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교협 시사 칼럼] 의태의 유능함과 2020년 5월의 숙제 /김은영

18:44

사회적 거리두기로 일상화된 매일. ‘비누로 거품을 내어 30초간 구석구석 손 씻기’라는 글귀를 어디서든 발견한다. 예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버스의 손잡이, 계단을 오르려다 무심코 만진 난간, 엘리베이터 버튼, 건네받은 거스름돈이 이제는 예사롭지 않다.

▲[사진=대한민국 정책브리핑]

강박장애(obsessive-compulsive disorder: OCD)란 특정한 생각이나 염려를 떨치지 못하고 손 씻기 등의 행동을 강박적으로 수행하는 경우 등을 말한다. 그리고 강박적 손 씻기 증상을 보이는 이들에게 이유를 물으면, 아마도 그들은 점심에 먹은 국밥그릇에 주방장의 손이 닿았을 거라 걱정하면서 자신이 만졌던 수저통도 누군가가 먼저 만졌을 것 같다고 대답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우리의 최근 일상과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OCD(와 모든 정신장애의) 진단 기준의 하나로 가장 결정적인 항목인 ‘사회적, 직업적, 혹은 다른 중요한 기능에 현저한 고통이나 손상을 초래’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강박적 일상이 지금의 코로나19 시기에 적응적이라는 점일 것이다.

우리는 코로나19라는 국면에서 OCD를 충족시킬만한 손 씻기와 체계적 방역을 통해 놀라울 만큼의 위기대응능력을 보여주었다. 마스크를 일자에 맞춰 구매하고, 꼼꼼히 쓰고, 교회와 직장과 병원과 버스와 지하철에서 ‘강박적’ 방역을 수행하면서 일상을 지켜냈다. 세계 모든 국가가 봉쇄라는 극단적 카드를 쓰면서도 무기력하게 확진자와 사망자 수를 늘려갈 때, 우리는 철통같은 역학조사와 빈틈없는 추적을 통해 확진자와 격리자를 관리하고 사망자 수를 줄였다.

국민 모두가 뉴스특보에 하루의 주파수를 맞추며 확진자의 동선을 온라인에서 공유하고, 마스크를 쓰지 않는 이웃과 동료를 채근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우리가 선망하던 국가들의 시스템이 봉쇄로 인해 줄줄이 마비되었을 때, 우리는 그곳에 살던 교포들을 국내로 실어 날랐다. 우리의 방역시스템과 국민 모두가 합심한 노력은 놀라운 것이었고, 자랑스러워할만 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지난 3개월간 모두는 범국민적으로, 마치 하나의 유기체가 된 것 마냥 방역에 임했다.

일반적으로, 의태(mimicry)란 유기체가 스스로를 적으로부터 보호하거나 먹이를 잡아먹기 위해 주변에 맞춰 자신의 모양, 색깔, 자세 등을 바꾸는 현상을 말한다. 코로나 19라는 위기 앞에서 우리는 마치 하나의 유기체가 된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개개인의 행동을 집단의 요구에 조율하며 움직였고, 이는 집단적 의태와 버금갈만한 현상일 것이다. 그리고 질문해본다. 우리가 어떻게 그토록 방역에 유능한 집단적 의태를 보일 수 있었는지 말이다.

여기에서 잠시 느슨한 연상을 시도해보자. 이렇듯 유능한 의태가 과연 우리에게 낯선 것인지 말이다. 짧은 기간 동안, 범국민적으로 힘을 합쳐 무엇인가에 몰두할 수 있는 유능함. 연상은 금세 유사한 대상을 찾아낸다. 국채보상운동, 물산장려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4.19 혁명운동 등이 떠오른다. 우리의 앞선 세대들은 시대의 요구 앞에서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가 되어 불의에 맞섰고, 우리에게 범국민적 의태로서의 ‘운동’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연상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70년대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된 새마을 운동은 어떠한가? 예외일 리 없다. 최근의 보수 논단들이 코로나19 위기 대처능력의 저력을 새마을 운동의 정신에서 찾는 것이 결코 우연일리 없듯이 말이다.

▲새마을 운동 [사진=우리역사넷]

느슨한 연상에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도대체 왜 우리는 이러한 집단적 의태에 유능한가라고 말이다. 그리고 가설적 답변을 하나 던져본다. 식민지 지배와 수탈, 해방과 혼란, 전쟁과 피난, 그리고 급격한 근대화의 혼란과 변화의 역사에서 우리의 잠재적 기억과 유전자 어딘가에는 잦은 위기에 대한 불안과 생존을 위한 집단적 의태로서의 속성이 획득형질로 등록되어 있다고 말이다. 변화와 위기에 둔감하려 해도 둔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대의 위험과 주변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생존과 직결된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했기에, 우리는 유독 주변과 ‘대세’에 민감한 유기체적 ‘운동’에 ‘유능’한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집단적 의태는 급변하는 격동기와 위기의 매 순간에 생존을 위해 자연스럽게 터득한 적응방식이었을 것이다. 외부에서 볼 때, 의태에 유능한 우리의 생존방식은 ‘냄비’로 보였을 수도 있다. 집단적으로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가라앉는 속성. 순식간에 타오르는 집단적 열광과 쉽게 식어버리는 열기에 대한 부정적 평가일 수도 있지만, 달리 보면 이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심각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집단적 의태는 결코 오래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가장 필요할 때 타올랐다가, 위기가 지나면 다시금 개개인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다 더 적응적 삶이었을 터이니 말이다. 즉, 냄비라는 비유는 변화의 속도를 꼬집는 한편, 집단적 의태라는 존재에 대한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집단적 의태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는 힘으로 작용하였다면, 이 유능함이 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을까. 새마을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키며 산업화라는 요구에 부응하도록 집단적 의태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군사독재는 자신을 가로막는 장애물 앞에서 유능한 의태의 힘을 효과적으로 빌려왔다.

5.16을 혁명이라 부르며 들어선 첫 번째의 군사정권. 12.12 쿠데타에 이어, 이듬해 계엄령 해제와 군사독재 철폐를 요구하던 5월의 광주를 무참히 학살함으로써 들어선 두 번째의 군사정권. 그리고 옷을 벗고 들어선 세 번째의 군사정권. 세 번에 이은 군사독재에서 경제성장이라는 시대적 과업에 유능했던 의태는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의 희생과 죽음을 묵인하였고, 북의 위협이라는 카드 앞에 인권과 민주화에 대한 요구는 불순분자로 낙인찍혔고 낱낱이 색출되었다. 당시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며 불순분자를 효과적으로 도려내고 색출해내었던 의태적 유능함이 만일 오늘 우리가 코로나19라는 위기에서 확진자를 추적하고 범국민적 방역을 일사분란하게 해낼 수 있었던 유능함과 동일한 유능함이라면, 너무 섬뜩한 연상일까?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의 모습 [사진=518기념재단 홈페이지]

2020년 5월, 코로나19의 위기를 의태적 유능함을 통해 극복하는 것보다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확진자 추적과 자가격리의 관리에서 인권침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의태의 시야에서 쉽게 외면되었을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희생양 만들기라는 유혹을 뿌리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40주년을 맞는 5.18에 대해 다시금 논의가 분분하다. 방관되었던 그리고 잊히도록 강요되었던 광주의 5월. 5월의 광주는 세 번에 이은 군사독재를 종식시킬 수 있었던 힘이었고, 동시에 오늘날 인권을 고려할 수 있는 의태적 유능함의 또 다른 발판이었다. 5월 광주를 제자리에 돌려놓는 일. 2020년 5월의 봄에 다시금 내려진 숙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