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국개론과 정치 소비자론 / 박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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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8 10:20 | 최종 업데이트 2019-11-18 10:21

정치와 관련된 오랜 통념들이 있다. 여기서 통념이란 일상 대화에서 항상-이미 전제되곤 하지만 별로 의문시되지 않는 생각들이다.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소위 ‘국개론’이다. ‘국개’는 ‘국민이 개XX’라는 말을 줄인 것이다. 진보적 정책의 수혜집단이면서 보수 또는 극우 정치 세력을 지지하거나 혹은 부동산 투기 조장, 환경 파괴적 토건 정책 등을 경제적 이익을 이유로 찬성하는 행태 등이 국개론이 비판하는 대상이다. 국개론은 계급 배반 투표와 관련이 깊지만, 단지 그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자기 계급이익에 부합하는 투표임에도 공동체에 해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국개론이라는 말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 직후 2007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회자됐다. 주로 민주당 지지 성향의 시민들 사이에서였다. 그리고 이 말은 소위 ‘보수 정권’ 10년 동안 끝없이 공론장에서 반복됐다. 물론 2016년 탄핵 촛불 이후 반전이 일어난다. 이제 국민은 ‘개새끼’에서 ‘위대한 촛불 시민’으로 환골탈태한다. 그러나 동시에 국개론을 소위 ‘보수세력’이 전유하게 된다. 국개론은 여전히 유효한 걸까, 아니면 폐기된 걸까?

국개론이란 말 자체는 2000년대 중반에 유행했지만, 국개론적 인식은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그 인식이란 결국, 일부 엘리트가 대중을 ‘개돼지’로 보듯이 일부 대중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다른 대중을 ‘개돼지’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비하하는 데에 국개론자들 나름의 이유들은 있다. 현실에서는 진영논리에 기댄 ‘내로남불’ 버전 국개론이 대다수지만, 지구환경을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하는 정치가와 정책에 동조하는 동료 시민에게 절망하여 비난을 퍼붓는 국개론의 경우 꽤 정당해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내용을 따져서, 좀 더 설득력 있는 국개론을 분류하는 일도 나름대로 의미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건 국개론이라는 ‘형식’이다. 어떤 국개론이든 그것은 모종의 초월적·목적론적 정당성을 지배의 제1 원리로 놓는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인민의 지배(demos+kratos=democracy)라는 원칙, 즉 민주주의 자체는 후순위로 밀린다. 대한민국 독재자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나 싱가포르 독재자 리콴유의 “아시아적 가치” 같은 주장이 모두 그 변종들이다. 민주주의라는 원칙을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모든 관점들은 언제든 국개론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둘째, 국개론에 대비되는 것으로 ‘정치 소비자’론이 있다. 쉽게 말해 유권자-시민을 시장의 소비자로 보는 관점인데, 적어도 국개론보다는 성숙한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유권자가 모순적이고 다양한 욕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일단 인정하기 때문이다. 거칠게 도식화하면 국개론은 경제적 이해관계에도 불구하고 '공공선'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고, 정치 소비자론은 소비자의 선택은 절대적이므로 우열을 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 소비자론은 국개론보다 현실 정합적이지만 그럼에도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우선 유권자를 합리적 소비자로 보는 관점이 과연 이론적 설명력을 지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앨버트 허시먼은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에서 정당을 경쟁 시장의 기업과 대응시키고 유권자를 합리적 소비자와 대응시킨 앤서니 다운스 류의 가설이 왜 현실에서 종종 작동하지 않는지를 분석한다. 호텔링-다운스 이론1에서 갈 곳 없는 소비자, 즉 유권자는 그저 무기력하게 행동하지만, 허시먼에 따르면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적극적이고 과격한 항의를 통해 자신이 속한 정당에 적극적으로 압력을 행사한다. 현실정치에는 이른바 ‘비탄력적 고객’이 상당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치 소비자론의 또 한 가지 문제는 유권자를 철저히 정치과정의 객체로 고정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달리 표현하면 정치 소비자론은 '정치상품'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쪽은 따로 있고, 유권자는 '스마트한 소비자'이면 족하다는 태도다. 이는 우리 시대의 정치와 관련해서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고 핵심적인 지점을 건드리고 있다. 현대정치가 갈수록 역동성과 소구력을 잃어가는 이유 역시 정치생산과 소비의 간극, 다시 말해 정치 주체의 소외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흔히 말하는 '정치 효능감'의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위임주의 내지 전문가주의라는 문제도 있다. 정치에 대해 습관적으로 욕을 하면서도 어쨌든 현실정치는 법률 전문가들, 직업 정치인들에게 맡겨두고 유권자들은 제 먹고사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정상적'이고 '건강한' 민주주의라는 식의 사고가 만연해 있다. 과연 그럴까? 오히려 지금껏 그런 수동적 소비자의 태도였기 때문에, 요컨대 급진적 대안들은 모두 몽상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조롱하며 철저히 무시해왔기 때문에 지금의 ‘헬조선’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우리는 국개론과 정치 소비자론 사이에서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이 둘을 모두 지양해야 출구가 열린다.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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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29년 해럴드 호텔링은 두 기업이 경쟁적으로 동일 상품을 공급하는 시장 상황에서의 선택 문제를 다룬 연구를 발표했고, 곧 이 연구는 양당체제의 역학을 분석하는 수많은 후속 연구를 불러오게 된다. 앤서니 다운스는 유권자가 좌우 이념 스펙트럼에서 정규분포를 이룬다는 가정이 수요가 탄력적이라는 가정과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호텔링 이론을 부활시켰다;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앨버트 O. 허시먼, 강명구 옮김, 나무연필, 2016, 131-1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