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세상이 바뀌려면···. ‘브이 포 벤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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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0년 가상의 미래,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뒤 영국은 전체주의 국가로 변했다. 영국인들은 ‘하나 된 국민과 하나 된 조국’을 강조하는 셔틀러 의장(존 허트)의 강력한 통치 아래 통제된 삶을 산다. 피부색과 정치적 성향이 다르면, ‘정신집중 캠프’에 끌려가 실종된다. 국가는 국민에게 질서와 평화 대신 침묵과 순종을 강요한다. 밤에는 허가증 없이 밖을 다닐 수 없다. 거리 곳곳에는 카메라와 녹음 장치가 달려 있다. 자유로운 비판과 사고가 금지됐다. 국영방송은 거짓으로 국민을 속인다. 하지만 국민들은 불만을 갖지 않는다.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이비(나탈리 포트만)는 통금을 무릎 쓰고 밤에 거리에 나섰다가 정권의 하수인 핑거맨에게 봉변을 당할 뻔 한다. 위기의 순간,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망토를 두른 의문의 남성 V(휴고 위빙)가 나타나 이비를 구해준다. 그의 얼굴은 가이 포크스 가면으로 가려져 있다.

V의 계획에 휘말리게 된 이비는 그의 사상에 점차 동조한다. 반체제 인사를 부모로 둬 오히려 더 체제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온 이비는 변해간다. 20년 동안 계획을 세운 V는 방송국을 장악해 국가의 부패를 폭로하고 1년 뒤인 11월 5일 총궐기하자는 메시지를 전한 뒤 사라진다. 1년 뒤 거리에는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사람들로 가득하다. 부조리와 부정으로 얼룩진 권력에 순응하던 이들이 스스로 권력의 주인이 되기 위해 한 발 내디딘 것이다.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이 흘러나오고 국회의사당은 화려한 불꽃 속에 몰락한다. 이는 V가 아니라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국회의사당으로 행진하던 국민들이 해낸 것이다. 20년에 걸친 V의 계획이 새로운 권력의 정점에 서는 것이었다면, 만약 국민들이 거리에 나서지 않았다면, 국회의사당 폭발은 쿠데타나 테러에 불과했다. “국민의 지지가 없이 성공할 수 없다.” 영화는 이 단순한 진리를 말하기 위해 132분을 바친다.

<브이 포 벤데타(2005년)>는 특이한 영화다. 개봉 당시 기자와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미국의 평론가 짐 호버먼은 ‘자극적이지만 공허한 영웅담’이라고 비판했다. 네이버의 기자, 평론가 평가는 5.5점(4명 참여)에 불과하다. 하지만 네티즌과 관람객 평점(7천783명)은 9.02점에 달한다. 온라인에서는 <브이 포 벤데타>의 명대사가 쏟아진다. 더 흥미로운 점은 지금도 영화 내용이 회자된다는 것이다.

특히 V가 쓴 가이 포크스 가면은 독재 정권의 폭력과 압제에 맞서 싸우는 저항의 상징이 됐다. 가이 포크스(1570~1606)는 1605년 11월 5일 영국 국회의사당을 폭파시켜 왕 제임스 1세와 대신들을 몰살시키려 했던 ‘화약 음모 사건’의 주동자다. 제임스 1세는 영국 국교회를 배타적으로 옹호하고 가톨릭과 청교도를 억압했다. 가이 포크스는 거사 직전 체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영국 왕실에서는 제임스 1세가 무사한 것을 기뻐하는 의미에서 불꽃놀이를 벌였다. 불꽃은 어떠한 위험이나 혼란도 없는 안전을 알리는 기쁨의 증거였다. 지금도 영국에서는 매년 11월 5일 ‘가이 포크스 데이’를 열고 있지만, 가이 포크스의 실패를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다.

V는 국가를 혼란에 빠트리는 테러리스트인가, 정의를 위해 폭력으로 악에 맞서는 영웅일까. 사회적 선(善)이나 위기 극복을 명분으로 내세워,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이 있다면 그건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저항권이 국민의 보편적 권리로 인식된 것은 가이 포크스가 죽은 지 한참 뒤의 일이다.

영국의 정치철학자 존 로크(1632~1704)는 저서 <시민정부론>에서 정부가 인민의 신탁을 배반하고 자연권을 침해하게 된다면 인민은 저항해 정부를 재구성할 정당한 권리를 가진다고 했다. 저항은 권력에 맞서는 사상적 기반이 됐다. 400여 년 뒤 전 세계 각국의 시위 현장에서는 가이 포크스가 활보하고 있다. 균형추가 무너진 권력의 반작용으로 생겨난 저항들이다. 그럼에도 권력의 성채는 여전히 깨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하다.

영화에서 두려움에 숨죽이던 이비는 V에게 국회의사당 폭파 계획이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 묻는다. ‘세상이 달라질까’라는 의구심이다. V는 이렇게 말한다. “건물에 권위를 부여한 국민이 힘을 합쳐 그것을 파괴함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침묵하고 순종하던 이비는 용기를 내어 V의 혁명에 동참한다.이미 평범한 사람들은 세상을 몇 차례나 바꿨다. 수십 년 전에도, 몇 년 전에도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에 저항했다. 저항의 촛불은 춥고 어두운 밤을 따뜻하게 비췄다.

문제는 이다음이다. 부당한 권력이 물러선다고 세상이 완전히 달라지진 않는다. 뒤틀린 세상을 바로잡는 것은 슈퍼히어로 한두 명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세상이 바뀌려면 나 자신부터 달라져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 출발점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이다. ‘남’이 아닌 ‘나’의 개혁은 변화로 나아가는 첫발이다. 그래야 공감과 소통이 가능해진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한걸음씩 나아가면서 같은 세상을 꿈꾸는 나와 다른 이들의 어깨에 의지해야 한다. ‘나만 옳다’는 건 옳은 게 아니다. ‘우리 편만 옳다’는 건 옳은 게 아니다. <브이 포 벤데타>에서 V는 이런 말을 남긴다. “나와 내가 만든 세상은 오늘 밤으로 끝난다. 내일은 새로운 세상이 찾아오겠지. 새로운 세상엔 새로운 사람들이 선택해 나가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