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먹칠] 정시는 진짜 정의로운가 / 김자현

09:48

정시 확대는 정말 ‘교육 불공정’을 타개할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지난 22일 문재인 대통령은 국회에서 2020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했다. 문 대통령은 국민이 가장 가슴 아파하는 것이 교육에서의 불공정이라며, 학생부 종합전형(학종) 전면 실태조사를 추진하고 고교서열화 해소를 위한 방안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정시 비중 상향을 포함한 입시제도 개편안을 마련하겠다고 언급했다. 그간 ‘더 이상의 정시 확대는 없다’고 확언한 교육부의 태도와 상충하는 모양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2일 2020년 예산안 국회 시정연설에 나서서 대입 정시 비중을 높이겠다고 밝혔다. (사진=청와대)

갑작스레 ‘정시 확대’를 들고나온 배경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난 두 달간 학종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의 입시 비리 의혹과 맞물려 뭇매를 맞았다. 학생의 성적 외 종합적 성취를 평가한다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부모의 사회적 지위·재력·정보에 따라 명문대 합격의 당락이 좌우된다는 냉소가 우리 사회에 빠르게 퍼졌다. 학종은 결국 ‘금수저 전형’일 뿐이라는 회의의 대상이 됐다. 결국 가장 공정한 것은 그나마 ‘줄세우기식 시험’뿐이라는 여론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개천 용’이 말라 죽어가고 있는 사회다. 시험을 통한 줄 세우기를 복권하면 계층 간 이동이 활발해질 것이라는 계산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게 정시는 그다지 탐탁지 않지만 그나마 ‘정의로운’ 방법으로 다시 언급되기 시작했다.

‘개천 용’의 복권이라는 부분 때문에 요새 정시 확대는 자꾸만 ‘공평하고 정의로운’ 일처럼 여겨진다. 학종과 수시가 마냥 불평등을 조장하는 악이 아니듯, 수능 역시 최소한의 공평과 정의를 담보하는 수단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지금은 학종이 마치 가진 자들의 특권이라 부도덕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한때 수시와 정시 사이에는 신라시대 성골과 6두품만큼의 거대한 골이 존재했다. 2013년 즈음 기회균등전형, 지역균형선발전형을 통해 대학에 들어 온 학생들을 ‘기균충’, ‘지균충’이라며 조롱했던 것을 기억해보라. 그때만 해도 ‘수능’이라는 체제에 과몰입해서 모든 것을 점수화·서열화하는 것에 대한 자성과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수능에 투신하지 못해도 학생들의 가능성을 보기 위해서 나온 것이 학종임을 생각해볼 때, 교육정상화의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정시로의 회귀라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요컨대, 수능은 이미 한 번 실패한 체제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수능에 목을 맨다. 정시 확대가 그나마 정의로운 방법이란 생각은, 어떻게든 좋은 대학·좋은 직업으로 가는 ‘선명한 길’을 확보하고자 하는 계산을 바탕에 둔다. 학종은 이미 학생의 손을 떠났다는 생각, 학생이 고군분투해 좋은 대학에 가려면 결국 시험이 최고라는 생각이 기저에 존재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수시가 더 비싸다고 여기는 것이다. 불확실하고 모호한 수시가, 없는 사람에게 더 불리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불확실하고 모호한 수시는 확실하고 서열화된 수능보다 과연 없는 사람에게 불리할까? 그렇다면 계층이 상층일수록 학종을 위시로한 수시를 선호하고, 하층일수록 수능을 위시로 한 정시를 더 선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배제의 법칙으로서의 입시제도’라는 논문에 따르면 계층의식이 상층일수록 정시전형을 선호했지만, 교육제도에 대한 신뢰 정도가 높을수록 학종을 선호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계급의 상층은 어디서나 방법을 찾을 것이다. 심지어 정시 확대의 시장에서는 그 방법을 더 쉽게 찾을 것이다. 폭발하는 사교육으로, 출제된 모의 수능 시험지마저 빼돌리는 ‘일타 강사’의 모습으로 우리는 이미 그 면면을 경험해봤다.

학종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것이 말 그대로 모호하고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학생부는 학생이 생활하고 교사가 관찰해 기록하는 시스템이다. 교사는 학생에게 꾸준하게 관심을 가지고 학생의 장점과 재능을 발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학생은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학사 내외 일정을 통해 이를 개발하는 것이 학생부의 궁극적인 목적일 것이다. 하지만 교원 평가에 여전히 ‘명문대학 진학’이 포함되고, 교육 정책의 변화로 교과 지도는커녕 쏟아지는 행정업무에 질식하는 마당에 한 번에 15~20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을 모두 신경 쓰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일부 가능성 있는 학생에게 ‘학생부 몰아주기’가 발생하는 이유다.

입시 일정과 면접을 담당하는 대학도 마찬가지다. 유수의 대학들이 학종으로 2천 명 이상의 인원을 선발하는데, 제한된 교원이 학사 일정에 맞춰 학종으로 들어온 학생들의 면면을 꼼꼼히 살피기란 역시 힘든 일이다. 그러니 눈에 띄는, 더 특이한 경력을 넣는데 학부모와 학생들이 집착하는 것이다. 도입 취지만 좋았고 이를 뒷받침할 물리적 지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특이한 수준으로 대처할 수 없는 대다수 학부모와 학생들이 모호함과 불확실성 앞에 무릎을 꿇게 됐다. 정시를 확대해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입시 제도의 실패가 곧 교육 제도의 실패는 아니다. 하지만 입시 제도만 다루는 교육 제도는 실패한 것이다. 공평한 교육과 교육 정상화라는 구호를 다시 생각해볼 때다. 결국 정시와 수시 모두 ‘좋은 대학’에 누군가를 얼마나 집어넣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공평한 교육의 목적은 ‘좋은 대학’에 보낼 기회를 공평하게 만드는 것일까? 고교서열화의 뒤에는 대학서열화의 문제가 있다. 대학서열화 뒤에는 특권적 존재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사회의 모습이 존재한다. 많이 무너졌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학벌은 여전히 계층 이동을 가능하게 하고 특권을 선점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수행한다.

학벌을 통한 계층 이동이 나쁜가? 계층 이동은 자유로워야 하지만 굴러떨어지는 ‘하층’이 지옥이면 곤란하다. 하늘로 솟아오르는 용이 특권과 면책을 독점하는 존재여서도 곤란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그런 존재쯤 되어야 사람다운 삶을 보장받고, 중산층 이하의 삶은 생존을 위한 전쟁터가 되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교육 제도의 뒤에는 사회와 경제의 불합리가 떡 하니 버티고 있다. 그리고 ‘대학’을 통해서 이를 개인적으로 극복해보라는 추동이 있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교육은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 2019년, 우리는 다시 ‘입시 제도’의 실패 앞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