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의 은사, 친구, 동생이 전하는 그의 이야기

은사 이희규가 전하는 10대의 전태일
친구 김영문이 전하는 전태일의 마지막
동생 전순옥이 전하는 그가 떠난 후

21:32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치며 전태일 열사가 분신했다. 49년이 흐른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은사와 친구 그리고 동생은 그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대구에서 만나 각자가 기억하는 전태일을 나눴다. 저녁 6시,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이 대구인권사무소 교육센터에서 준비한 자리에는 그들의 기억을 나누려는 시민들이 속속 들어섰다.

▲11월 13일 (사)전태일의 친구들이 마련한 토크콘서트에 전태일 열사의 은사 이희규, 친구 김영문, 동생 전순옥(왼쪽부터)이 참석했다.

“체육관에 있다 보니 신문 같은 걸 잘 안 보고 그러다 보니까. 5, 6일 후에 (분신)소식을 들었어요. 얘가 맞나? 아닐 텐데, 아닐 텐데 그랬어요. 재철이한테 확인을 해보니 맞다고 해요. 친형제 같이 지냈는데, 너무 섭섭했어요. 청옥 시절 교사들 모임이 석 달에 한 번씩 있어요. 모이면 자주 그 이야길 해요. 늘 잊지 않았어요”

전태일 열사는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을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회고했다. 가족들이 다 같이 모여 살았던 몇 안 되는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 이희규 선생님은 열사에게 역사와 음악을 가르치는 교사로 만났다. 1963년 5월부터 그해 겨울까지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이 선생님과 열사는 돈독한 시간을 보냈다. 열사는 이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으로 꼽았고, 서울로 떠난 후로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1963년 처음 알게 되어서 이후에도 편지를 주고받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기억 나눔 길잡이 역할을 맡은 강성규 호산고 교사가 운을 뗐다. “전태일 군은 명랑했습니다. 지금은 미국에 있고, 서울에 있는 원섭이와 재철이라고 있는데 셋이서 삼총사라고 했습니다. 삼총사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직 원(怨)은 가난이었습니다. 저도 가난이 원이었습니다. 그 덕에 서로 연락을 주고 받았지요” 이희규 선생님이 10대였던 전태일을 기억했다.

“태일이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을 때는 기억 하시나요?” 다시 질문이 이어졌다. “서울 간다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갔습니다. 특별한 기억이 있진 않습니다. 여하튼 가난해서 가는 거니까요. 다른 말이 필요하겠어요? 돈 벌러 간다고 하니, 그래 잘 가라, 열심히 해라 그런거죠” 야간학교였던 청옥고등국민학교에는 전태일처럼 가난한 학생들이 많았다. 여학생은 식모살이를 했고, 남학생은 구두를 닦았다. 이 선생님은 “가난하다 보니까, 안 나오면 왜 안 나오냐고 찾아가기도 했지만, 대게는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전태일 열사는 이 집에서 살았던 2년여를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로 기억했다. 이곳에서 살면서 청옥고등공민학교를 다녔다.

전태일 열사는 그렇게 대구를 떠나 서울로 갔고, 그곳에서 친구 김영문을 만났다. 김영문은 전남 나주에서 중학교를 그만두고 상경해서 평화시장 신원사에서 재단 보조로 일했다. 김영문은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가거나, 점심을 먹고 화장실을 갈 때 전태일과 마주쳤고, 친구가 됐다. “점심시간에 햇볕을 쬐러 옥상을 올라가면 그 친구가 성숙해서 그런지, 근로자들 힘든 이야길 해주곤 했습니다”

김영문도 전태일과 함께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한 운동을 했다. 운명의 날, 전태일은 함께 모인 이들 중 김영문만 불러 함께 가다가 자기 몸에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을 그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3층에 삼동회 동지들 7, 8명이 모였다. 원래는 근로기준법 책을 태울 계획으로 휘발유를 준비했다. 구호를 적은 현수막도 준비했는데, 경찰들이 미리 들이닥쳐서 현수막을 빼앗아 가버렸다.

“경찰들이 와서 우리가 준비한 현수막을 모두 빼앗아 가버렸어요. 그때 그 친구가 결심을 한 거 같습니다. ‘너희들 먼저 내려가라, 나는 10분 있다가 내려갈게’ 그랬어요. 10분쯤 있으니까 나를 부르고는 동료들이 있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어요.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보다 생각하는 짧은 순간에 불을 당겨버린 거 아닙니까” 일이 터져버리고, 허겁지겁 친구의 어머니에게 상황을 알리러 간 것도 그였다. 이소선 여사는 생전에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 집으로 왔던 그의 얼굴을 잊지 않았다.

동생 전순옥은 오빠의 죽음 이후 장례식장에서 벌어진 일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노동청, 국정원, 회사 관계자는 큰 여행 가방에 만 원짜리를 가득 담아왔다. 영안실 책상 위에 돈이 가득 든 가방을 올려두고 어머니는 남은 자식들을 밖으로 불러냈다. “어머님이 단도직입적으로 ‘책상 위에 가방 봤지?’ 그러셨다. ‘그 안에 만 원짜리가 가득 들어있다. 그 돈을 받을지 말지를 너희가 결정해야 한다’ 그러셨다. 그래서 제가 받으면 어떻게 되고, 안 받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어요”

어머니는 돈을 받으면 학교도 잘 다닐 수 있고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을 거라고 했고, 안 받으면 공장에도 가야하고, 그나마 다녔던 야간학교도 못 가게 될 거라고 말했다. 대신 받지 않으면 오빠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우연히 청소를 하다가 오빠 일기를 읽은 적이 있었어요.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어려운 상황을 써놓은 걸 읽고 많이 울었는데, 오빠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길 들을 때 그 일기 본 게 기억이 났어요. 그래서 제가 공장 다니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어머니는 자식들의 뜻을 듣곤, 돈 가방을 열어젖히고 바닥에 내던졌다.

동생 전순옥은 “오빠의 삶을 똑같이 따라 살아야 한다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오빠가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저렇게 남의 고통에 아파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질문해왔어요. 내 고통, 내 아픔보다 다른 사람 고통과 아픔을 자기 것보다 더 크게 느끼고 괴로워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런 질문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요”라고 오빠 전태일이 가지는 의미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