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의 김수영-되기] (4) 더러운 향로

16:46

더러운 향로

길이 끝이 나기 전에는
나의 그림자를 보이지 않으리
적진을 돌격하는 전사와 같이
나무에서 떨어진 새와 같이
적에게나 벗에게나 땅에게나
그리고 모든 것에서부터
나를 감추리

검은 철을 깎아 만든
고궁의 흰 지댓돌 우의
더러운 향로 앞으로 걸어가서
잃어버린 애아를 찾은 듯이
너의 거룩한 머리를 만지면서
우는 날이 오더라도

철망을 지나가는 비행기의
그림자보다는 훨씬 급하게
스쳐가는 나의 고독을
누가 무슨 신기한 재주를 가지고
잡을 수 있겠느냐

향로인가보다
나는 너와 같이 자기의 그림자를 마시고 있는 향로인가보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원인을
네가 지니고 있는 긴 역사였다고 생각한 것은 과오였다

길을 걸으면서 생각하여 보는
향로가 이러하고
내가 그 향로와 같이 있을 때
살아 있는 향로
소생하는 나
덧없는 나

이 길로 마냥 가면
이 길로 마냥 가면 어디인지 아는가

티끌도 아까운
더러운 것일수록 더 한층 아까운
이 길로 가면 어디인지 아는가

더러운 것 중에도 가장 더러운
썩은 것을 찾으면서
비로소 마음 취하여보는
이 더러운 길

글에서 인용한 ‘더러운 향로’는 <김수영 전집 1(시)>에 수록됐습니다.

희한하게도 김수영은 자신이 몸서리쳐지게 겪은 전쟁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남기지 않았다. 쓰다만 자전적 소설 「의용군」에 자신의 체험이 가장 많이 담겨져 있고, 포로수용소 시절 야전병원에서 겪은 짧은 일화를 산문 「면봉」과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 스치듯 밝혀 놓기는 했다.

포로수용소 시절 이야기라면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라는 시에서 제법 언급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 박수연은 이 시가 써진 게 전쟁 중인 1953년임을 환기하면서, 자유를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임을 시인이 강조했다고 읽었다. 아무튼, 이 모든 기록 어디에도 전쟁에게 받은 고통과 수치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는 없다.

▲한국전쟁 당시 포로수용소의 모습. [사진=전쟁기념관 홈페이지]
▲한국전쟁 당시 포로수용소의 모습. [사진=전쟁기념관 홈페이지]

전집에 의하면, 그가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고 나서 처음으로 쓴 시는 1953년 작 「달나라의 장난」인데, 1954년까지 쓴 시들에는 설움, 죽음, 고독의 정서들이 언제나 일렁이고 있다. 전쟁의 참화 직후에 저렇듯 개인적인 정서들로 가득 찬 시들을 쓴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김수영의 모든 시를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사건들에 일회적으로 반응하고 곧 그로부터 떠난 다른 시인들과는 달리” “그 사건들의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로부터 충당되고 지속되며 그 의미의 완성을 향하는”(박수연, 「국가, 개인, 속도-1950년대 시를 중심으로」) 시인이었다. 따라서 전쟁 직후 실존적인 문제에 몰두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만큼 전쟁의 충격이 컸다는 것을 방증하며, 전쟁의 충격을 내면화하는 동시에 그것을 우회하지 않으려는 의지로 읽어도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전쟁이 자신의 신체에 남긴 흔적을 내면화하면서 그것을 그대로 배설하지 않고 어떤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이중구속이, 1950년대 김수영 시의 가장 깊은 심층일지 모른다. (그렇게 보면, 그의 부인 김현경이 ‘사회주의에 대한 노스탤지어’라고 시인에게 들었다던 「도취의 피안」도 달리 해석할 여지가 생긴다.)

하지만 김수영의 설움, 죽음, 고독이 개인적인 실존의 영역에서만 운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정서들은 세계가 안으로 함축된 것이며 밖으로 드러나고자 하는 충동이기도 했다. 정확히 1950년대의 김수영은 그 위에서 자신을 정초하는 과정에 있었다. 이게 김수영의 시가 전쟁 직후 센티멘털리즘에 빠지지 않은 이유이다. 박수연의 지적대로 그의 시는 언제나 “사건들의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로부터 충당되고 지속되며 그 의미의 완성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예컨대 「나의 가족」은, 얼핏 보면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오는 상황을 노래하면서 “성스러운 향수와 우주의 위대감을 담아주는 삽시간의 자극을/나의 가족들의 기미 많은 얼굴에 비하여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며 소소한 생활에 머무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이 마지막 행은 시인의 영혼이 지금 가족 ‘안으로’만 휘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이 시는 정조 자체가 그렇게 밝은 게 아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쓴 시 「거미」에서 안과 밖으로 동시에 향하는 자신의 복잡한 내면이 자신에게 “설움”이라는 심리 상태를 안겨주었음을 고백한다. 즉 그는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무의식적인 이중구속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설움과 입을 맞추”게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의 “설움”의 정체는 이것이며 그리고 그의 밖으로 향하는 무의식을 거듭 제지하는 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물론 그는 이 공포를 훗날 자신의 내적 에너지로 전화시킨다)

전쟁 직후 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이러한 흐름들을 인지한 후에야 우리는 「더러운 향로」를 읽을 수 있다. 사실 이 시는 김수영이 ‘밖으로’ 일보를 내딛는 의미심장한 구절을 담고 있다. 그것은 첫 연 1~2행에 선언적으로 담겨?있는데, “길이 끝나기 전에는/나의 그림자를 보이지 않으리”는 「공자의 생활난」의 마지막 구절과 공명한다.

다시 말하면 김수영이 설움의 정서를 벗어나려는 어떤 몸부림이라고 받아들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가? 한편으로 그 스스로 “더러운 향로”가 표상하는 옛길과 “같이 있을 때” 자신이 “소생”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향로”로 표상되는 이전 세계에서 자신은 (무난히)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향로”는 “거룩한 머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신도 향로와 같이 “자기의 그림자를 마시고 있”으며 그는 분명히 “향로”를 좋아하고 있다. 시인의 영혼은 “향로와 같이 있을 때” 자신도 소생하는 건 분명하지만, 그렇게 소생하는 것은 “덧없는 나”일 뿐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더러운 향로”를 “좋아하는 원인”은 단지 향로가 “지니고 있는 긴 역사” 때문은 아니다. 이 진술은 이별의 필연성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 길로 마냥 가면/이 길로 마냥 가면 어디인지 아는가”에 드러난 비탄은 자신에게 익숙한 세계를 떠나야 하는 운명과 새길이 아직 보이지 않는 현실 사이에서 생긴 파토스인 것이다. 즉 “거룩한 머리를 만지면서/우는 날이 오더라도” “길이 끝이 나기 전에는” “모든 것에서부터/나를 감추”는 일이 “고독”임을 알기에 그는 “더러운 것 중에도 가장 더러운/썩은 것을 찾으면서/비로소 마음 취하여 보는” “더러운 길”을 쉬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더러운 향로」는 전쟁이 김수영에게 남긴 이중구속이 어떤 문턱을 넘어가는 생생한 사례이다. 죽음의 길일지도 모를 옛길은 그러나 김수영의 시에 평생토록 어른거릴 길이다. 만약에 김수영이 “더러운 향로”를 버리고 다른 길로 내처 떠났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김수영의 시가 이른바 5~60년대 모더니즘적 양식과 다른 길을 간 것은 바로 옛길과 새길을 동시에 짊어지고 갔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서 벌어진 일에서 보듯이, ‘양자택일’은 사실 신이 내린 벌이다.

시인에게는 옛길과 새길, 내면과 세계 중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택할 수 없는 운명이 있다. 혹자들은 시는 가슴으로 쓴다고 하고 혹자들은 발로 쓰는 것이라고 하지만, 전위적인 시인은 옛길과 새길, 내면과 세계를 “온몸으로 동시에”(「시여, 침을 뱉어라」) 쓴다. 여기서 “동시에”는 세계가 내면이 되고 그 내면이 다시 시가 되어 세계로 뛰어드는 사태를 한몸으로 겪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시의 몸과 세계의 몸이 다르지 않다는 뜻이고, 시의 심층과 세계의 은폐된 진실이 항상 함께 운동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단순히 유사성과 동형성을 가리키지 않는다. 아무튼 그 누구도 쉬 가려하지 않는 이러한 시의 길에 충실했던 이가 김수영인데, 그의 “고독”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하며 “누구의 무슨 신기한 재주로도” 자신의 “고독”을 알아챌 수 없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나비의 무덤」에서 그 “고독의 명맥을 남기지 않”겠다고까지 다짐하며 급기야 그것은 “비애”로까지 나아간다. 이게 1950년대 초중반김수영의 내면이다.

한국전쟁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은 전쟁은 죽음에 대한 뿌리 깊은 화농을 김수영에게 심어놓았지만 그는 그것과 간단치 않은 싸움에 돌입하면서 자신의 생활과 현실을 ‘밖으로’ 밀고 나아갔다. 그 과정에서 그는 “으스러진 설움”(「거미」)을 갖게 된 것이다. 심지어 전쟁통에 흩어진 가족이 한숨 돌리듯 모여앉아서 나누는 사랑 속에서도 그의 내면은 여전히 소용돌이였는데, 죽음에 대한 기억을 그는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사랑”(「나의 가족」) 으로 치유하기보다는 그게 어느 쪽이든 “길이 끝이 나기 전에는” 결코 멈출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고독을/누가 무슨 신기한 재주를 가지고/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면 김수영의 고독은 어디에서 멈출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내면과 세계를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가는 한 그것은 끝나지 않는다. 물론 한참 뒤에 그 고독의 허위마저도 벗어버리기는 하지만 말이다.(「꽃잎3」)

“작품 전문은 저작권자와 협의하에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