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허형식] (2) 동북항일연군, 우리는 만주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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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4 14:46 | 최종 업데이트 2019-11-05 13:29

▲1930년 5월 1일,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이었던 곳.

“일제 타도!”, “국민당 타도!”, “고리대 반대!”, “지주 토지 몰수!” 1930년 5월 1일,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앞에 모인 청년 50여 명이 구호를 외쳤다. 일부는 모여드는 구경꾼들에게 선전물도 돌렸다. 이윽고 이들은 길바닥에 나뒹구는 돌을 주워들고, 영사관을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손 써볼 틈도 없이 영사관 창문 86장이 깨져버렸다. 하필이면 영사관에는 러시아인 용병 2명과 유치장 간수 2명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동료 장례식장에 참석하느라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영사관을 향해 돌을 던진 청년 50여 명 중에는 허형식도 있었다. 그의 나이 스물을 갓 넘긴 시기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허형식은 중국공산당 내에서 입지를 다지게 된다. 중국공산당은 1930년대에 들어서 항일유격대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항일유격전을 전개하는데, 허형식은 유격대 조직뿐 아니라 지휘관으로 유격전에 참전한다. 허창수 아버지 형제 중 활동상이 드러나는 이는 허형식뿐이다. 아버지 허규식에 대한 기록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학계에서도 자료가 발견됐다는 이야긴 듣지 못했다.

“아버지를 불러 본 일이 별로 없어요” 선뜻 와닿지 않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자 허창수는 “얼굴 볼 일이 별로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아버님도 독립운동을 했을 거잖아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한국 정부에서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왜요? 자료가 없으세요?”
“아버지에 대해선 자료가 별로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상하게 생각하는거예요”

허창수가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나 어렸을 적 기억에 의존하면 아버지는 광복 전에도 조선 땅을 왕래하는 일이 잦았고, 광복 후에는 중국을 왕래하는 일이 잦았다. 어린 아들은 아버지 얼굴 볼 일이 별로 없었다. 조부 허필 뿐 아니라 숙부 허형식을 비롯한 친족들까지 항일운동에 나선 집안 분위기를 아버지 혼자 배척하진 못했을 것이다.

특히, 1932년 허필의 죽음 당시 아버지는 16살이었다. 가장이 된 형님 허형식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허필의 죽음 이후 허규식, 허형식 가족은 함께 살았거나 적어도 지근거리에서 생활했다. 가장이었던 허형식의 삶이 가족들에게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시아주버님이 목이 잘려가지고 나무에 걸쳐 있는데 가지고 가라고 일본군에서 연락이 와가지고 가보니까 (머리가) 올라가 있더라는 거야. 그래서 사람을 시켜가지고 내려서 그걸 어떻게 처리를 한 모양이야”
“수습한 걸 어머님이 기억하고 있으셨구나?”
“그렇지. 어머님이 직접 가서 보고 그랬다고 하더라고”

▲ 허형식 희생비

1942년 8월 3일 지금의 흑룡강성 경안현 청봉령 작은 골짜기에서 허형식은 전사했다. 당시 허형식은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제3군장을 맡고 있었다. 참모장으로서 흑룡강성 파언현, 목란현, 동흥현 등에 산재한 소분대 활동을 지도하고 돌아오는 참이었다. 호위병 둘과 골짜기에서 만주군과 마주쳤고, 포위망을 뚫지 못했다. 만주군은 그의 머리만 베어 산을 내려왔고, 투항한 유격대를 통해 자신들이 죽인 이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어머니가 생전에 아들에게 전해준 이야기는 그들 가족이 함께 생활했다는 걸 추정케한다.

그들 가족은 광복 후 1945년에 서울 회현동에 자리 잡을 때도 함께 생활했다. 갓난 허창수와 할머니 이성후,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숙부 허형식의 부인 김점숙과 그 아들, 딸 창룡과 하주도 함께였다. 다른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친족들이 북한을 비롯해 중국과 옛 소련 땅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생활은 만주에서와 마찬가지로 힘겨웠다. 할머니와 어머니, 숙모가 남대문시장에서 과일장사를 하면서 생활을 이어갔다. 삶은 줄곧 힘겨웠다. 전쟁이 터졌고, 잘 알지도 못하는 아버지의 삶은 ‘간첩’이란 낙인으로 그들 가족을 옥죄는 근거가 됐다.

전쟁 중에 아버지는 ‘없어졌다’. 아버지에 대한 그의 마지막 기억은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의 모습이다. “젊은 청년들 군사훈련을 가르치더라. 6.25 터지기 직전에. 군사훈련을 가르치는데, 그거 하나 딱 보고 나서 6.25사변 터지면서 그 이튿날 (인민군이) 내려와서 바로 잡아가더라고” 당시 5살이었을 그의 기억을 입증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은 없다. “아버지”라고 부를 기회도 잘 없을 만큼 보기 힘들었던 아버지의 군사훈련 모습을 설명하는 그의 두 눈만 반짝였다.

아버지의 정확한 행방은 알지 못한다. 어느날 찾아온 아버지의 친구라는 분은 아버지가 미아리 고개에서 총살당했다고 말했다. 사실 여부는 알지 못한다. 시신을 수습할 수도 없었다. 허창수는 1961년에 미뤘던 아버지의 사망 신고를 했다. “형사들이 하도(너무) 찾아오니까, 도저히 안되겠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서 여기에 있겠느냐 해서 사망신고를 했는데, 이사를 갈 때마다 형사들이 찾아오더라”

형사들에겐 만주에서 항일 항쟁을 하며 목숨까지 잃은 숙부나 조부의 삶이 알리바이가 되지 못했다. 숙부 허형식은 오히려 ‘간첩’ 낙인을 더 진하게 만들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생전에 성균관대 교수 이명영을 만나 1946년경에 북쪽에서 사람이 내려와 가족을 데려가려 했다고 했다. 숙부와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동지들이 그곳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북쪽으로 간 사람은 사촌형 창룡뿐이다. ‘가짜 김일성론’으로 유명한 이명영은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 일부를 1986년에 발표한 논문에 실었다.

연로한 시어머니를 봉양하려 북행을 거절했던 숙모 김점숙은 후일 남, 북으로 나라가 두 동강 날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전쟁이 터질거라고도 생각 못했을거고, 그 전쟁 중에 자신이 한국군 손에 죽을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을거다. “김일성 사상하고 큰아버지 사상은 다른거야. 그런데 그(김일성) 사상을 갖고 있다고 보고 총살했다고 생각하는거야” 허창수는 막연히 추측했다. 어머니는 교수에게 사촌누나 하주도 전쟁 중에 북으로 넘어갔다고 말했다.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허창수 가족에게 ‘간첩 가족’이란 낙인이 찍힌 게 비단 아버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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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창수 가족에게 형사들이 발걸음을 멈춘 건 1980년대 후반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허형식이 몸담은 동북항일연군은 우리 역사로 인정되지 않았다.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이 주도해 조직했고, 그 일부는 김일성으로 대표되는 북한 성립 주요 세력이다. 중국은 1992년 수교를 맺기 전까지 ‘우리의 적’이었다.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한중수교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동북항일연군을 연구했다.

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 장세윤은 30년가량 동북항일연군을 연구했다. 그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이견이 많았다고 설명한다. 중국공산당원으로 동북항일연군에 몸담은 조선인의 활동을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로 볼 수 있느냐가 쟁점이었다.

“아무래도 중국공산당이 주도한 조직이어서 이걸 독립운동으로 볼 수 있느냐가 쟁점이었죠. 자료도 대부분 중국에 있으니 구하기도 어렵죠. 자료 공개를 잘 안하기도 하고, 현지에 가야 하는데 그것도 어려웠죠. 수교 이후에 숨통이 트였다고 할까요? 지금은 여러 한국사 개설서에 동북항일연군이 소개가 되거든요. 심지어 김일성 이야기도 나오고 있고요. 우리 역사로 인정되고 있는거죠”

동북항일연군은 조선인과 중국인의 연합군 성격을 가졌다는 점은 이제는 쉽게 부정하기 어려운 해석이다. 1928년 12월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이 1국 1당 원칙을 정하면서 수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이들은 공산당에서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항쟁에 나섰다. 조선인이 공산당에 가입하기 전까지 만주 지역 공산당원은 100여 명 정도였지만, 조선인 가입이 시작된 후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당원의 85%가 조선인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동북항일연군 역시 조선인이 주력이었다. 중국인들조차 때때로 동북항일연군을 ‘조선인민혁명군’이나 ‘조선혁명군’으로 부를 정도였다. 중국은 1991년 발간한 『동북항일연군투쟁사』에서 동북항일연군이 연합군이었다는 견해를 드러냈다.

허형식은 상대적으로 조선인이 적은 3로군에 몸담았지만, 그 능력을 일찍부터 인정받아서 주요 직책을 맡아왔다.

“당시에 3군 군단장이 조상지란 중국인이거든요. 허형식이 그 사람 눈에 들어버렸어요. 그래서 뭘 시키느냐면 1사단 정치위원을 시켜요. 모든 부대는 1사단이 제일 중요해요. 3군에서 제일 강한 부대가 1사단이거든요. 그리고 의동판사처. 판사처 기능이 하나는 각 부대를 조화롭게 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세금을 징수해서 분배하는 거예요. 허형식은 의동판사처 주임을 하면서 이 일도 아주 잘했다는거지요” 중국 연변박물관 연구원 허영길의 설명이다.

▲허영길 중국 연변박물관 연구원

동북항일연군은 1938년 후반부터 일본군이 북만주 일대에서 대대적인 탄압을 해오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1938년 한 해 동안에만 대원 2,742명이 일제에 투항했다. 일제는 소련 침입을 준비하면서 1940년부터 1941년까지 관동군을 40만에서 76만으로 증강했다. 동북항일연군을 향한 탄압도 강도를 더했다. 중국공산당은 만주에서 항쟁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소련으로 도피를 결정했다.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성립 주축 세력은 이때 소련으로 도피했다. 하지만 허형식은 당의 명령을 거부하고 만주에서 항쟁을 이어가다 결국 목숨을 잃는다.

일제와 싸우다 목숨까지 잃었지만, 허형식 같은 공산주의계열 항일 운동가는 2005년에서야 공식적으로 국가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해 1월, 국가보훈처는 서훈 심사 기준에서 ‘공산주의자’로 규정돼 있던 서훈 제외자를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목적으로 한 활동에 주력했거나 적극 동조한 자’로 개정했다. 3.1절을 기념해서는 몽양 여운형을 비롯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54명 서훈을 결정했다. 언론은 해방 60년 만에 반쪽짜리 독립운동사가 복원되는 첫발을 내디뎠다고 보도했다.

허형식이 몸담은 동북항일연군만 따로 살펴보면 또 분위기는 달라진다.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에 공개된 공적서에 동북항일연군 경력이 포함된 포상자는 현재까지 단 2명에 불과하다. 공산당(조선, 고려, 중국 등 망라) 경력이 331명이고, 의열단원도 181명인 것과 비교된다. 동북항일연군이 조선혁명군으로 불릴 정도로 조선인 참여가 많았던 것에 비하면 너무 적은 수치다. 이유가 없진 않다. 김일성과 중국이다.

김일성은 남만주 일대에서 동북항일연군 지휘관으로 투쟁했다. 동북항일연군이 11군 편제로 구성될 때 김일성은 2군 3사장이었고, 1, 2군을 합쳐 1로군을 편성할 땐 1로군 2군 6사장으로 보천보 습격을 이끌었다. 1940년 들어 일제가 관동군을 늘리며 압박을 높여갈 때 김일성은 훈춘을 거쳐 연해주로 피신했다.

소련으로 넘어온 항일연군을 총지휘한 주보중은 1944년 9월 기준으로 전체 대원 1,007명 중 조선인이 100명 정도라고 추산했다. 만주에 남은 항일연군은 대부분 허형식처럼 죽거나 투항했기 때문에 광복 후까지 생존한 항일연군 중 다수는 북한 성립에 주요 역할을 맡았다.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목적으로 한 활동에 주력했거나 적극 동조한 자’들인 셈이다.

허형식처럼 광복 전에 만주에서 목숨을 잃은 동북항일연군에 대해선 평가를 달리할 여지가 있다. 동북항일연군으로 허형식에 버금가는 역할을 한 조선인은 더 있다. 연변박물관 연구원 허영길은 8월 9일 안동 경북독립운동기념관에서 열린 학술대회에 참석해서 그들 중 일부를 소개했다. 안동 출신 한호는 1935년 동북항일연군 1군 1사장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마찬가지로 안동 출신 유만희는 1군 3사 정치부주임으로 싸우다 1940년, 변절자 손에 죽임을 당했다. 경북 예천 출신 김정국도 11군 정치부주임으로 싸우다 1938년, 변절자에게 살해됐다. 이들처럼 끝까지 투쟁하다 숨을 다한 조선인 동북항일연군은 더 있다.

▲중국 경안현 열사능원에 세워진 동북항일연군 기념비. 가장 앞이 허형식을 기리는 기념비다.

이들에 대한 평가와 복권은 중국이 우리보다 앞섰다. 중국은 2014년부터 이들을 항일영웅열사으로 선정해서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다. 중국은 2014년 9월에 허형식을 항일영웅열사 300명 중 1명으로 선정했고, 2015년 8월에는 600명을 더 선정하면서 한호, 유만희, 김정국도 포함시켰다.

연구원 허영길은 한국에서도 국가 차원에서 그들을 포상하고 기리는 문제에 대해선 부정적인 의견을 밝혔다. “대한민국은 아직 공산당 계열 항일을 인정할 여건이 안 됐어요. 이분들은 이미 중국에서 열사능에 모셔져 있어요. 한국에는 가족들도 거의 없어요. 오히려 이런 사람들은 중국에서 대우를 잘 받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정치협상회의 정치위원을 맡았던 허영길의 견해를 개인 의견으로 치부하긴 어려워 보인다.

그 사이 우리 정부는 그들 가족을 잊고 살았다. 정부는 2010년에야 허창수의 조부 허필을 독립유공자로 선정하고 포상했다. 하지만 포장(褒章)은 10년가량 빛을 보지 못했다. 6월 18일 오후에 10년 동안 빛을 못 보던 포장이 주인을 찾았다. 대구 보훈지청 직원은 공적조서상 허필의 생몰년과 호적상 생몰년이 차이가 커서 허창수를 찾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허창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해명을 들었다.

“고(故) 허필 선생님 포장증 전수를 하겠습니다.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네, 네”
허창수는 뒤늦은 포장을 받아들고 어색하게 웃었다.

▲정부는 2010년 허창수의 조부 허필을 독립유공자로 선정하고 포상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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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도움
박도 소설가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
허영길 연변박물관 연구원
허창수 허형식의 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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