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동산병원에서] ⑥ 대구의 희망이었던 사람들

한 달 간 대구동산병원에서 일한 간호사의 수기
"한푼 대가를 바라지 않은 봉사자들. 이분들이 계셔서 우리가 숨을 쉬었습니다."

21:49

[편집자주] 코로나19 최전선이 되어버린 대구에 자원해 3월 3일부터 31일까지 환자들을 돌보고 돌아간 김수련 간호사가 그간의 경험을 본인의 SNS에 올렸습니다. <뉴스민>은 김수련 간호사의 동의를 얻어 김 간호사의 경험기를 연재합니다.

[글쓴이주]저는 3월 초 서울에서 대구로 파견을 자원해 한 달간 일하고 돌아온 간호사입니다. 집이 낯설고 아무 일 없는 일상이 당황스럽습니다. 남겨두고 떠나온 다정하고 선량한 대구 분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요. 모든 분들이 건강하길 바라요. 어떤 고난에도 여러분들이 삶이 온전하기를, 지극히 평안하기를 빕니다.

우려하시는 바와 달리, 밥은 잘 먹었습니다. 대구 전역에서 많은 분들께서 끼니마다 먹을거를 양껏 보내주셔서 더치커피도 마시고 따뜻한 삼계탕도 먹고 영양 가득한 도시락도 잘 챙겨 먹었습니다. 홍삼도 먹고 아로니아도 먹고 귤도 사과도 토마토도 먹고 하여간 먹는 건 고루 잘 보내주셨습니다. 제가 먹은 것들은 시민분들의 우려와 걱정인 것을 잘 압니다. 꾸역꾸역 잘 챙겨먹고 보무도 씩씩하게 들어가 일도 걱실걱실 했습니다. 건강합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매스컴에서 간호사들의 모습을 숱하게 보셨을 거예요. 방호복을 입거나 땀에 절었거나 얼굴에 뭘 덕지덕지 붙인. 그렇지만 간호사의 목소리를 들으신 적은 있으신가요. 현장에서 가장 가까이, 가장 긴 시간 환자와 접촉하고 있고 매일같이 온갖 드라마들이 펼쳐지는데, 이상하게 간호사들의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아요. 그저 그 겉모습만, 그 고생의 외양들만 눈에 띌 뿐 우리 목소리는 음소거 처리한 영상처럼 잘 들리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우리 얘기를 하고 싶어요. 속에 옹골차게 차오르지만 내뱉지 못한 간호사들의 이야기를요.

[대구동산병원에서] ① 간장에 조린 간호사들
[대구동산병원에서] ② 곡괭이를 든 간호사들
[대구동산병원에서] ③ 공공재가 된 간호사들
[대구동산병원에서] ④ ‘존버’하는 간호사들
[대구동산병원에서] ⑤ 맨 앞에 선 간호사들

자가격리 기간이 종료되고 최종 음성 판정을 받았습니다. 저희 병원에서 대구로 갔던 모든 간호사들이 음성을 받았고, 긴장 속에서 2주를 보냈던 모든 분들이 평안을 되찾았습니다.

제 병원으로 돌아가 다시 근무하고 있어요. 저는 매일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저 대신 근무를 뒤집어써 준 동료들을 봅니다. 제가 대구로 간 것은 저 혼자의 결정이 아닙니다. 제 부서와 병원이 승인하고, 저 대신 제 부서의 간호사들이 일을 떠맡고 근무를 채웠습니다. 대구에 가지 않으신 분들도 동료 한 명을 보내기 위해 기꺼이 없어진 휴일을, 엉망이 된 번표를 감수했습니다. 병원 차원에서 대구로 파견한 한 명, 한 명의 간호사들은 그 어깨에, 손에, 수십 명의 양보와 선의를 주렁주렁 매달고 옵니다.

그리고, 의료인과 그들의 동료들 말고도, 그림자 속에 서 계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날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어요.

▲경북대병원 간호사들이 코로나19 중증환자를 돌보고 있다. (뉴스민 자료사진)

그날은 제가 대구에 도착하고 3일째 되는 날입니다. 저는 데이(7~15시) 근무였고, 중환자실에 간호사는 고작 두 명이었어요. 중환자실에 기관삽관을 한 환자가 입실하기로 해 저희는 재빠르게 모니터와 인공호흡기, 약물들과 침상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환자는 맥박이 소실된 상태에서 도착했습니다. PAPR을 착용한 한 분이 환자한테 올라타 심폐소생술을 하고 계셨어요. 환자를 침상으로 이동시키고 간호사들이 제세동기를 연결하고 앰부 백(고농도 산소 공급 도구)를 연결하기까지 흉부 압박을 지속했습니다. 중환자실 도착 이후 18분 동안, 보호구 없이 2분만 해도 힘든 흉부 압박을 PAPR을 뒤집어쓴 그분과 저 둘이서 교대로 진행했습니다.

이브닝(15~22시)근무자가 도착했지만, 다른 환자들 또한 돌봐야 했기 때문에 데이 근무자 중 한 분과 이브닝 근무자들은 인수인계를 해야 했고, 교수님은 심폐소생술 리더를 해야 했고, 헬퍼(도움을 주기 위해 온 의료진)들 중 레벨D만 착용한 분들은 비말이 튀어 감염 위험이 높기 때문에 약물을 믹스하고, 기록을 도와주는 업무만 도와주실 수 있으셨어요.

저는 중환자실 5년차고, 수없이 많은 심폐소생술에 참여했습니다. 온갖 급박한, 이상한, 힘든 심폐소생술을 해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제가 살면서 해 본 것 중 가장 힘들었어요. 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 한 군데도 안 젖은 곳이 없는 상태로 퇴근 시간을 1시간 넘기고, 제가 심폐소생술에 투입된 탓에 혼자서 모든 인수인계와 다른 환자 모두를 도맡았던 다른 데이 근무자 선생님과 함께 병동에서 나왔습니다.

이 지옥 같은 심폐소생술을 함께한 분, 그분이 안 계셨다면 가만히 입고만 있어도 땀이 흐르는 방호복을 입고 저 혼자 18분간 격렬한 소생술을 견뎌야 했을 겁니다. 그분은 고작 스물한 살, 소방관 지망생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의사도 간호사도 아니고요, 그냥 돕고 싶어서 여기 병원에 연락했더니 오래요. 그래서 왔어요’ 해맑게 웃으면서 말하던 그 얼굴은 부서(부서원들이 제 듀티(업무) 다 뒤집어씀)며 엄마, 아빠 반응(비밀로 한다!)이며 자가격리 할 공간(나는 집에 있고 남편을 내쫓자)까지 치열하게 재고 따져서 안전한 결론을 다 만들어 놓고 나서야 내려온 저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이런 분들은 구석구석에서 자꾸 나와요. 가장 어려울 때, 누군가 위기를 겪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나서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 도와주고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는 사람들.

한 분 더 얘기해볼까요?

▲대구로 파견돼 일한 구급대원이 보호장비를 점검하고 있다. (사진=대구소방본부)

보통 중환자실에서 흉부 엑스레이를 찍기 위해서는 방사선사 선생님과 담당 간호사가 달라붙습니다. 흉부 엑스레이는 많은 분께서 찍어보셨을 거예요. 가만히 서서 네모난 판을 끌어안고 있으면, 방사선사 선생님이 ‘숨을 들이쉬시고, 참으세요’라고 말씀하시죠.

중환자실 환자들은 서 있을 수도 없고, 본인 상체를 들어 올려 판을 끌어안을 수도 없어요. 그래서 일반적인 엑스레이는 판을 가슴에다 놓고, 방사선을 등 쪽으로 쪼여 영상을 찍지만, 중환자실 환자는 침대에서 눕거나 앉은 상태로 판을 등 뒤에다 놓고 방사선을 가슴에 쪼여 영상을 얻습니다.

그러기 위해 환자의 등 뒤에다 몇kg 짜리 무거운 판을 밀어 넣는 일은 대단한 중노동입니다. 방사선사선생님들도, 간호사들도 대단히 힘들어합니다. 환자의 상체를 들어 올리고, 무거운 판을 등 뒤로 밀어놓고 조심스럽게 환자의 가슴이 판 안에 맞춰 들어오도록 조정합니다. 복부 엑스레이를 찍어야 하면, 환자를 당기고 밀어 반 바퀴 굴린 후 판을 밀어 넣어야 해요. 비틀린 자세로 환자의 체중을 견뎌야 하기 때문에 손목이나 허리 부상이 잦습니다.

제가 그날 봤던 환자는 ECMO(체외 심폐순환기)를 가지고 있었고, 어린애 손목만한 관이 목과 허벅지의 굵은 혈관으로 들어가 있었어요. 또한 중심정맥관이라고 해서, 농도가 높은 약물, 또는 말초혈관으로 들어갔을 때 혈관에 손상을 줄 수 있는 약, 또는 다량의 수액을 주기 위해서 큰 혈관에 잡는 주사가 있는데 그것도 중요한 약들이 주렁주렁 달린 채 쇄골 밑 정맥에 꽂혀 있었어요. 보통 이런 경우 관들을 안전하게 유지하면서 영상을 찍기 위해 긴장합니다.

그런데 그날은 너무 힘든 날이었어요. 저는 제가 가진 에너지의 태반을 다 썼고 보호복 아래서 거의 녹아내린 채 너덜거리고 있었어요. 제가 환자 옆에 서서 환자를 들어 올리려고 시도하는데, 아무리 낑낑거려도 환자가 들리지를 않는거에요. 방사선사 선생님도 힘들고, 저는 애가 타고. 그때 한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선생님, 비키세요.’

그분은 응급구조사 선생님이셨어요. 선생님은 저를 옆으로 치운 뒤에 가뿐하게 환자를 들고 내려 영상을 촬영해 주셨습니다. 세상 멋있어서 저는 넋이 나갔습니다. 저 박력넘치는 ‘비키세요’를 해보고 싶어서 여러 번 엉성하게 따라해 봤지만, 제가 하면 그냥 성격파탄자 같고 도무지 그런 무게감이 우러나오지를 않네요.

성함조차 묻지 못한 응급구조사 선생님을 저는 참 많이 뵈었어요. 팔다리가 없어지도록 바쁜 간호사들을 위해 대신 환자를 이송하고,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는 산소통을 어떻게든 찾아서 들고 오고, 새벽에도 나와달라는 연락을 받으면 자다가도 뛰어나오던 분. 휴일도 없이 일하는 스케줄에도 한마디 불만이 없으셨습니다.

이분 외에도 계십니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의 욕창 예방을 위해 자세를 변경할 때, 흉부 엑스레이를 찍기 위해 환자 상체를 들어야 할 때, 인력이 모자라 10kg짜리 수액 상자를 몇 개씩 들고 옮겨야 할 때, 힘이 모자라 호흡까지 가빠오는 간호사들 옆에 제일 먼저 오시던 분들, 힘든 일이 있으면, 망설임 없이 저희를 비켜서게 하고 대신 뒤집어쓰던 분들이 계십니다.

응급구조사 선생님께서는 본인 직장에 연차를 내서 대구로 오셨습니다. 한 줌의 희망을 사기 위해서, 연차를 모조리 소진할 때까지 대구에 머무르고 떠나셨습니다. 아무 대가도 없이 일하셨고, 그런 걸 바라신 적도 없습니다.

▲코로나19 대응하는 대구가톨릭대병원 의료진들(사진=대구가톨릭대병원 제공)

소방관 지망생 선생님은 대구경북지역 코로나 확진자 급증세가 시작됐을 때, 병원 측에 직접 연락해 봉사 의사를 전달하고, 3주간 변변한 휴일 없이 필요할 때마다 온 병동을 다 들어가 필요한 일들을 했어요. 환자 체온이 떨어지고 신체 말단의 피부색이 거멓게 변해가는데 워머가 없어 간호사들이 발을 동동 구르면 어디서 정수기를 찾아다 온수(뜨거운 물 안됨. 환자 화상 위험이 있으므로 절대 뜨거운 물을 쓰지 말아주세요)를 장갑에 담아와 환자 손발에 대주고, 폴대가, 시트가, 베개가 없어 미친 사람처럼 헤매고 다니면 어디서 땀 뻘뻘 흘리며 찾아다가 손에 쥐여 줬습니다.

보호복을 입고 확진자를 돌보러 들어오는 간호사들 모두 어려운 각오를 했고, 누구 하나 빠짐없이 녹초가 되어 나갑니다. 매일같이 비말을 뒤집어쓰고 뛰어다니며, 봉두난발하고 땀에 푹 절어 나옵니다. 그렇지만 저희는 면허가 있고 전문인으로서 책임감과 각오가 있습니다. 어떤 날들은, 정말 힘이 다해 숨이 막히는 날들은 그 책임에 기대 하루를 견딥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순전한 선의로 모든 일들을 감수했습니다. 격전지와도 같은 곳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의료진과 함께 호흡하는 일을 오직 돕고자 하는 마음이 할 수 있다. 이 사실이 설렙니다.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의 선의가 어떤 모양인지, 제가 지켜보고 기록할 수 있어 큰 영광입니다.

보건복지부에서, 혹은 병원 차원에서 대구로 파견하는 의료진은 의사, 간호사, 간호조무사, 세 개의 직종입니다. 이 외의 직종들, 반드시 필요하지만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요. 약사, 임상병리사, 방사선사, 그리고 응급구조사. 레벨 D를 착용하고, 혹시나 오던 길에 문제가 생길까 기저귀를 차고 환자를 수없이 이송한 119 구조대 이송요원, 세 자릿수의 의료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늦은 저녁까지 그 자리에 계신 배식요원, 온갖 의료폐기물들을 들어 옮기고 치우고, 방역을 도와주신 수많은 손길들. 한푼 대가를 바라지 않은 봉사자들. 제가 언급하지 못한 수많은 분들. 이분들이 계셔서 우리가 숨을 쉬었습니다.

언젠가, 모든 일이 지나가고, 이분들에게 대구에서의 기억이 흐려지고 지워져 남지 않게 되더라도, 부디 대구는 이분들의 대가없는 희생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분들이 대구의 희망이었고, 대구가 이분들의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