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철의 멋진 신세계?] 기술 전체주의와 멋진 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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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에 발표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기술전체주의가 인간세계를 장악한 미래사회를 그리고 있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한도를 모르고 치닫는 과학기술문명이 전체주의와 만날 때 인간사회가 얼마나 기괴하고 흉측해질 수 있는지 <멋진 신세계>만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고전의 반열에 올라 지금도 많은 독자에게 읽히는 SF 장르의 걸작 소설이다.

하지만 <멋진 신세계>가 단순히 공상과학소설로만 독자들에게 읽히는 것은 못내 아쉬운 일이다. 공상이 바탕을 이루는 소설임에는 틀림없지만 이 작품에 그려진 미래세계에는 작품이 쓰인 당대의 현실이 핍진하게 녹아 들어가 있다. 여기서 헉슬리가 주목한 당대의 현실이란, 과학기술의 무한 발전과 전체주의 체제의 팽창을 의미한다.

19세기까지 무서운 가속으로 치달았던 과학기술의 진보와 발전에 대해 별다른 반성적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 인류사회는, 20세기 초반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급격한 과학기술 발전이 전쟁과 결부되면 얼마나 끔찍한 비극이 초래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전은 대체로 전쟁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 비약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전쟁은 과학기술이 인류의 편의를 도모함이 아니라 파괴를 획책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아울러 1920년대 초반부터 발흥하던 전체주의는 자본주의의 무정부적 팽창의 결과로 나타난 대공황의 혼란 속에 더욱 맹렬한 기세로 세계를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훨씬 급격하게 이루어진 과학기술의 발전은 제국주의 세력들로 하여금 공업과 군수산업을 극단적으로 육성하게 하는 동력이 된다. 파시즘과 나치즘으로 대표되는 전체주의 체제는 자신들의 세력 팽창을 위해 군수산업 육성과 군사력 증강에 더욱 맹진하게 된다. 국가주의와 인종주의를 바탕으로 한 전체주의 체제가 막강한 군사력까지 동원하여 세계를 잠식해 나가는 현실은 공포 그 자체였다. 막강한 군사력이란 궁극적으로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는 능력을 가리키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군산복합 시스템을 위한 과학기술의 급진적 발전이었다.

현실이 된 ‘멋진 신세계’

<멋진 신세계>에서 시간은 포드력으로 표현된다. 포드력이란 포디즘의 창시자 헨리 포드가 세계 최초의 컨베이어 시스템에서 T모델 자동차를 처음으로 생산한 해인 1908년을 기점으로 산정한 연도체계다. 작품 속 배경은 포드 기원 632년, 서기로 따지면 2540년이 된다. 이 소설에서 포드는 신으로 그려진다. 포드는 미국 자본주의가 본격적인 대량생산 체계를 갖추고 소비사회로 진입하게 된 계기를 만든 사람이다. 그는 한 사람의 자본가에 머물지 않고 한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꾼 시스템의 상징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포드가 신의 지위로 그려지는 것은 대량생산 체계에서 영혼을 잃고 소비사회의 노예로 전락해 가던 당대의 인류를 풍자하기 위함이다.

이 작품에는 가공할 만한 과학기술이 등장하는데, 첨단 생명공학기술이 대표적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태어나는 인간은 ‘보카노프스키 과정’이라 불리는 시스템에서 만들어진다. ‘런던중앙인공부화·조건반사 양육소’라 불리는 곳에서 수정란 하나에서 96개의 태아를 만들어낸다. 이들은 엄마에게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컨베이어벨트 위에 놓인 병 안에서 대량으로 생산된다. 인공부화로 생산된 인간이기에 이들에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제도 없다. 가족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니 결혼제도나 양육은 불필요하다.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의 5개 계급이 부화되기 전에 미리 결정되며 이들은 결정된 계급에 따라 평생 살아가게 된다.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1932)

<멋진 신세계>의 배경이 되는 포드 기원 632년이라는 시간은 소설이 쓰인 당대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으로부터도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미래세계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공상적 세계가 소설의 시간적 배경만큼 멀거나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의 첨단 과학기술이 지금만으로도 그만큼 충분히 가공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인공부화 시스템은 우리에게 그다지 낯선 풍경이 아니다. 1978년 영국 로버트 에드워즈 박사는 인류 최초로 체외수정의 한 방법인 시험관 아기를 탄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1990년에 출범한 ‘인간게놈프로젝트’는 2003년에 ‘인간유전체지도’를 완성하면서 생명공학의 역사에 신기원을 이뤘다. 이를 계기로 인류는 거의 모든 유전자 정보를 제 손아귀에 넣고 이를 마음대로 조작하는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합성생물학과 크리스퍼유전자가위 기술의 획기적 발전은 DNA혁명을 이루어냈고 급기야는 인간 배아의 유전자 편집을 성공하는 데까지 도달했다. 2018년 중국의 허젠쿠이 박사는 유전자편집기술로 실제 아기가 탄생했다고 발표해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첨단 생명공학기술은 실제 현실에서 이미 ‘멋진 신세계’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과학기술은 신의 반열에 올라 생명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편집할 수 있게 되었다. 생명은 이제 섭리가 아니라 기술이며 산업으로 통용될 것이다. 이론적인 단계에서만 보자면 생명공학기술은 태어날 인간을 선택하고 결정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단계까지 와 있는 셈이다. 더불어 이러한 현상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생명에 대한 원초적 감수성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다.

‘유전자 가위’나 ‘유전자 편집’이 생명의 신비와 경외를 대신하고 있는 공포스러운 현실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저 과학의 경이로운 발전에 놀라워할 뿐 인간 존엄의 상실에 대한 고통에 무감한 게 현실이다. 이미 우리의 생명에 대한 감수성은 무뎌질 대로 무뎌져 있다. <멋진 신세계>에서 그려지는 세계가 더 이상 기괴하고 끔찍하게 느껴지지 않는 세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멋진 신세계>는 디스토피아 SF 장르의 뛰어난 작품이지만, 현실의 추세를 볼 때 지금의 인류가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시대까지 존속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지나치게 낙관적인 작품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물론 이런 생각은 작품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겪고 있는 ‘기후위기’와 같은 재앙의 징후를 감지하고 나서야 새롭게 얻게 된 것이지만 말이다.

‘기후위기’는 인류와 지구 생태계에 전대미문의 재앙이 되고 있다. 과학기술과 산업자본주의가 융합하여 만들어낸 ‘탄소 경제’ 시스템은 유구한 세월 동안 변함없이 유지되었던 지구의 온도를 1도 가까이 상승시켰다. 산업화 이전에 비해 지구 온도가 1도 가까이 올랐다는 것은 결국 탄소 경제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산업 문명이 기후 위기의 주범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명백한 증거다.

지구 온도 1도 상승의 결과, 폭염, 가뭄, 홍수, 해일, 해빙 등의 각종 자연재해와 지구상 생물체의 멸종이 가속화되고 있다. 아무런 대책 없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해수면 상승으로 물에 잠기는 영토는 급속하게 늘어날 것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생태계의 교란은 장기적으로 지구생태계에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수많은 과학자들은 경고한다.

지난 11월 5일 전 세계의 11,000명에 이르는 국제 과학자들은 세계가 중대한 정책변화를 이루어내지 않는다면 기후 위기로 인한 유례없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과학잡지 <네이처> 최근호에서도 많은 과학자들은 기후 위기가 이미 티핑포인트(Tipping Point)를 지났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기후 위기의 티핑포인트란, 기후변화의 결과가 서서히 진행되다가 절정의 순간을 지나면 폭발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뜻한다.

티핑포인트를 지나는 시점에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자연의 재앙 앞에서 어떠한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방책도 결국 무용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배출가스 감소와 같은 노력이 지속된다 하더라도, 이미 상승한 지구 온도 때문에 북극이나 그린란드와 같은 영구 동토들이 녹으면서 메탄가스를 방출하는 현상처럼 기후 위기는 이제 더 이상 손쓸 수조차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기후 위기에 맞서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레타 툰베리와 그의 친구들처럼 과학기술의 세계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다.

기술의 진보가 사회의 진보?

기술의 진보가 물질적 풍요를 가져온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인류사회는 반대급부의 극심한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으며 나아가 ‘기후 위기’와 같은 생존의 벼랑 끝에 서 있다. 풍요는 전체가 아닌 일부의 전유물이었고 전 세계는 더욱 빈곤해졌다. ‘20:80’, ‘10:90’, ‘1:99’ 등으로 표현되던 불평등과 격차는 이제는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불평등과 격차로 인한 계급투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기술이 진보하는 현상을 두고 인간의 삶, 혹은 사회가 진보해 나간다고 착각하는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평소 대부분의 사안에서 극단적 대립 양상으로 치닫는 정치적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모두, 새로운 기술의 진보와 발전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는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 문제에 대해서 이들은 한통속이라고 해야 옳다. 기술의 진보가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상투적인 기본 인식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낡은 것을 혁파하고 새로운 것을 쇄신하려는 진보주의자들의 사회 혁신 기획은 테크놀로지 발전 양상을 그대로 닮아 있다. 그들은 대체로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또한 새로운 기술의 흐름을 거역하는 것은 마치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인식한다. 이들이 추구하는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진보(정의)의 토양이 실은 기술의 발전과 물질의 진보를 전제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촉진하는 생산력의 진보, 즉 경제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비단 보수주의자들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진보라는 이름 대신에 좌파라는 좀 더 엄밀한 정치적 용어를 사용한다 해도 이러한 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현대판 보수주의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진보주의자들보다도 더 강력하게 기술의 진보를 맹신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지키려는 낡은 가치를 맹목적으로 고수하면서도 기술의 진보와 발전은 ‘선한 것’이라 여기며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보인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결국은 보수적인 질서와 가치를 모조리 붕괴시킨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애써 눈감은 채 기술 발전의 결과물인 경제성장의 열매가 자신들에게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자칫 모순되어 보이지만, 이들의 궁극적인 욕망이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그로 인한 물질적 부, 즉 경제성장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들의 태도를 이해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들이 죽기살기로 지키려는 ‘보수’라는 가치는, 산업사회 이전까지 오랜 시간 동안 인류사회가 존속해온 전통적 가치 혹은 토착적 가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대체로 지금의 보수주의자들이 고수하려는 가치는 ‘보수’라는 보편적 개념과는 전혀 다르게 공익이 아니라 기득과 사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들을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거나 어불성설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흔히 사람들은 인간이나 사회의 필요에 의해 기술이 발전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오래전 기술문명 비평가 자크 엘륄이 말한 것처럼 기술은 자율적으로 발전한다. 기술 발전이 가속화될수록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발전에 기술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발전에 사회의 각 분야가 뒤따라가는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기술의 발전이 자율적일수록 인간은 더 타율적으로 살아가거나 왜소해질 것이 분명하다. 기술이 현란하게 발전할수록 인간의 소외와 무력은 심화될 것이다. 인간과 사회의 적절한 통제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기술의 폭주를 멈추게 할 방도는 없다. 이 과정에서 인간사회는 엄청난 희생과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한도를 넘어선 기술은 멈춰야 한다!

과학의 시대 초창기에나 있었을 법한, ‘지적 호기심’이나 ‘순수한 탐구심’이 과학자의 연구 동기가 되던 시대는 저 멀리 사라졌다. 이제 인류사회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는 과학적 연구는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과 기술이 ‘인류의 복지’나 ‘인류의 혜택’을 위한다는 말은, 거대 산업과 결탁한 과학기술 프로젝트의 광고 문구로만 유용할 뿐이다. 몇몇 희귀한 분야를 제외하고는 과학 연구는 자연과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 말고는 전혀 알 수 없는 원자화되고 세분화된 지점에서 시작되는 과학 연구는, 그 연구 결과가 ‘쓸모’와 ‘효용’, 즉 환금가능성으로 입증되어야만 인정받을 수 있으며 지속될 수 있다.

한 사람의 과학자가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산 활동을 수행하면서 지금과 같은 고도의 과학연구에 몰두할 수는 없다. 이미 자본과 시장에 점령당한 대학이나 대학원 연구소는 국가나 기술산업자본의 연구자금이 뒷받침되지 않은 한 연구 자체가 시작되지 않는다. 이들의 지원 없이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거대 규모의 과학기술 연구는 결코 가능할 수 없다. 더 이상 과학연구는 과학자의 학문 탐구활동이 아니다. 기술산업자본 시스템이 구축한 조직망 위에서 점처럼 움직이는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 거대 시스템에 포박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과학연구의 최종 목표는 ‘인류의 혜택’이 아니라 연구 자금을 지원한 기술자본의 상업적 이윤 창출에 맞춰져야만 한다.

결국 한도를 넘어서는 기술 발전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다. 과학기술 각 분야에서 이미 한도를 넘어선 기술들이 우리를, 인간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과학자들은 이 같은 과학기술의 폭주에 아무런 반성도, 저항도 없이 거대한 물결에 휩쓸리고 있다. 이들은 원자력의 가공할 위협을 알면서도 연구와 실험을 지속한다. 생명을 편집할 권리를 그 누구도 부여받지 않았음에도 자신들의 성과를 위해 유전자 편집을 강행한다. 인간의 편의보다는 인간의 배제가 목적인 인공지능과 로봇 연구를 멈추지 않는다. 자동화된 무인의 세계에서는 과학자 스스로도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망각한 채 기술과 기계에 더 큰 자율성을 부여한다.

기후 위기와 같은 인류 공멸 시나리오에도 과학자들의 적극적인 움직임은 기대하기 어렵다. 외려 이들 중 일부는 기후 위기가 과장된 선전 선동이라고 음해하기도 한다. 정작 인류와 자연의 소멸을 걱정하며 기후 위기에 맞서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레타 툰베리와 그의 친구들처럼 과학기술의 세계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다.

기후 위기나 생명공학의 폭주처럼 인류의 생존과 존엄 자체를 위협하는 과학기술의 폭주를 가만두고 볼 수는 없다. 이 폭주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안락을 위한 전체주의’가 우리를 지배하도록 방치한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 저 기괴하고 흉측한 신세계를 향해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 될 것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인간성이 거세된 ‘공학적 공간’과 ‘안락한 세계’를 구축하려는 무하마드 몬드 총통에게, 인간의 진정한 자유의지로 맞섰던 야만인 존의 음성은 의미심장하다.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詩)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善)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불행해질 권리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