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의 김수영-되기] (2) 먼 곳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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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부터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꽃으로부터
능금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글에서 인용한 ‘먼 곳에서부터’는 <김수영 전집 1(시)>에 수록됐습니다.

김수영의 짧은 시가 주는 울림의 특징은 작품 안에 크나큰 공백을 주고 그것을 울림통으로 삼는 경우이다.

이 시에서 “아프다”는 “먼 곳”과 “먼 곳”, “조용한 봄”과 “조용한 봄”, “여자”와 “여자”, “능금꽃”과 “능금꽃” 사이에서 울린다. 우리가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이 “아프다”의 반복이 동일한 반복이 아니라는 점이며 이게 왜 동일한 반복이 아닌지 그리고 동일한 반복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반복인지를 밝혀내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오봉옥 시인은 “아프다”를 운동 중에 발생하는 필연적인 아픔으로 해석해 이 시를 “몸의 사유” “존재에 대한 사유”라고 얼버무리고 있는데, 이는 대부분의 비평이 김수영을 그가 산 시대와 떼어놓은 상태에서 해석하는 에토스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 황현산도 김수영의 1940~50년대를 분석하면서 김수영의 고뇌와 의지를 실존적으로만 해석하곤 했다.

나는 이 시가 쓰인 시점과 이 시 앞뒤에 생산된 시를 외피로 삼아보지 않는 한 이 시에 대한 해석은 동일한 오류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이 시 앞뒤에 생산된 시나 쓰인 시점을 외피로 삼아보자는 것은 그동안 김수영의 작품이 생산된 역사적 배경을 함께 살펴보자는 뜻과 다르지 않다. 의외로 시인의 내면은 그가 살았던 시대가 움푹 남긴 흔적의 어떤 변형인 경우가 적잖은 법이다. 더군다나 김수영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정서(affectus)라는 것은, 비유하자면 대나무 줄기와 같아서, 특정 시간대 혹은 특정 기간의 정서들은 그 차이가 생각보다 미세하다. 이 말은 정서의 운동을 부정하는 뜻을 갖지 않는다. 다만 어떤 계기를 통해 마디를 이루기 전까지는 그 정서의 운동이 하나의 점(點)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경향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점과 어떻게 관계하고 어떻게 함께 운동하느냐에 따라 변화의 방향이 달라진다.

「먼 곳에서부터」는 1961년 9월 30일에 퇴고한 것으로 자료에는 남아 있는데, 이 작품의 이전 작품들이 1961년 6월에서 8월까지 만 3개월이 채 안 된 사이에 쏟아진 ‘신귀거래’ 연작 아홉 편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신귀거래’ 연작 이전 작품이 1961년 4월 14일에 쓴 「<4·19>시」라는 점인데 「<4·19>시」와 ‘신귀거래’ 연작 사이에 ‘반공을 국시’로 하는 5·16쿠데타가 있었다. (김수영은 전쟁 때 북한의 의용군에 끌려간 적이 있었고 포로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한 전력이 있다)

정리하자면 「<4·19>시」(의 이전 시)와 ‘신귀거래’ 연작 사이에 제법 굵직한 마디가 존재하고 다시 ‘신귀거래’ 연작과 「먼 곳에서부터」 사이에도 범상치 않은 심연이 존재한다. 이 사실은 이 시 다음에 쓴 「아픈 몸이」와 「시」를 함께 읽어보면 비교적 명료해진다. 1961년에 벌어진 5·16쿠데타 직후에 김수영의 내면이 혼돈스러운 상태로 빠진 것은 사실 그가 4·19에 ‘미쳐 날뛴’ 것을 보면 거의 확실하다. 이것은 그 자신이 「사랑의 변주곡」에서 고백한 바이기도 하지만 4·19 직후 쏟아진 직정적인 시를 봐도 마찬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1961년 5.16쿠데타 직후 장도영(왼쪽)과 박정희(오른쪽)
▲1961년 5.16쿠데타 직후 장도영(왼쪽)과 박정희(오른쪽) [출처=위키백과]

김명인은 이에 대해, “제1막을 내린 혁명의 막간에 허탈감을 달래고 다시 스스로를 재충전하는, 위태롭지만 일시적인 퇴각”(『김수영, 근대를 향한 모험』)이라고 했지만, 사실 재충전은 ‘신귀거래’ 연작에서가 아니라 「먼 곳에서부터」에 와서 본격적으로 시도된다. ‘신귀거래’ 연작에서 말하는 ‘귀거래’는 그러니까 일반론적으로 회자되는 시의 본향으로 잠시 물러난다는 뜻이 아니라 「격문-신귀거래2」의 “무엇보다도/내가 정말 시인이 되었으니 시원하고/인제 정말/진짜 시인이 될 수 있으니 시원하고”라는 구절에서 암시되듯 일종의 자조이며 자기풍자였을 뿐이다.

김수영은 5·16쿠데타 직후에 약 일주일 동안 스스로 자신을 유폐시켰다가 나타나서 말없이 자신의 생활에만 전념한다.(최하림, 『김수영 평전』) 그 와중에 ‘신귀거래’ 연작은 쓰였는데, 이 난삽한 인식의 흐름은 그의 영혼이 5·16쿠데타 이후에 얼마나 위축되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무수한 잡동사니 잡념까지도/깨끗이 버리고” “편편”해져버린(「격문-신귀거래2」) 자신의 상태를 시적 양식화도 개의치 않은 채 자신의 내면이 “평면”이 되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 상태를 김수영은 오래 지속시키지 않는다. 「누이의 방-신귀거래8」에 와서 “평면을 사랑하는/코스모스/역시 평면을 사랑하는/킴 노박의 사진과/국내 소설책들……”을 향해 “이런 것들이 정돈된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라고 준열히 묻는다. 이 물음은 외형적으로는 “누이”에게 향하지만 사실은 시인 자신을 향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 직후 「이놈의 무엇이지?-신귀거래9」에서 보여준 자아의 방전 끝에 김수영의 ‘아픔’이 시작된 것이다.

「먼 곳에서부터」를 읽으면서 이러한 김수영의 내면과 인식의 흐름을 고려치 않을 때, 그것도 역사적 사건에 연루된 그의 고뇌를 삭제하고 읽을 때 의사 존재론으로 빠져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시인은 왜 아픈가? 그냥 사는 게 아파서 아픈가? 이런 무의미한 동어반복은 김수영에게서 고정된 시의 이데아를 거부한 채 오직 “현실에서 시를 추출하고, 현실을 시로 끌어올리는”(황현산) 힘을 읽은 독자들에게는 용납되지 않는다. 「먼 곳에서부터」의 경우 ‘아픔’에 대한 실존적인 접근에 집착하는 한 이 시는 난해성의 구렁텅이에서 영영 헤어나오지 못한다. 이 시에서 받는 일차적인 느낌은 시인의 ‘아픔’이 자신이 처한 공간과 시간 전체에 걸쳐서 마치 종소리처럼 울린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아프다”의 반복과 ‘~부터 ~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따져 묻기에 앞서 그 언어들의 반복이 시 전체를 어떻게 울리는가에 집중하면 작품의 의미가 의외로 쉽게 드러날 수 있다는 점이다. 해석하기가 쉽지 않아서 한쪽으로 미루어 놓는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나 해석이 쉽지 않다고 해 시의 격이 떨어진다고 판단하는 일은 온당치 않다.

“먼 곳에서부터/먼 곳으로”는 우리에게 무한정한 공간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고, “조용한 봄에서부터/조용한 봄으로”는 특정 시간에 대한 감각을 활성화시킨다. 다시 “여자에게서부터/여자에게로”는 그치지 않는 인연의 순환을, “능금꽃으로부터/능금꽃으로”는 사물과 사물이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구체적인 세계를 환기한다. 그러니까 김수영이 이 시에서 보여주는 “아프다”와 ‘~부터 ~로’의 반복은 반복적인 사건과 사태로 무한히 엮여진 세계와 삶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을 더 이상 나열하지 않고 “능금꽃으로부터/능금꽃으로……”라고 말한 후 다음 연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내 몸이 아프다”고 시를 종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하면 “……”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이에는 언어가 닿지 않는 무수한 사건의 반복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1~4연에서 “먼 곳” “조용한 봄” “여자” “능금꽃”이 두 번 반복되지만 앞의 것과 뒤의 것은 같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 뒤의 것은 앞의 것을 되풀이하나, ‘~부터 ~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회귀하는 시간과 공간을 표현한다. 역사적 시간에 기대자면 4·19 이전 세계가 5·16을 통해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같은 세계는 아니다. 왜냐면 그사이에 4·19라는 거대한 ‘차이’가 있었으며 그 되돌아오는 과정에 숱한 아픔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수영에게서 중요한 것은 “먼 곳”과 “먼 곳”의 사이, “조용한 봄”과 “조용한 봄”의 사이, “여자”와 “여자”의 사이, “능금꽃”과 “능금꽃”의 사이에 존재하는 운동인데, 그 운동을 김수영은 이 시를 쓸 즈음에 깨닫게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김수영이 그 깨달음을 인생철학으로 수렴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거대한 소용돌이에 개방했다는 점이다.

시가 되는 ‘아픔’은 수렴하는 자에게는 오지 않는다. 몸을 던진 상태에서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거대한 뿌리」) 울린다.

혁명에 대한 격정적인 흥분 상태가 타락한 혁명에 대한 환멸과 조롱으로 바뀌고, 반동적인 5·16쿠데타를 겪으며 퇴행적인 침잠을 지나 다른 것으로 거듭나는 중인 김수영의 ‘아픔’을 이 시는 증명한다. (이 주장에 신뢰가 가지 않거든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부터 「<4·19>시」까지 다시 읽어보길 권한다.)

일종의 직선론적 시간관은 여기서 김수영에게 거부당하는데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훗날 그는 「거대한 뿌리」에서 이 관념을 직설적으로 토로하지만, 이 시만 가지고 봤을 때 그의 세계에 대한 인식은 순환론이 아니라 모든 것은 다르게 되돌아온다는 회귀주의에 가깝다. 내가 이해하기로 이것이 ‘~부터 ~로’의 비밀이며, “먼 곳” “조용한 봄” “여자” “능금꽃”이 되풀이되는 이유이고, 매순간마다 “아프다”는 탄식이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원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아프다”는 김수영이 회귀하는 세계에 자신의 몸을 기입하고 있다는 은유이기도 하다.

이 시는 ‘신귀거래’ 연작에서 드러나듯 반혁명으로서의 5·16쿠데타 이후에 찾아온 ‘자아의 방전’을 벗어나 다른 기운과 정신을 충전시키는 순간을 노래한 시이다. 그랬을 때만 이 시 다음에 쓴 「아픈 몸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작품 전문은 저작권자와 협의하에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