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먹칠] 당신은 더이상 나를 때릴 수 없다 / 이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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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8 09:54 | 최종 업데이트 2019-10-18 09:54

“당신의 시선이 나의 뺨을 때린다(Your gaze hits the side of my face).” 무표정한 여성 흉상의 왼쪽 모서리에 7개의 낱말이 배치되어 있다. 바바라 크루거는 이 작품을 1980년대 초에 발표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에 담긴 그릇된 욕망을 비판했다. 여성을 소유물로 여기는 남성의 시선은 여성의 외모, 몸매, 화장, 옷 등에 대한 평가와 통제로 이어진다. 이러한 시선의 폭력은 크루거가 작품을 발표한 지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관습적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폭력을 행하는 이들은 그것을 폭력으로 인지하지 않았다. 피해자는 그 폭력에 결코 익숙해질 수 없었으나, 말하지 못했다. 어쩌다 입을 열면 예민하다고, 불편한 것도 많다고, 이래서 여자는 안된다고, 더 큰 폭력이 돌아오곤 했다. 혹은 농담으로 포장해 가해지는 폭력에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어 말을 잃기도 했다.

▲바바라 크루거의 '당신의 시선이 나의 뺨을 때린다(Your gaze hits the side of my face)'

폭력을 애써 견뎌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자신만의 언어로, 또 행동으로 증명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수많은 종류의 폭력을 적극적으로 거부했다. 대중이 그에게 요구하는 ‘어린 여성 연예인’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배신했으며, 자신의 욕망에는 이유가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하나의 액세서리로서 브래지어를 착용하고 때로는 벗기도 했다. ‘girls supporting girls(여자는 여자가 돕는다)’ 티셔츠를 입은 채 연대의 중심에 섰으며, 상대를 선배 대신 ‘씨’라고 호칭하며 우리 사회에 깊게 박힌 위계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는 늘 당당했으며, 남들보다 앞서갔다. 설리는 그래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나는 그의 다음 행보가 궁금했다. 그가 30대가 되었을 때는 어떤 행동으로 나에게 울림을 줄지, 오랜 시간이 흘러 할머니가 되었을 때는 우리 사회에 또 어떤 질문을 던질지 궁금했다. 그의 죽음 앞에서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큰 슬픔에 빠졌다. 특히 그와 비슷한 세대를 살아온 2~30대 여성은 슬픔을 넘어선 감정을 느끼고 있다. 설리에게 가해졌던, 공개 연애 후에 따르는 성희롱, 가벼운 옷차림 위로 끈질기게 달라붙는 시선 같은 비난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받아본 종류의 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고통의 결이 어떤 것일지 상상할 수 있었다. 설리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여성들의 입장은 필연적으로 남성들과는 조금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 설리를 향한 추모 속에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여있다. 고통 속에 있었을 설리를 좀 더 적극적으로 응원하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자신의 영향력을 인지하고 앞서서 싸워준 것에 대한 고마움 말이다. 이러한 감정들을 분노의 동력으로 삼아, 지금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여성 연예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떠한가. 왜 혐오 발언을 한 가해자는 호명되지 않고, 피해자의 신체만 대상화해 재생산하는가. 더 나아가 바바라 크루거의 표현을 빌려와 ‘당신’은 왜 내 뺨을 때리고도 사과하지 않는가와 같은 질문 말이다.

지난 10월 15일 유튜브 채널 ‘유시민의 알릴레오’의 라이브 방송은 ‘당신’들이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날 방송에 출연한 장용진 기자는 타사 여기자의 실명을 언급한 뒤, 그의 취재능력을 폄훼하는 발언을 했다. ‘기자를 좋아하는 검사들이 많아 많이들 흘렸다’라거나 ‘검사들이 다른 마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고.’라는 발언에서, 그가 타사 기자를 ‘기자’가 아닌 ‘여자’로 대상화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이에 시청자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사석에서 많이 하는 이야기’라고 해명한 뒤, ‘의도하지 않았지만 불편함을 드렸다면 사과드리겠다’고 말했다.

여성을 향한 성적 대상화가 ‘사석’에서 만연하다는 것을 생방송 카메라 앞에서 당당히 밝힌 장 기자의 사례처럼, 폭력적 시선을 던지는 이들은 수없이 많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끄러움을 모른다. 혐오를 혐오로 인지하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내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불편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임을 모르고, 어떤 이들은 알면서도 외면한다. ‘의도하지 않음’이라는 문장은 또 어떤가. 이 문장은, 아무리 유튜브라 하더라도, 방송에서 행하는 자신의 공적인 발언이 여성에게 가 입힐 피해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의 고통은 늘 사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항상 우선순위에서 배제된다. 무지를 앞세움에 당당하고, 부끄러움에 무감한 사회에 산다. 카메라 앞에 서 있던 설리와 카메라가 꺼진 일상 속 여성들은 그래서 닮아있다. 지금의 슬픔을 질문으로 바꿔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사실 글을 쓰기가 조심스러웠다. 말을 보태지 않는 것이 끊임없이 대중의 시선으로 재단됐던 고인에게 표하는 마지막 예의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글을 쓰지 않으면 기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싸워왔는지, 내가 어떻게 그를 기억해야 하는지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막기 위해선,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혐오 발언을 일삼는 이들의 이름을 부르고, 당신이 틀렸다고 외쳐야 한다. 나의 뺨을 때리는 당신의 시선을 마주 보는 용기를 잃지 말고, 연대의 힘을 믿자. 그러면 ‘당신’의 시선은, ‘당신’의 발언은, ‘당신’의 무지함은 더이상 ‘나’들을 때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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