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철의 멋진 신세계?] 죽음을 향하는 노동

13:33
▲경향신문 11월 21일자 1면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지난 11월 21일자 경향신문 1면을 가득 메운 사람들. NOO(32·깔림/뒤집힘), 윤OO(54·떨어짐), 김OO(미상·떨어짐)···.” 1,200명이다. 지난해 1월 1일부터 올해 9월까지 고용노동부에 보고된 중대재해 중 주요 5대 사고로 사망한 노동자들이다. 이 명단에 유일하게 이름까지 공개된 이도 있다. 김용균(24·끼임)이다.

출근길에 신문을 집어 들자마자 받은 충격이 1주일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그동안 강의를 통해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산업재해 1위라는 것을 숱하게 떠들고 다녔다. 한 해 1,000명에 달하는 노동자가 현장에서 사고로 죽어 나가는 현실을 모르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의 명단을 가득 채운 그날 경향신문 1면의 충격적인 잔상은 지금도 쉽게 가시지 않는다.

삶이 아니라 죽음을 향하는 노동

노동자의 죽음에 무감각한 현실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1년 반 동안 중대산재 1,200명, 2018년 질병 포함 사망자 2,142명이라는 통계 숫자가 충격의 전부는 아니다. 대놓고 ‘노동 존중’을 외쳐댔던 현 정부라서 더 절망적인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충격과 절망의 실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인 ‘김용균법’을 입안하게 했던 태안화력 김용균이,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한 지도 이제 1년이 다 돼 가지만 오늘도 또 다른 이름의 김용균이 기계에 끼어 죽어가고 있다. 매일 3명의 김용균이 처참하게 죽어 나간다. 우리 중 누구는 오늘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출근길에 나서고 있다. 아침에 반갑게 인사를 나눈 내 동료가 저녁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는, 이 기괴한 풍경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노동이 삶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있다.

1,200명 명단의 괄호에 들어가 있는 이들의 사인은 ‘떨어짐, 깔림, 끼임, 부딪힘, 뒤집힘, 물체에 맞음’이다. “하루에 한 명 떨어져 죽고, 사흘에 한 명 끼어서 죽는다”고 한다. 인간의 육신이 처참하게 부서지고 찢기고 짓이겨져도 죽음을 부르는 노동은 왜 계속되어야 하는 것일까?

산업재해 중 가장 흔한 건설 현장 추락사는 안전장치가 미비해서 일어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동자들은 안전대, 안전난간, 추락방호망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안전장치도 없이 일하다가 떨어져 죽었다. 닷새 만에 한 번꼴로 일어나는 일이다. 노동자들은 일주일에 한 번꼴로 작업 발판 없이, 사다리 위에서 불안하게 작업하다가 떨어져 사망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폭 15~20cm 철골만을 의지한 채 작업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산업로봇이 작업 중인 노동자를 포장해야 할 제품으로 오인해서 사망에 이르게 한 사고도 일어났다. 기계는 상품이건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입력된 바대로 작동했을 뿐이다. 노동 현장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기계에 사람이 끼어도 기계는 공정을 멈추지 않는다. 재료와 사람을 분별하는 데 필요한 기술은 제공되지 않았다. 기술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서일 것이다. 고효율의 로봇을 설비하는 데에는 비용을 아끼지 않았던 사업주들이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서는 추가 비용을 지불하려 들지 않는다.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것만으로 제 할 도리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노동의 미숙함이 사고의 주된 요인일 것이라는 통념과는 달리 숙련노동자들이 사망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들은 경력 10년 이상인 고숙련 노동자들이다. 작업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은 안전한 작업환경만 갖춰져 있었다면 목숨을 잃는 사고를 당하지 않아도 될 노동자들이다. 고층 건물 높이만큼 쌓인 숙련노동자들의 삶과 이력이 한순간에 낙엽처럼 떨어져 버린다. 인간적으로 이보다 더 잔인한 장면이 있을 수 있겠는가.

효율과 비용절감이 만들어낸 타살

결국 이러한 일들은 왜 일어나는가? 효율과 비용 절감, 이를 통한 이윤의 확대가 모든 것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산업 현장은 이윤 확대를 위한 생산성 향상에 모든 것을 건다. 노동자의 안전은 뒷전일 수밖에 없다. 노동자의 안전이 우선 고려되는 경우도 규제나 제재를 피하기 위함이거나 노동생산성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노동생산성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경우 노동자의 안전은 사각지대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규모가 작은 영세사업장이나 도급·하청노동 사업장일수록 비용 절감이라는 명목으로 가장 기본적인 안전장치도 마련되지 않은 채 위험한 노동이 이루어진다.

몇 해 전 일어났던 메탄올 중독 실명 사고는 이 같은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경우다. 대기업 3차 하청업체였던 이 작업장은, 중독되면 실명을 당할 정도로 맹독성 물질인 메탄올을 다루면서 변변한 보호장갑이나 호흡기 장비조차 구비하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고 파견된 젊은 노동자들에게 위험천만한 일을 시켰다. 파견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물질이 메탄올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한다. 간단한 안전교육이 이루어지고 제대로 된 장비만 갖췄더라도 앞날이 창창한 젊은 노동자들이 실명에 이르는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노동 존중’을 표방한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노동환경과 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개선될 것으로 전망한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오히려 탄력근로제 연장처럼 개선이 아닌 개악의 징후들이 뚜렷하다. 매일 같이 들려오는 노동자들의 비명소리에도 이 사회는 꿈쩍하지 않는다. 경향신문 1면이 우리에게 보여준 충격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묻힐 것이다.

안전한 노동은 가능할 것인가

김용균의 죽음 이후 ‘죽음의 외주화’를 막기 위한 여러 방안이 제시됐지만 해법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노동조건과 노동자 권리에 대한 개선 요구는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경제성장 논리’에 번번이 막히기 일쑤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10% 정도밖에 안 되는 나라에서 걸핏하면 “노동조합이 국가 경제를 발목 잡는다”는 비난이 횡행한다.

죽음을 부르는 산재 노동이 개선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현실에 더해 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무인 자동화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매일같이 노동자들이 여전히 죽음의 노동으로 쓰러져가고 있는가 하면 매일같이 노동자들이 새롭게 일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실직은 또 다른 의미에서 노동자의 죽음을 부른다. 죽음의 노동으로부터 벗어날 작업장의 안전망도, 실직의 공포로부터 노동자를 지켜줄 사회적 안전망도 우리는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다.

죽음의 노동을 멈추게 하려는 당면하고 현실적인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인간의 노동을 한낱 생산의 효율이나 비용 절감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 스스로를 기계의 부품처럼 여기는 인식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우리에게 안전한 노동은 요원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노동자, 시민 스스로 안전한 노동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