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영화 같은 현실, 현실 같은 영화 ‘컨테이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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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화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마른기침 소리. <컨테이젼(Contagion)>은 영화 시작부터 불길한 모양새를 띤다. 영화 제목은 접촉에 의한 감염, 전염병을 뜻하는 단어다. 홍콩 출장을 마치고 미국 시카고로 돌아온 글로벌 기업 애임 엘더슨(AIMM Alderson)의 중역 베스 엠호프(기네스 펠트로)는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고 사망한다. 이윽고 베스의 어린 아들도 엄마와 비슷한 증세를 보이더니 숨을 거둔다. 사인은 미확인 바이러스 감염이다. 문제는 베스가 무수히 많은 사람과 접촉했다는 점이다. 남편 토마스 엠호프(맷 데이먼)는 격리돼 역학 조사를 받는다. 면역 판정을 받은 그는 딸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미국 시카고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미확인 바이러스는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간다. 세계화는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었다. 베스가 홍콩 출장에서 스쳤던 이들에서부터, 이들이 이후 스친 또 다른 사람들까지 신종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삽시간에 퍼져 나간다. 비상이 걸린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는 역학조사관 에린 미어스 박사(케이트 윈슬렛)를 감염 현장에 급파한다. 그는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임무를 수행한다.  또 질병통제센터의 연구원들은 목숨을 걸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다.

예방책도 치료책도 없는 상황에서 사망자가 늘어가자, 유언비어는 바이러스처럼 번진다. 블로그를 운영하는 자칭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앨런 크럼위드(주드 로)는 “이 병이 생화학 무기와 관련 있다”, “질병관리센터와 세계보건기구가 치료약을 숨기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린다. 또 개나리꽃이 바이러스 특효약이라는 가짜뉴스를 퍼트려 큰돈을 번다. 결국 그는 체포되지만, 가짜뉴스로 번 돈으로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다.

모든 일이 해결된 뒤 앨런 크럼위드는 또 다른 가짜뉴스를 생산, 배포한다. 대중이 그의 말을 신뢰한 이유는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장 앨리스 치버 박사(로렌스 피시번)가 기밀 정보를 미리 알고 도시가 폐쇄되기 전 약혼녀를 대피시켰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정부에 대한 불신은 시민들을 폭력적으로 변신시켰다. 개나리꽃 치료제를 구하기 위해 약국 앞에 줄을 선 시민들은 50개 한정 판매 소식을 듣고 분노하며 약국을 턴다.

위기 앞에 인간의 진면목은 드러나고 세상은 초토화된다. 공포에 감염된 대중은 식량과 치료제를 두고 약탈과 방화를 일삼고 개발도상국은 선진국의 백신 독점을 의심한다. 결국 정부는 군 병력을 출동시킨다. 영화는 막바지에 들어 바이러스 최초 발병 경로를 드러낸다. 기업 애임 엘리슨은 사업 확장을 위해 무분별한 벌목을 벌인다. 갈 곳을 잃은 박쥐는 인근 돼지 축사로 서식지를 옮긴다. 박쥐가 떨어뜨린 먹이를 돼지가 먹는다. 비위생적이고 비좁은 우리 안에서 병균은 온 돼지에게로 퍼진다. 돼지 중 한 마리는 식당으로 팔려간다. 이 돼지고기를 조리하던 요리사는 씻지 않은 손으로 베스와 손을 잡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전대미문의 전염병 사태의 출발은 영화 초반부 베스의 손과 연결된다. 화면은 홍콩국제공항의 바에 앉은 베스를 비춘다. 그의 손이 닿은 휴대전화와 입을 댄 맥주잔, 땅콩 그릇, 베스의 손에서 점원의 손으로 넘어간 신용카드. 전염의 직접적 경로는 손이다. 인간이 탓할 누군가는 없다. 현대 전염병은 ‘인수공통감염병’이 대부분이다. 이유는 교통 발달, 환경 파괴, 기후 변화, 가축 사육의 공장화 등이 꼽힌다.

신종 전염병이 창궐하고 치료약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컨테이젼>은 2020년을 맞은 대한민국의 현실과 비슷하다. 접촉에 의한 감염, 아무도 집 밖을 나서지 않아 텅 빈 거리, 빠른 속도로 번지는 신종 바이러스, 가짜뉴스와 음모론, 공포와 불안에 떠는 대중은 현실과 유사하다. 특히 영화에 나온 다양한 인간 군상은 현실과 닮아있다.

영화에서 죽어가는 순간에도 다른 이를 챙기거나, 제약회사의 거액 제의를 거절하고 사명감으로 개발한 백신을 방역 당국에 무상으로 건넨 이들은 현실에서 전국 방역 최전선에 서서 목숨을 걸고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수많은 의료진과 겹친다. 반면에 사람들의 공포와 불안을 돈벌이 기회로 삼는 이들도 현실에 존재한다. 가짜뉴스를 퍼트려 돈을 챙긴 앨런 크럼위드는 대한민국에서 조회 수를 올리기 위해 가짜 상황극을 펼친 유튜버들이나 단편적인 사실만 알려 대중을 혼란에 빠트리는 일부 언론과 포개진다. “누군 죽고, 누구는 돈을 벌어요. 스페인 독감으로 부자된 사람 많아요.” 영화에 나오는 대사가 입가에 씁쓸하게 맺힌다.

각자도생을 외치며 자신만 살겠다는 이기심을 내세우거나, 타인을 바이러스 덩어리로 여기며 누군가의 탓만 하는 이들도 현실에 존재한다. 말도 안 되는 코로나19 예방법을 출처를 속여 퍼트리거나, 사재기로 마스크를 사들여 비싼 가격에 되파는 이들이다. 이웃을 배려하고 경제적 약자의 어려움에 공감하는 치버 박사가 가까스로 개발한 백신을 누구보다 먼저 접종하는 모습은 기어코 경계선을 만들어내는 기득권의 사고방식에 닿아 있다. 지옥을 만들어내는 건 바이러스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다.

<컨테이젼>은 코로나19와 유사한 점 때문에 최근 관심을 받고 있는 영화다. 9년 전 상상으로 만들어낸 영화 속 풍경은 현실과 비교해 낯설지 않다. 감염을 피해 외출을 자제하고 집에서 <컨테이젼>을 보게 된다면, 현실과 비슷한 상황에 비춰 감탄하기보다는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에 집중하기를 바란다. <컨테이젼>을 연출한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바이러스에는 이데올로기가 없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인간적인 감정이나 감염 환자들의 사연을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다. 대신 인류가 바이러스의 원인을 찾고 신약을 연구하고 사태에 대처하는 면면을 상세히 비춘다. 이는 정쟁이나 힐난을 위한 대상을 찾는 것보다 전염병을 이겨내는 게 중요하다고 알려주는 것 같다. <컨테이젼>이 전염병과 마주한 사람들의 본성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영화에서 바이러스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것은 공동체를 배려하는 마음이다. 힐난해봐야 감염병 확산을 막을 수는 없다. 인류가 사라지지 않는 한 감염병은 없어지지 않는다. 가족과 집단, 사회를 이루며 전 세계가 이어진 인류는 앞으로도 감염병에 맞서야 할 것이다. 신종 바이러스가 창궐하면 반드시 퍼질 것이며, 정확한 원인과 경로, 백신 개발까지 지난한 과정은 또 다시 발생할 것이다. 그때마다 도시는 황폐해지고 사재기나 폭동은 예견된 수순처럼 이어질 것이다. 전쟁보다 치명적인 인간의 이기심을 마주할 것이다.

바이러스는 면역력이 약해지면 숙주에게 침투한다. 의료 수준이 높아지고 생활수준이 좋아지고 과학이 발전한다고 바이러스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몸과 마음이 무너지면 잠식하고 타인에게 옮겨간다. 그래서 항상 건강한 사고와 면역력이 필요하다. 영화에서 에린 미어스 박사는 감염병의 공포로 불안에 떠는 동료에게 말한다. “제발 손으로 얼굴 그만 만져요.” 대표적인 감염병 예방수칙은 자주 손을 씻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