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초콜릿 상자 같은 인생, ‘포레스트 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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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취미를 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운동장이나 공원에서 이어폰을 낀 채 뜀박질을 하거나, 각종 마라톤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런데 달리기는 마니아적인 소비 욕구를 풀어줄 수는 없다. 고가의 장비를 착용한다든지, 특별한 기술이나 역량을 갖출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다. ‘건강 때문’이라고 하면 설명되기는 하지만 달리기에 매료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불분명한 어떤 것이 있다.

IQ 75의 한 남성이 인생의 역경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그린 <포레스트 검프(1994년)>에서 포레스트 검프(톰 행크스)는 실연을 당한 뒤 무작정 달린다. 묵묵히 한 가지에 몰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온갖 잡념이 들어서, 체력이 부족해서, 다리가 아파서 금세 포기하기 쉽다. 그런데 뛰다 보면 점차 호흡과 리듬을 유지하게 되면서, 스트레스가 풀리며 복잡한 상념을 털어버린다고 한다. 마치 명상에 잠긴 승려처럼.

3년 넘게 쉬지 않고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검프에게는 추종자가 따라붙는다. 삶을 단순하게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행동인데, 사상과 정치 등 복잡한 것이 잔뜩 엉켜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뭔가 심오한 메시지를 주려는 선지자’라는 의미를 붙여준다. 검프의 추종자처럼 <포레스트 검프>를 인생의 교과서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불편한 다리와 남들보다 조금 떨어지는 지능을 가진 검프가 사회의 편견과 차별을 견디며 성장해가는 과정의 휴머니즘이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주고 위안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영화는 극적 요소로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베트남 전쟁 등 현대사의 주요 장면에 검프가 등장해 흐름을 바꿔놓는다는 흥미로운 소재를 곁들였다. 물론 100% 허구의 이야기이며, 영화에서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 구석이다. 본의 아니게 역사적 사건들에 자취를 남긴 검프는 홀연히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신이 겪은 세상의 신기한 일을 들려준다. 그들은 많은 사람을 위험에서 구해내고, 세계평화의 초석을 다진 영웅이 어수룩한 검프일 거라고 믿지 않는다.

검프는 사랑하는 제니(로빈 라이트)가 남긴 아이를 키운다. 밀밭을 걸어 아이를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그 자리에서 아이가 돌아올 때까지 밀밭과 하늘을 번갈아 보며 기다린다. 검프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상이다.

<포레스트 검프>의 명대사는 죽음을 앞둔 검프의 엄마(샐리 필드)가 남긴 말이다. “제 운명은 뭐죠?” 검프가 묻는 말에 검프의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네가 알아내야 해.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은 거야. 뭐가 나올지 아무도 알 수 없단다.” 검프가 좋아하는 초콜릿 안에는 땅콩이나 크림이 간혹 섞여 있다. 신중하게 골라도, 먹어보기 전에는 뭐가 들어있는지 알 수 없다. 사는 일도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는 우연한 선택의 연속으로 운명이 만들어진다. 막연하고 언뜻 보면 실체가 없어 보이는 꿈이 진짜일지 모른다. ‘예정된, 계획된 운명’을 믿는 사람들은 인정할지 모르겠지만, 인생에서 우연한 선택은 거듭된다. 중요한 건 계획된 인생을 사느냐, 현명한 선택을 하느냐가 아니다. 영화는 선택 그 자체보다 선택을 현명하게 만드는 선택 이후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꿈은 반드시 구체적이고 체계적이고 단계적이어야 할까. 우리는 어릴 때부터 구체적인 꿈을 계획하고 실행해야 성공한다는 직업 도식에 갇혀 계획의 노예로 살아간다. 장래희망을 묻는 질문에 명료하게 대답하지 못하면 하고 싶은 일도, 되고 싶은 사람도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면 철부지나 뜬구름 잡는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우린 막연한 꿈의 의미를 모른다. 무엇이 돼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기 때문이다. 가수 이은미는 가수 지망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꼭 무언가가 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면 그것이 될 수 없어요.” 많은 사람이 <포레스트 검프>를 인생의 교과서로 꼽는 이유는 막연한 꿈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