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철의 멋진 신세계?] 노동보다 AI가 더 존중받는 사회

13:46

문재인 정부는 출범 당시 ‘노동 존중 사회’를 표방했다. 문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인천국제공항공사를 방문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선언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2020년 1만 원을 목표로, 취임 첫해 최저시급 16.4%를 올렸다. 주 52시간 상한 노동시간 단축도 시행했다. 청년노동자 김용균의 희생으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만들어졌다. 언뜻 보면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라고 착각할 만하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지난 4월, 참여연대와 서울신문이 공동으로 기획한 <문재인 정부 2년, 국정과제평가>에서 문재인 정부의 노동 분야 국정 수행은 이미 낙제점을 받았다. 이 평가에서, 대선 공약과 출범 초기에 비해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은 심각하게 퇴행한 것으로 분석됐다. ‘노동 존중 사회’의 핵심 사안으로 제시한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노동조합 설립의 자유, 단체교섭권, 강제노동 금지와 같은 노동자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핵심협약 비준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마땅히 정부 차원에서 주도해야 할 비준을 자본가 측도 참여한 경제사회노동위원회 합의에 맡길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탄력근로제 도입으로 주 52시간으로 단축한 노동시간 개정 효과는 무력화되었다. 올해 2월에는 탄력근로제가 최장 3개월에서 6개월로 연장되어 노동시간 유연성을 확대한 개악이 이루어졌다. 연속노동과 집중노동이 실질적으로 가능해져 ‘주 52시간 근무제’는 의미를 잃었다. 김용균법으로 노동 현장의 안전보건 조치 의무는 강화되었지만 하위법령에서 대상 범위를 지나치게 한정해 적용함으로써 법의 실효성을 의심케 했다. 김용균법이 김용균을 보호하지 못하는 모순에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최저임금 산입 범위 확대로 실질 임금인상 효과가 축소되었고 급기야 대통령은 임기 3년을 목표로 진행된 최저임금 1만 원 공약을 달성할 수 없다는 대국민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다.

▲구미역 앞 광장에 설치되었던 故 김용균 씨 추모 시민분향소. (뉴스민 자료사진)

‘노동 존중’이 아닌 ‘노동 경시’ 사회

겉으로 내세운 것과는 달리 문재인 정부가 노동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하나씩 열거하기도 벅차다. 하지만 가시적인 정책이나 통계로 나타나지 않은 노동에 대한 인식과 태도는 더 심각하다.

법무부 장관 임명을 두고 온 나라가 들썩일 때, 대법원은 톨게이트 요금 수납원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지난 6월 자회사를 통한 간접고용에 동의하지 않는 톨게이트 수납 노동자 1,500명을 집단해고한 도로공사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이후에도 기존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공기업 도로공사의 이 같은 행태에 대해 정부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오히려 기가 막힌 답변만 들려왔다. 이호승 청와대 경제수석은 “톨게이트 수납원이 없어지는 직업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느냐”고 말했다. 톨게이트 수납원은 어차피 없어질 일자리니 특별한 대책이 있을 수 있겠냐는 뜻이다. 기술 도입에 따른 산업구조의 변화는 불가피하며 이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하라는 태도다. 도로공사 이강래 사장이 밀어붙이고 있는 간접 고용과 이에 불응한 노동자에 대한 해고는, 독자적인 판단이 아니라 현 정부의 노동 기조와 엄연히 부합하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이러한 인식은 톨게이트 노동자를 사람으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나 기계처럼 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효율과 편의의 측면에서 자동화 기계에 뒤처지는 인간노동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바탕에 비용 절감의 측면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저항과 불복도 없고, 마음대로 쓰고 버릴 수 있는 자동화 기계가 있는데 차별에 반대하여 투쟁을 일삼는 수납원들이 안중에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흐름을 마치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변화라고 강조한다.

정말 이들의 주장이 맞는 말일까? 어차피 없어질 일자리니 그 일에 종사하는 노동자도 덩달아 사라지는 게 당연한 것인가? 그렇게 따진다면 지금 우리 중에 지금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없어질 일자리와 보존해야 할 일자리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이며 누가 그럴 권한을 갖고 있는가?

자본주의 산업문명 시기, 기술 발전에 따른 일자리 소멸 문제는 늘 있어왔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기도 하고 일자리의 순환이 이루어져 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 진행되는 변화와 속도를 감안하면 무분별한 기술 도입은 노동의 소멸을 급속하게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우리처럼 사회적 안전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사회에서 노동의 배제가 가져오는 고통은 가히 심각하다. 노동과 인간에 대한 무자비한 효용 논리만 극복한다면 사람이 있어도 되는 일자리가 반드시 기계로 대체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급속한 기술 변화의 완급을 조절하고 공유와 상생의 노동 생태계를 조성하는 정책을 펼쳐 나간다면 파국적인 상황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노동보다 AI가 더 존중받는 사회

▲문재인 대통령은 28일 서울 강남 코엑스에서 개최한 ‘데뷰(DEVIEW) 2019’ 행사에 참석했다. (사진=청와대)

문 대통령은 28일 코엑스에서 열린 ‘데뷰 2019’ 행사에서 “AI는 인류의 동반자”, “정부는 완전히 새로운 AI 국가전략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예산에 올해보다 50%가 늘어난 1조 7,000억을 투자하여 기업들이 수익을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개발자들을 위한 규제 완화와 분야별 장벽 제거에 정부가 앞장서겠다는 의지도 드러냈다.

심각하지만 크게 놀랄 것도 없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할 당시부터 가장 우려됐던 점은 실체도 불분명한 ‘4차 산업혁명’을 정부 정책의 중심으로 삼은 부분이었다. 진보나 보수 막론하고 기술 진보에 대한 맹신이 만연한 우리 사회에 잘 먹히는 전략이었다. 저성장, 혹은 성장의 종말 시대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과 철학 없이 무턱대고 ‘4차 산업혁명’을 들이대면서 기술 강국을 통한 성장 기조를 지속해 왔다.

‘노동 존중’, ‘공정 사회’와 같은 미사여구로 포장하여 새로운 세상을 펼칠 것으로 기대를 부풀렸지만, 차별과 불평등의 현실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성장 일변도의 기술만능주의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전 정권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국가 운영 기조로 일관했다. 문재인 정부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세우는 ‘4차 산업혁명’은 로봇, 빅데이터, 인공지능이 좀 더 강조된,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플러스’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최근 들어 문 대통령이 기업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거나 대기업 총수들을 잇달아 만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특히 아직 피고인이자 피의자 신분인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을 만나서는 대규모 예산을 기술 개발에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준 이재용 부회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국정농단 뇌물 사건과 경영권 승계 작업 문제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대기업 총수에게 덕담과 응원을 보내는 대통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을 만나 AI 발전을 위한 조언을 들었다는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손 회장은 국가의 모든 것을 AI에 걸어야 한다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국가의 앞날을 IT 그룹 회장의 말만 듣고 설계할 리는 없겠지만 지금 정부가 진행하는 방향을 고려할 때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도 없다. 노동의 종말, 불평등과 차별, 기술 소외 문제 등 급격한 기술 도입으로 인한 부작용과 문제점에 대한 대비 없이 국가의 모든 역량을 AI와 같은 거대기술에 쏟는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도박이다. 정부가 기업의 충실한 대변자가 되어 국가의 정책을 좌우해 나갔을 때 결국 고통받는 것은 전적으로 국민의 몫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지나간 역사에서 충분히 경험했다.

노동보다, 인간보다 AI가 더 존중받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술의 혁신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어불성설을 아직도 믿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생활의 기술’ 혹은 ‘공생의 도구’ 범위를 벗어나 있는 자본주의 기술 혁신은 오로지 이윤 추구를 위해 존재한다. 다만 기술 혁신의 명목이 인간의 편의 증진일 뿐인 것이다. 최근 들어 기술의 진보는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한계를 모르고 치닫고 있다. 기술의 광기가 휩쓸고 지나가는 자리에서 인간은 사라진다. 인간이 사라진 자리에 기계만 남아 있는 풍경이 우리가 SF를 통해 본 디스토피아다. 제어할 수 없는 기술의 진보는 결국 디스토피아를 향해 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