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허은] (2) 서간도 바람소리가 남긴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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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운명은 1907년부터 시작됐다. 정월 초사흘이었다.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 269번지 외조부 허발의 집은 어수선했다. 셋째 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을 ‘은’이라 지었다. 새해를 맞자마자 보는 경사였지만, 마냥 기뻐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해 7월 일제는 네덜란드 헤이그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일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퇴위 시켰다. 8월에는 군대마저 해산해버렸다. 야금야금 조선을 침탈해오던 일제는 이 무렵 그 야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임은 허 씨들이 정주했던 임은마을 일대, 지금은 왕산허위선생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딸 아이 얻은 기쁨보다 어떻게 하면 조국을 지킬 수 있는가에 외가 어른들은 더 골몰했다. 외가 어른 허위는 그해 8월 경기도 연천에서 창의했다. 몇 번째 창의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어른은 의병 항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동생 허겸, 아들 허학이 함께했다. 외증조부 허형도 적극적이었다. 허겸과 을사오적을 처단하는 일에 연루돼 옥살이를 했다. 외조부 역시 여러 차례 허위의 창의에 가담한 바 있었다.

허위는 1908년 전국 팔도에서 모인 창의군(13도창의군) 군사장으로 이른바 서울침공작전에 나섰다. 용맹한 전사 300명을 이끌고 도성 동대문에서 30리 떨어진 곳까지 진격했지만, 원군의 지원을 받지 못해 패퇴했다. 허위는 그해 5월 경기도 연천에서 일본 헌병의 습격을 받아 체포됐고, 10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집 안팎으로 그들 가족을 지켜보는 시선은 날로 날카로워졌다. 외조부가 딸을 얻고 2년 만인 1909년 5월에야 호적에 올린 것도 그런 탓이 컸다.

“내가 태어난 곳은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이고, 지금은 구미시에 편입되어 도시가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 그곳은 그림 같았다. 멀리로는 낙동강이 흘러가고 갯발에는 갈숲이 무성했다. 바람이 부는 날엔 온통 은빛 갈대가 꼭 춤추는 것 같았다”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p20)

어린 허은 눈에 그림 같았던 마을은 허위의 죽음 이후 살얼음판 위를 걷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일가가 모여 살던 마을에 빈집이 늘어났다. 더러는 일경에 잡혀갔고, 더러는 피신했다. 단순히 몸을 피하는 수준을 넘어서 국경을 건넜다. 이역만리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희망적이었다. 압록강만 넘어서면 기름지고 광활한 신천지가 펼쳐져 있고, 빼앗긴 조국을 되찾으려 힘을 기르는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강을 넘어 들려왔다.

외조부도 국경을 넘을 결심을 했다. 외조부 역시 1915년 일경에 끌려가 한 달 여 고생을 하기도 했다. 더는 고향땅에서 뜻을 지키며 목숨을 부지하기 쉽지 않아 보였다. 외조부는 그해 음력 3월 온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떠났다. 허은의 나이 여덟 살 때다. 어린 허은은 처음 타보는 기차와 처음 먹어보는 ‘오화당’을 입 안 가득 물고 해맑았다.

나라 잃은 타국 생활이 순탄할리 없었다. 막상 도착한 희망의 땅은 소문과는 달랐다. 신천지는 광활했지만, 남의 나라, 남의 땅이었다. 생활 풍습도 달랐다. 그곳 사람들은 쌀을 주식으로 하지 않은 탓에 벼농사를 지으려면 직접 개간을 해야 했다. 중국인 지주에게 황무지를 빌려 개간했다. 만주의 벼농사는 우리 민족의 손에서부터 비롯된 셈이다. 일흔을 넘긴 외증조부만 제외하면 남녀노소 온 가족이 농삿일에 뛰어들었다. 어린 허은도 소몰이가 서툰 아버지를 도와 소고삐 잡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외조부는 틈틈이 조선을 오가며 동지들을 만나고, 군자금을 전하고,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외조부뿐 아니라 집안 남자들은 바깥일에 전념하는 일이 잦았다. 덕분에 구들장 데울 땔감 구하는 일도 집안 여자들이 도맡았다. 며느리, 딸들은 땔감으로 쓸 짚을 얻으러 동네를 돌아다녔다. 기껏 얻어온 짚은 차가운 만주 땅에서 얼어붙어 있기 일쑤였다. 얼음덩이를 떼어내고 말리는 것 역시 며느리, 딸들의 몫이었다.

1910년대 만주로 건너간 허은 또래 여성들은 교육의 세례도 받기 힘들었다. 허은만 해도 보수적인 외증조부 탓에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외숙부 허채만 신흥무관학교를 다녔다. 외증조부는 작은외숙부 허현도 농사 일손이 부족하단 이유로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허은은 신흥무관학교를 다닌 큰오빠가 군사훈련 받은 이야길 해주는 걸 좋아했다. “나는 오빠의 이야기들이 너무 재미있었고 많이 부럽기도 했다. 계집애는 글 배우면 못 쓴다고 해서 나는 학교 가고 싶다는 말도 감히 꺼낼 수 없었다”고 허은은 말했다.

이 무렵 만주로 건너간 여성들의 삶이 대개 이러했다. “압록강을 건너는 순간 여성들 앞에는 삼중의 무거운 과제가 놓여 있었다. 만주망명 1~2세대 여성들은 개인의 삶을 넘어 조국광복을 위한 기반 마련에 자신을 바쳐야 했다. 또한 시시각각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생활 현장에서 가족들의 호구지책을 마련하는 것도 큰 과제였다” 강윤정 학예연구부장은 <만주로 간 경북 여성들>에서 이렇게 썼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허은을 포함한 고성 이씨 집안으로 시집간 여성들이다.

▲강윤정 전 경북독립운동기념관 학예부장

열여섯 나이에 고성 이씨 집안으로 시집간 허은의 ‘시집살이’이란 것은 비단 가족들의 호구지책을 마련하는 것에서 머물지 않았다. 증조부 이상룡이 서로군정서의 독판(대표)이었던 탓에 그의 집은 군정서 본부가 됐다. 수시로 찾아오는 독립지사들의 아침·저녁상을 차려내는 것도 허은의 ‘시집살이’였다. 조직원들이 입을 의복을 지어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시집가자마자 맞닥뜨린 기막힌 ‘시집살이’로, 이듬해에는 부엌에서 혼절해버렸다.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다.

이항증은 “여자들은 사실상, 우리 할머니들, 증조할머니를 보면 과거에 밥 해먹을 때 근무시간이 없어. 새벽에 날만 밝으면 그때 일어나서 들에 나가 일하고 애 키우고 밥 해 먹고 뭐, 온갖 일을 다 했는데 남는 건 하나도 없었어”라고 말했다. 그 말처럼 여자들의 삶은 남지 않았다. 그저 남자들의 명예 옆에 서 있었다. 국가는 1962년 증조부의 이름에 가장 먼저 명예를 부여했고, 1990년 조부와 아버지에게도 명예를 줬다. 고성 이씨 집안의 남자들, 이상동, 이봉희, 이승화,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의 이름도 1990년에 함께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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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의 명예가 서는 사이 여자의 이름은 잊혀져 갔다.

“지금 떠오르는 여성 독립운동가를 말씀해주세요”
“사실 본명은 잘 모르겠어요. 최근에 ‘밀정’에 나온 연계순 그분이 떠오르는 것 같아요”

첫 번째 응답자의 답을 시작으로 20대 여성 4명이 알고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최근에 본 ‘항거, 유관순 이야기’가 인상 깊어서 유관순 열사”, “저도 본명은 모르겠고, 영화 ‘암살’에 안옥윤 모델이 된 남···”, “저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유관순이구요. 우리나라 여성은 아니지만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영화 ‘박열’에 나왔던 후미코” 4명이 각 1명씩 이름을 말하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더 있을까요?” 물음에 두 여성은 “아니요”라고 답했다. 또 다른 여성은 누군가를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이름은 모르겠고, 권···. 성만 아는데, 여성 파일럿이셨던 분이요” 하지만 끝내 이름까지 떠올리는덴 실패했다. “또 있어요?” 재차 재촉했을 때 그때까지 답하지 않았던 마지막 여성도 “없어요”라고 말했다.

7월 18일 저녁 대구 중구 동성로에서 모인 20대 여성 4명에게 “지금 떠오르는 여성 독립운동가”를 말해달라고 했다. 이들은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거나 기자 또는 PD를 준비하거나, 여성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하고 있었다. 여성에 대한 인식이나 역사 지식이 적지 않은 이들이었지만, 갑작스런 질문엔 속수무책이었다. 반면 남자 독립운동가를 말해달라는 물음에 윤봉길, 김구, 김좌진, 김원봉, 이봉창, 이상설, 서상돈, 박열까지 더 많은 이름을 말했다.

▲뉴스민은 7월 18일 저녁 대구 중구 동성로 모처에서 20대 여성 4명과 집담회를 열었다.

왜? 이유는 모두 알고 있다. 역사학을 전공했던 최지혜(27)는 “남자가 독립운동을 하면, 이 사람이 가정을 가지고 있으면 여자도 같이 내조를 하게 되잖아요. 이 사람(여성)도 저는 하나의 독립운동에 일조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결론적으로 서훈을 받는 사람은 남자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저희가 기억하고 있는 것도 대부분 남자가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2019년 현재 독립유공자 포상자 1만 5,689명. 그중 여성 444명이란 수치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여성단체 활동가 현유림(23)은 “남성중심으로 역사가 쓰여져 있다보니까, 여성독립운동가가 없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곳곳에 많았는데, 그 이름들이 지워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말했다. 언론인을 지망하는 이기쁨(27)도 “같은 맥락에서 키워낸 사람이라고 이야길 했잖아요. 독립운동가 어머니라고 기억되고, 그 사람의 이름으로 기억되지 않고. 지워졌다고 하는데 그 표현이 맞다고 생각해요”라고 동감했다.

또 다른 언론인 지망생 박하경(28)은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방향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잖아요. 이때까지 조명한 게 적극적이고 폭탄을 터뜨려야하고 이런 쪽으로만 너무 치우쳐서 독립운동을 해석했던 게 아닌가하고 생각이 들어요. 사실 여성적으로 여성이 할 수 있는,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었을텐데 우리는 여태껏 그게 독립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게 아닌가. 독립운동가를 키워내기 위해서는 어떤 여성의 희생이 분명히 따랐을텐데, 그건 독립운동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 그런 것도 중요한 거 같아요”라고 말했다.

현재까지 독립운동으로 포상을 받은 여성 444명의 면면을 보면 독립운동을 특정하게 규정하고 해석했다는 하경의 견해도 틀린 것이 없다. 444명 중 216명(48.6%)은 3.1운동 같은 직접적인 행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이들이다. 그외에도 다수는 임시정부나 대한애국부인회 등 독립운동 단체에서 간부를 맡거나 하는 경력이 있다. 허은처럼 특별한 감투 없이 독립지사를 후방에서 지원한 이가 포상을 받은 경우는 손에 꼽는다.

김희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은 그런 점에서 2018년 허은을 포상한 것이 전환점이 될 거라고 짚었다. “만주 지역 독립운동 바탕은 여성들이에요. 왜냐하면 새로운 세대를 공급하잖아요. 가정을 유지하고 농사를 지어야 해요. 아이를 길러야 하고 학교를 유지해야 하죠. 대부분 여성의 텃밭 위에 독립운동이 존재해요. 그런데 이분들은 직책이 없어요. ‘남편을 따라가서 밥하고 아이를 기르고 이렇게 했다’ 이렇게 공적조서를 쓸 수 없는 거죠. 그래서 발굴이 어려운 거예요. 그런 면에서 허은 여사를 작년에 포상한 건 상당한 전환점이에요”

2018년 8월이 전환점이 된 건 확실했다. 정부는 이듬해 3월 1일, 이상룡의 부인 김우락도 독립유공자로 포상했다. 안동문화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는 이항증의 여동생이 참석해 증조모를 대신해 훈장을 받았다. 고성 이씨 이상룡, 이준형, 이병화의 아내 중 이제 김우락, 허은은 온전히 자기 이름으로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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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 이상룡이 서거한 중국 길림성 서란현 소과전자촌

일군의 무리가 어른 키만큼 자란 옥수수 밭에 서서 묵념을 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훤칠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만주 길림성 소과전자, 사람들을 안내하는 허영길 연변대학교 박물관 교수는 “예전에 갯벌이고 양조장이 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지역 내력을 설명했다.

허은은 1932년 이곳에서 17년가량 되던 만주 생활을 마무리했다. 시조부 이상룡은 한 해 앞선 가을, 아끼는 동지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력을 잃었다. 식음을 전폐하다 싶히 하더니 이곳에서 죽었다. 나중에야 그의 기력을 앗아간 소식이 헛소문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가족들은 이상룡의 유해와 함께 환국을 시도했지만 일본군에 패퇴한 후 마적이 되어버린 만주 군인들에 막혔다.

이상룡은 생전에 “내 간 후라도 한국땅이 되기 전에는 유해를 고향으로 가져가지 말라. 어느 때라도 광복 성공이 되거든 유지에나마 싸다 조상 발치에 묻어라”고 말했다. 허은은 어른이 생전에 한 말을 지키려는가보다 했다. 가족들은 이상룡의 유해를 소과전자 양지바른 언덕 위에 묻고 소나무를 심었다.

유해는 조국을 되찾고도 4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1990년 9월 25일 중국에서 돌아온 이상룡의 유해가 안동 임청각에 안치됐다. 그날 하루에만 600여 명 가까운 참배객이 임청각을 찾았다. 허은은 상복을 갖춰 입고 참배객들을 맞았다. 상복을 입었지만 얼굴 가득 미소가 가득했다. 이보다 다섯 달 앞선 4월엔 남편과 시댁 어른들이 국가로부터 훈장도 받았다. 임청각의 종부, 이상룡의 시며느리로서 마지막 임무가 그렇게 끝났다.

“지금도 귓가를 스치는 서간도 벌판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지나온 구십 평생 되돌아봐도 여한은 없다. 그저 하루하루 연명한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고달픈 발자국이었긴 하나 큰일하신 어른들 생각하면 오히려 부끄러울 뿐이다” 1995년 5월 허은.

#참고문헌
강윤정, 『만주로 간 경북 여성들』, 한국국학진흥원, 2018.
이준형, 『동구선생문집上』, 국무령이상룡기념사업회, 2016.
허은 구술, 변창애 기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정우사, 1995.
김희곤, 「이준형의 독립운동과 임청각의 수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63』, 2018.
김희곤, 「석주 이상룡의 독립운동과 사상」, 『내일을 여는 역사 69』, 2017.
이명영, 「국운과 인간운명에 관한 사례연구」, 『사회과학 26』, 1986.
조선희, ‘일제하 무장 항일운동의 상징, 이상룡’, <한겨레>, 1990.10.5
‘평화가 경제다, 제73주년 광복절 경축식 : 문재인 대통령 경축사 전문 풀영상’, <KTV>, 2018.8.15

#도움
강윤정 전)경북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안동대 사학과 교수)
김희곤 경북독립운동기념관 관장
이항증 (사)국무령이상룡기념사업회 상임이사
박하경, 이기쁨, 현유림, 최지혜(20대 여성 집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