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교협 시사 칼럼] 새로운 세대에게 /엄창옥

23:07


필자는 기성세대에 속합니다. 70년대 학번이지만 독재의 ‘붕괴’를 경험하고 서울의 ‘봄’을 함께 맞이했다는 점에서, 크게 보면 <386세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386세대>가 함께 탄 열차는 민주화라고 하는 화력으로 움직였습니다. 쾌속으로 달리는 이 민주화호 열차의 화구(火口) 안으로 참으로 많은 희생제물이 바쳐졌습니다.

이 열차는 독재권력이 쳐놓은 바리게이트를 통쾌히 뚫고 지나갔고, 그로 인해 한 두 번은 휘청거렸지만 민주화의 대오는 단단했습니다. 우리는 이 열차 안에서 이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공통의 허다한 경험을 공유했습니다. 비록 수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사회변혁을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이 공통의 경험은 <386세대>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고, <세대의식>으로 살아났습니다.

동시에 우리들은 이 열차의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산업단지의 굴뚝 연기를 역동성의 풍경으로 감상했고, 자고 나면 솟아오르는 빌딩과 아파트 숲을 기회의 상징으로 탐닉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앞의 <산업화 세대>가 고생 고생해서 이룩한 결과물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97년 IMF외환위기로 <산업화세대>들이 절망 할 때 <386세대>에게는 새로운 취업의 문이 열렸고, 헐값이 된 집과 주식으로 큰 이득을 보았으며, 한푼 두푼 목돈 마련으로 저축하던 아파트 청약저축통장이 지금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신식 아파트를 당첨받는 로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386세대>에게는 사회변혁의 <세대의식> 속으로 물질적 풍요라는 경제적 성취감이 파고 들었습니다.

얼핏 이질적으로 보이는 이 두 개의 성취감이 그런대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두 풍경 사이에 엄청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1990년 소련의 개혁·개방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소련 사회주의의 종말 혹은 미국 자본주의의 승리로 이해되었습니다. 소련의 붕괴는 동서냉전의 격전지인 한국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상실’입니다.

그 상실감은 문학계에서 잘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1991)을 기억하시나요. 소설은 자신을 따라 운동권에 뛰어든 라라의 죽음으로 인해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죄의식을 느끼며 살아가는 <386세대>의 90년대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박상우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1991)은 더욱 극명합니다. 이념은 사라지고 허무만 남은 눈 내리는 밤, 각자 자기의 길로 흩어지고 마는 동료들. <386세대>는 이렇게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물질적 풍요의 달콤함이 사회변혁의 <세대의식> 속으로 파고든 것입니다.

혹여나 <386세대>가 부패했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아마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던 사이에 어느듯 <386세대>의 손에는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1992)가 들려 있었습니다. <386세대>에게는 이념은 사라지고 서정성이 피어났습니다. 그리고 부가 곁들어진 권력은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비극적입니다.


지금 돌아보면 이러한 <386세대>의 비극은 386세대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386세대> 앞의 <산업화 세대>는 냉전구조를 경제적 기반으로 하는 산업화였습니다. 굳이 설명하자면 소위 ‘수출주도 공업화’입니다. 냉전구조가 해체되면서 수출주도 공업화 체제는 그 수명을 다했고, <386세대>는 새로운 축적체제를 구축해야했습니다.

그것은 <386세대>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386세대>는 다른 것을 탐닉하고 있었습니다. <386세대>가 뒷세대에게 진 빚이 있다면 앞세대의 결실로 부와 권력을 얻어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세대를 위해 새로운 축적체제를 구축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386세대>는 권력집착적이었습니다.


이쯤에서 한국사회의 위기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현재 경제적 위기라고 합니다. 산업화 이후 새로운 축적체제를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고용 위기가 찾아왔고, 이 위기는 저출산 위기로 연결되어 인구절벽의 위기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인구절벽의 위기는 급기야 지방소멸의 위기로 연결되고,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는 뭇 생명들처럼 지방청년의 지방 탈출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실로 전반적 위기국면입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경제적 위기로 인해 촉발된 전반적 위기보다 더 염려되는 것은 이 위기국면을 돌파해나갈 <새로운 세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근본적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필자는 이 근원적 위기의 책임은 전적으로 <386세대>에게 물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386세대>는 한국사회에서 부(富)면 부를, 권력이면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너무나 견고한 껍데기로써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 사회의 기회를 모조리 독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위눌린 뒤 세대는 기성세대를 다음과 같이 비아냥거리고 있습니다, 『할머니, 도둑질 좀 그만해요: Stop Mugging Grandma』(2019)라고! 이 책이 예일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되었는데, 파이낸셜타임스는 ‘누가 밀레니얼세대의 미래를 도둑질해갔는가’라고 기성세대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대>는 언제나 기성세대로부터 자양분을 빨아 먹으면서 성장하지만, 그러면서 그들은 기성세대에 대한 거부와 저항의 반역을 준비하는 법입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동시대의 모순에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체험이 집합적으로 일어나고 그것이 미래를 투시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이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지금 젊은이들은 90년대 상실의 시대를 경유하면서, 외환위기를 건너면서, 2000년대에 들어와 문민정부의 탄생과 좌절을 목도하면서, 2008년 촛불이 명박산성에 가로막힐 때, 2014년 세월호의 아픔이 2016년 광화문촛불로 일어날 때, 전율을 경험하였습니다. 이런 막장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새로운 <세대단위>가 어디선가 시대적 사명을 가지고 <세대위치>를 자리잡아가고 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기성세대를 향한 전복의 꿈을 어디에선가 몰래 키워나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기성세대의 논리가 그 유효성을 다해감에 따라 <새로운 세대>의 사명감은 더욱 비장해지는 법입니다. <386세대>가 현 시대를 견고히 붙잡고 있으면 있을수록 <새로운 세대>의 비장함과 저항은 더욱 강고해질 것입니다. <386세대>가 굳이 고해성사한다면 이들이 숨 쉴 공간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새로운 세대>를 기다리면서 필자는 그리스신화에서 ‘친부살해(親父殺害)의 전통’을 상상하곤 합니다. 헤시오도스의 『테오미니아(신통기)』에서는 가이아가 낳은 아들들이 그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세상을 통치하고자 합니다. 심지어 크로노스는 어머니가 준 금강석 낫으로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자르고 권좌에서 쫓아냅니다.

『오이디푸스 신화』에서도 왕자 오이디푸스가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테바왕국과 그 왕비를 차지합니다. 기성세대인 아버지는 <새로운 세대>인 아들의 출현을 막기 위해 자식을 자신의 배 속에 가두기도 하지만, 자식은 아버지의 자양분을 먹고 <새로운 세대>를 만들어갑니다. 이것이 진보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사회가 위기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저항과 반역의 세대가 부재하다는 것은 <새로운 세대>가 아직 싹트지 않은 어두움의 시대임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필자는 <새로운 세대>가 위기국면 어디쯤인가에서 기성세대의 노욕을 조롱하며 반전의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이런 상상을 한다고 해서 역사적 낭만주의자라고 비꼴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