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먹칠] 허물없는 관계라는 착각 / 박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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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0 12:17 | 최종 업데이트 2019-12-20 12:18

‘허물없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서로 매우 친하여, 체면을 돌보거나 조심할 필요가 없다.’라는 설명이 나온다. 허물없다는 의미를 새삼 꺼낸 이유는 최근 EBS ‘생방송 톡톡! 보니하니(이하 보니하니)’에서 일어난 성인 출연자의 폭언과 폭행 논란을 무마하기 위한 제작진의 해명과 당사자인 성인 출연자의 해명을 바로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보니하니’ 제작진은 폭행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촬영장에서 폭력은 없었으며, 출연자들 사이가 허물없는 사이이기 때문에 심한 장난을 쳤을 뿐이라고 말이다. 문제가 된 성인 출연자 또한 스포츠조선과 인터뷰에서 삼촌 혹은 친오빠 동생 같은 사이인데 어떻게 때리겠냐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다만 오해받을 만한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제작진과 성인 출연자의 ‘친밀한 관계’라는 강요에는 15살 청소년 출연자의 입장은 제거되어 있다. 주체가 느끼는 친밀한 관계의 기준은 상이함에도, 제작진과 성인 출연자는 ‘우리 서로 친해요’라는 진정성을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화면 밖에서 그들이 얼마나 친하며, 체면을 돌보지 않고 조심할 필요가 없는 사이인지를 시청자들은 알 수 없다. 폭력으로 의심되는 상황과 ‘독한 X’이라는 말을 우스운 농담으로 여기는 성인 출연자들이, 같은 프로그램 안에서 청소년 출연자를 평등한 인격체로 여기며 존중하는 관계가 아님을 영상을 통해 목격했을 뿐이다. ‘보니하니’의 제작진과 성인 출연자의 해명과 ‘억울함’은 폭력과 폭언을 정당화하려는 ‘허물’이다.

그들은 관계의 ‘진정성’을 시청자들에게 호소할게 아니라 자신의 실수였거나 잘못이었을 행동에 대한 성찰을 했어야 했다. 제작진은 청소년 출연자가 나이가 어리단 이유로, 본인들의 방송경력이 청소년 출연자보다 길단 이유로 인격을 무시하는 ‘심한 장난’을 쳐도 된다는 예외는 없으며, 성인 출연자의 행위가 폭력적이었음을 인정하고 잘못에 대한 책임은 자신들에게 있음을 말했어야 했다. 그러나 제작진과 성인 출연자는 친밀한 관계에서조차 자신이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간과했다. 성인 출연자들끼리도 문제가 될 만한 폭력적인 태도를 청소년 출연자에게 문제의식 없이 행했다. 위험성을 간과했다는 것은 청소년 출연자를 대하는 성인 관계자들의 존중의식 부족을 보여준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EBS조차 청소년을 한 명의 인격체로서 존중하려는 의식과 그를 뒷받침하는 가이드라인이 부재했다.

EBS 사장은 어린이·청소년 출연자 보호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인권 보호와 관련된 제작 가이드 라인을 보강하겠다고 밝혔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아동·청소년 연예인을 보호하기 위해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개정을 촉구하는 ‘프로텍트101’ 캠페인에 나섰다. ‘보니하니’사건을 계기로 어린이·청소년 출연자의 인권 보호를 위한 구체적인 시도가 시작되었다. 가이드라인과 법 제정이 이루어질 때까지의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그보다 먼저 이룰 수 있는 것은 어린이와 청소년 출연자를 한 명의 인격체로서 존중하는 자세다. 같은 프로그램의 동등한 출연자로서 개인을 신뢰하고, 성별과 나이로 권력을 나누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성인 출연자는 청소년 출연자와 삼촌 같은 혹은 친오빠 동생 같은 사이라고 비유했다. 그러나 여전히 가족에게 학대를 받는 아이들이 있다. ‘딸 같아서’라며 성적 폭력을 마치 가족의 애정 표현 형태처럼 무책임하게 둘러대는 이들도 있다. 친밀함의 정도를 주장하는 것은 가해자의 언어이다. 부적절한 행동을 하고서도 ‘친하면 이 정도쯤이야 괜찮지’를 내세운다. 불편함을 느끼고, 불쾌함을 느낀 이들의 감정마저 ‘허락’받아야 하는 착각에 들게 한다. 이 관계에서 감정을 느끼는 주체는 권력을 가진 가해자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보니하니’의 제작진과 성인 출연자의 친밀함을 내세우는 호소가 이 논란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허물없는 사이의 뜻에서 조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자신의 체면을 차리기 위해 꾸며낸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다. 또한 허물없는 관계에서의 허물은 자신 스스로 벗는 것이지 남의 강요에 의해 벗겨지는 것이 아니다. 혈연이든 아니든, 막역한 사이이든 아니든 일방적인 폭력을 정당화하는 허물없는 관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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