代) 복식의 변천사’라는 부제목이 달려 있다. 부제목 밑으로는 세로쓰기로 소박하게 저자의 이름이 적혔다. -이여성 지음-.

이쾌대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여성은 알지 못했다. 칠곡군 신리 웃갓마을이 고향인 이한용은 이쾌대가 살던 건물 일부를 매입해 살았던 인연이 있다. 이쾌대 일가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몰락했고, 일가가 살던 집은 흔적도 없이 해산됐다. 이한용 씨가 9살이 되던 해, 이 씨 가족은 그 집 중 일부를 매입했다. 성주 유촌 출신 양반이 먼저 매입한 이쾌대의 집을 나중에 이한용 씨 가족이 다시 매입했다. 이한용 씨 집에 찾아오는 마을 어른들은 이쾌대와 관련한 이야기를 풀곤 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여성을 알아볼 수 있게 됐다. 제일서적에서 이여성이 남긴 <조선복식고>를 손에 들었다. 1946년 최초 간행된 <조선복식고>는 98년, 재출판 됐다.

▲1936.2.15. 동아일보에 실린 이여성의 그림.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동아일보'

이한용은 집2으로 돌아와, 이여성이 남긴 책을 들여다봤다. 담담한 문체에 담긴 기록. <조선복식고>는 삼국시대부터의 복식사에 대한 방대한 연구가 담겨 있었다.3

이여성이 중국 복식과 구분되는 전통 복식사 연구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건조한 문장 사이에서 작은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문득 어린 시절 동네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집을 찾아오는 동네 어른들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오부잣집’, ‘월북’ 따위의 단어 몇 개가 떠올랐다. 이쾌대와 이여성은 창원 군수를 지냈던 이경옥의 아들이었다. 오부잣집이라고 부른 것은, 대궐 같은 집이 다섯 덩어리라서, 혹은 그 일가 남성 어른이 다섯 명이어서 그렇게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관직에 나간 선조가 여럿이기 때문인지, 오부잣집은 만석꾼으로 통했다. 개화사상을 일찍 접한 그 집안에는 테니스장, 운동장, 교회와 연못이 있었고, 한 골짝을 다 소유할 정도였다고 들었다.

▲충청남도 계룡시 금암동에 사는 이한용 씨를 만나러 갔다. 이 씨가 이여성의 '조선숫자연구'를 설명하고 있다.

<조선복식고>를 넘길 때 들었던 미약한 박동 소리는 이한용 씨를 끌어들였다. 한겨레신문사 문화기행 프로그램을 하던 한용 씨는 그날 이후, 이여성의 자취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쉽지 않았다. 이여성, 이쾌대가 모두 월북하고 나서 그 집안은 명맥이 끊어졌다. 6·25전쟁에서 최후 방어선을 구축했다는 자부심이 있는 칠곡에서, 월북 인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은 저명한 화가라지만, 이쾌대 또한 해금4이 얼마 되지 않던 시기였다. 대학 친구들도 아는 이가 없었다. 지역 출신 인물의 전시와 아카이빙을 위해 칠곡군청을 찾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호국의 고장에서 어떻게 월북작가 전시를 이야기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물며 월북한 정치인 이여성의 이름을 꺼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여성 연구에 어려움을 겪으며,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일부 성과는 있었다. 이여성에 관한 자료가 파편적으로나마 남아있었다. 전향하긴 했지만, 일본에서 잠시 사회주의 활동을 함께 했던 홍양명(洪陽明, 1906~?)이 남긴 글5에는 이여성의 인물됨이 나타나 있었다. 홍양명은 일본에서 이여성이 릿쿄대학 교복을 입고 일월회 대표로 연설에 나섰을 때 처음 만난 소감을 상세히 적었다.

“예술, 정치, 스포츠에 통달해 시대 감각에 예민한 조선에 잇서 가장 진보된 인테리의 하나라는 것을 누구나 수긍치 아니치 못할 것이다···그는 일개 쩌날리스트였으나 천박에 근(近)키 쉬운 신문기자 보담은 어데인지 무게 잇서보이고 무엇을 깁히 생각하고 잇는 듯한 과도기의 사회학도의 우울(憂鬱)한 면영(面影)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가 「허-」하고 파안(破顔)미소할 때에 그에게는 전에 업든 범속(凡俗)에서 세련된 외교적 응대풍(應對風)이 좀 가미된 듯한 불유쾌한 점이 잇섯다.···특히 그는 모든 점에서 한 그룹 또는 한 붕당(朋黨)에 잇서서 타인을 리-드할만한 존경과 통제적 수완을 가진 사람이라고 늣겨지엿다. 이러한 이군(李君)의 인상이 악평(惡評)하면 「야심가」(野心家)라고 될 수도 잇슬 것이다. 그러나 이군(李君_은 비열한 야심가는 아니다. 물론 일에 대한 야심은 가젓다 할 수 잇스나 그는 평론이나 해설이나 능히 일가(一家)를 일운 사람이다.”(홍양명, 쟁쟁한 당대 논객의 풍모 중 발췌)

연구를 이어가는 동안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 모친이 암투병을 했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한 한용 씨는 결국 집을 팔고 이사를 가야만 했다. 연구자를 만나고 자료도 뒤져, 웃갓마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로 살을 붙여 원고 한 편을 작성했다.

▲이여성의 가족들 [사진=책 이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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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호생에게 남긴 이여성의 편지
(이 글은 이여성과 관련한 직접적인 이야기를 활자 기록 외에는 마땅히 접할 수 없어, 역사적 상상력을 가미해서 쓴 것이다. 하지만 당장 어려운 사정에 빠져, 이 이야기를 따로 발간할 겨를이 없었다.)

내가 네 나이쯤 됐을 때, 나는 네 삼촌들 약수, 약산과 함께 만주에 있었다. 돌아가신 네 할아버지 몰래 땅을 판 자금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려고 했었지. 다시 생각해보면 네 할아버지도 모른 척 지지해 주셨던 것 같아. 우리 집안은 대대로 관직을 맡았지만, 일찍이 기독교를 접하며 개화사상을 받아들였단다. 나는 훗날 만주에서 말고도 여러 곳에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집안 재산을 썼어.

만주에서는 목표로 하던 일을 이루지는 못했어. 땅을 일궈 둔전을 하는 둔전병을 꾸릴 생각으로 약산에게 자금을 줬는데, 길림에서 그만 김좌진 선생에게 그 자금을 줘버린 거야. 그때 명고옥이라는 일본 여관에서 약산이 투숙하는데, 독립군에게 밀정이라고 의심을 받은 거지. 그런데 상황이 급작스럽게 바뀌었어. 삼일운동이 일어난 거야. 그때 우리는 조선의 정세를 지금처럼 치밀하게 알지는 못할 때였어. 우리는 무골의 기개로 조선독립에 역할 하고 싶었어. 우리는 논쟁 끝에 약산만 남고 귀국을 결정했어. 의견이 합해지지는 않았지. 약산은 무장투쟁을 고집했지만, 나와 약수는 지금 정세는 국내에서 대중을 기초로 일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어. 결국 우리는 약산은 북쪽을 지키고, 약수는 중앙을, 나는 남쪽을 지키자면서 헤어졌지.

귀국하자마자 나는 대구로 왔어. 계성학교와 신명여학교, 대구고보에 휴교령이 내려져 있었고 학생들의 원성이 대단했었단다. 나는 그때 여기서 수학하던 고향 친구 이영옥, 이수건, 이덕생이와 같이 혜성단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모색했어. 출판을 배포해 민심을 선동하고, 장기적으로는 만주 지방의 단체들과도 연락을 취하려고 했어. 만주에서 돌아온 나는 연락책을 맡았지. 국내의 고립된 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루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어. 우리는 근고동포(謹告同胞)라는 문건을 만들어 칠곡이나 대구에서 배포했고, 관공리들에게는 경고문을 보냈어. 그러다가 우리들은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어 버렸다. 나는 왜적의 법률 위반6으로 옥살이를 했어.

▲경북 칠곡군 웃갓마을, 이여성의 옛 집터가 남아 있는 곳.

출소하고 나서 나는 일본에 갔단다. 당시 국내에는 신사상을 수학할 곳이 마땅하지 않았어. 약수도 미리 일본에서 수학하며 사상운동을 하고 있었지. 이때부터 나는 지금껏 정처 없는 떠돌이처럼 돼 버렸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후회는 없다. 일본에서 네 어머니를 만났고, 그래서 너를 낳았다. 내가 모색한 모든 것이 실패했음에도 단 하나 성공한 일이 있다면 너를 낳은 것이다.

너희 어머니는 삼월회 회원이었어. 나는 일월회 활동을 했기 때문에 만날 기회가 많았지. 일월회는 내부 갈등도 많았지만, 운동 전선의 통일이 필요하다는 데에 뜻을 모아 사실상 다른 재일 동포 단체를 통솔하게 됐단다. 나는 그때부터 일본 경시청 요시찰인물이 됐어. 잠시 국내로 들어가 순회 강연회를 열었고 그때는 고향 대구에서 검거되는 일도 있었지. 1925년부터 일본 순사가 조선공산당 당원 검거를 시작하자 요시찰 인물인 나는 활동이 어려웠어. 그래서 먼저 상해로 건너갔고, 네 어머니는 이태리 유학을 가고 싶어 고민하다가 결국 상해로 따라왔단다. 우리는 상해에 아바트멘트를 얻고 피신했다.

그때는 온 세계가 혈전에 몰두했단다. 중국은 내전 중이었는데, 국민당 편의대가 패주하면서 우리 아바트멘트까지 검은 피가 흘렀어.7 작정 없는 탄환에 시민들도 즉사했다. 나는 상해 북부정류장에 갔다가 급히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공포에 빠진 네 어미가 보였다. 팔을 잡아채서 달음박질을 쳤다. 인도 병사를 앞세운 영국군도 보였어. 제국주의의 민얼굴을 이때 보았단다. 약소민족의 독립으로 이 비극에서 탈출해야 해. 약소민족의 반제국주의 운동은 세계적 혁명에 중요한 요소이니, 그 중요성은 국내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질 바 없는 것이야.

상해에서 고초만 겪은 것은 아니야. 고난 속에서도 환희는 있단다. 네 어미는 상해에서도 노래 공부에 열심이었는데, 상해 제일가는 칼톤 캅페에서 노래를 불렀을 때가 기억난다. 중세기 불란서 여자의 복색처럼 허리를 잘눅하게 묶고는 머리에 관을 썼었다. 무대 정면 문을 열고 들어온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낙심한 사람의 얼굴이었어. 실연(失戀)이라는 곡목에 맞게 애조를 띤 목소리에, 그만 이국의 정조와 향수에 잠겼었지. 네 어미는 사실 계집애 한 명을 낳았었단다. 그 애를 낳았을 때 울음소리 몇 번을 못 내고 그만 죽고 말았어. 나는 바깥에 나가 담요를 하나 사서 어린 송장을 꽁꽁 묶었고, 침대 아래에 두고 우리는 침대 위에서 울면서 날을 보냈단다. 그 아픈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래서 너를 더욱 애틋이 길렀단다. 네 어미가 건강이 점점 나빠져 1928년 귀국하고 나서, 호생이 너를 낳았어. 너는 유달리 양식거리를 가렸단다. 젖이 부족해 미국제 젖 가루를 주니 먹지 않았어. 남의 젖도 먹지 않고 꼭 어미젖만 찾는 통에 어미가 애를 많이 썼었다. 그 덕인지 너는 유행 감기에도 빠졌고 앓지를 않았어.

귀국을 결심할 때 나는 나대로 피신을 끝내고 국내에서도 활동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북경에서 약산에게 국내 정세를 전해 들었거든. 다시 들어와서는 쩌날리스트로 활동했단다. 이때 일본에서 만났던 홍양명이라는 사람과 재회했는데, 그는 나더러 쩌날리스트 보다는 사회학자 같은 면모로, 어딘가 우울해 보였다고 하더라. 실제 나는 주로 평론과 사설을 썼지. 조선 독립에 참고할 수 있는 약소민족 연구에 몰두했고, 신문에 발표했어. 해방 이후를 바라보며 우수한 조선 민족의 문화를 학술적으로 정리하는 일도 했어. 식민 지배를 받는 조선에서 기자 생활 또한 순탄치는 않았다.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나는 1936년 동아일보를 나가야 했어.

▲1945년 해방 후 건국동맹회의, 서울YMCA [사진=몽양기념사업회]

그 후 나는 여운형 선생과 함께 회합해 정치운동가가 됐다. 그와 나는 뜻이 맞았어. 어떤 이념을 고집하기보다 상황과 정세에 맡게 판단하려고 했어. 사회주의를 따랐지만,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분단을 면하는 것이었다.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보이는데 조선인들은 저마다의 속내로 합심하지 못했지. 각인각파의 대동단결이 절실했다. 우리는 이승만 박사가 귀국할 때도 환영했고 조선공산당의 박헌영도 포용해서 좌우합작을 하려고 했어. 그 길만이 통일 조국을 건설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여운형 선생은 결국 동포의 손에 죽임을 당했어. 참담하더구나! 나는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도 못하고 또다시 옥살이를 해야 했어. 미소공동위원회가 마무리되지도 않았는데, 미소 양국은 결국 분단의 길을 택했구나.

호생아.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남지 않았다. 출옥하고 나서 제대로 이야기도 하지 못했구나. 그렇지만 나는 얼마간은 북쪽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해보려고 한다. 아주 못 보지는 않을 것이다. 너를 낳고도 나는 바깥으로만 돌았구나. 하지만 네가 살아갈 나라가 서로 분단돼 반목하는 나라이길 바라지 않는다. 북조선에는 조만간 남북연석회의가 열릴 것이다. 남조선의 단독정부 수립 추세는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인 것 같아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려 한다. 다시 만날 것이다. 우선은 급히 너에게만 편지를 남긴다.

-1948, 청정(靑汀) 이여성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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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성명의 반향 강권발동이 적절", 동아일보, 1945.12.13
"인민공화국존재는 조선독립달성을 방해", 동아일보, 1945.12.13
"선거법회부직시공포 민의의입법부창설", 동아일보, 1947.8.14
"좌익요인검거는 치안교란의 혐의", 동아일보, 1947.8.14
"유명인 죽음 마케팅 '사의찬미' 대성공 두려웠던 日이 발표한 노래는?", 김문성 국악평론가, 동아일보, 2018.2.8

#도움
신용균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최재성 성균관대학교 연구교수
이중희 계명대학교 명예교수
김윤오 칠곡문화원장
이한용 느티나무 헌책방(바우북) 대표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강성희 칠곡군 신리 웃갓마을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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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4일 "좌익요인검거는 치안교란 혐의"라는 제목의 <동아일보> 기사에는, 1946년 정판사위폐사건을 지휘하며 좌파 근절에 나섰던 이인 검찰총장의 담화문이 나온다. 그는 담화를 통해 "현 질서를 파괴하고 치안을 교란케 한 혐의로 좌익계열의 정당단체 간부를 대량 검거해 취조 중이며, 엄정한 처단이 있을 것"이라며 "당국은 물 샐 틈 없는 경비태세를 갖추고 있으니 8·15기념일을 마음껏 기뻐하라"라고 밝혔다. 같은 날 신문 1면 머리기사는 미군정이 이승만, 김구와의 면담자리에서 남측의 단독선거와 관련한 선거법 공포 지연을 우려했다는 내용이었다.
  2. 이한용 씨 가족은 이여성이 살던 집의 일부를 매입해 칠곡군 지천면 신리 223번지로 옮겨왔다.
  3.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 패망을 예측한 이여성은 해방된 공간에서 조선의 역사와 문화의 우수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그는 <조선복식고>를 발간하기 전에도, 일제의 식민사관에 반박할 수 있는 실증 자료로 <숫자조선연구>를 연재했다.
  4. 이쾌대에 대한 해금은 1988년 이뤄졌다.
  5. 錚錚한 當代 論客의 風貌, <삼천리> 4권 8호. 1932. 8. 1.
  6. 대정8년 조선총독부 제령 제7호, 출판법 위반죄
  7. 중국 군벌과 장개석의 북벌군과의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