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 이야기] (2) 허공은 누구의 것인가 / 황규관

16:38

출근을 위해 전철역을 가려면 다리를 하나 넘어야 한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냇물은 예전에는 냄새가 지독했지만 지금은 오리들이 날고 왜가리가 물고기를 날렵하게 잡아먹는 곳으로 변했다. 흰뺨검둥오리는 냇물의 오랜 주민이고 겨울철에는 쇠오리가 잠깐 찾아오기도 한다. 길을 잃었는지 아니면 가출을 한 건지 갈매기가 보이기도 한다. 4~5월이 되면 잉어들이 나타나 다리 아래쪽 여울목에서 헤엄도 치고 어떤 녀석들은 뭉쳐 다니면서 장난을 치느라 몸과 몸이 뒤엉키는 장면을 만들기도 한다. 잉어들이 나타나면 다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곤 한다. 다리를 떠받치는 기둥과 교각 사이의 틈에 비둘기집이 있는지 몇 해 전에는 새끼 비둘기를 입에 문 까마귀가 가로등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다리 위는 인간의 공간이지만 그 아래 냇물 주변은 인간이 참견해서는 안 되는 곳이다. 까마귀 주둥이에 작은 핏덩이가 대롱거리는 것을 보고 잠깐 연민이 들었지만 그것마저 서둘러 버렸다.

다리를 다 건너면 높디높은 건물들이 앞을 꽉 막고 있다. 마치 막다른 골목을 맞이하는 기분이랄까, 아무튼 그렇다. 그곳은 예전에는 공단 지역이었다. 제일 마지막까지 남았던 공장이 전철역 바로 옆의 ‘영진금형’이었는데, 결국 작년에 공장이 철거되고 지금은 공터로 남아 있다. 아마 곧 그 자리에도 낮지 않은 건물이 들어설 것이다. 아무려면 서울 시내의 조용한 땅을 가만둘 리가 없다. 낡았지만 단단해 보이던 영진금형 건물이 헐리기 전, 옥상에 묶여 있던 흰 개 한 마리가 떠오른다. 공장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들어찬 높은 건물들이, 이제 그럼 별다른 공간이냐면 그렇지도 않다. 업종이 변해서 그렇지 공단 시절에는 수평으로 북적였던 노동자들이 이제 수직으로 뒤엉켜 있다. 출퇴근 시간에 많은 노동자들이 전철역을 통해 왈칵 쏟아지고 우우 몰려든다.

냇물 근방은 기형도 시인의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안개」를 낳은 공간이다. 시인이 “샛강”이라고 부른 것은 냇물이 조금만 달려 내려가면 한강에 닿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이 음울한 리얼리즘 시에는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하거나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 죽은 아픈 사건이 담겨 있다. 이런저런 일들을 “안개의 탓”으로 말하지 않고 “개인적인 불행”으로 돌리기는 하지만, 1985년 즈음의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해보면 조금 다르게 읽을 수도 있다. 시인은 나지막하게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 말이 우리는 누구나 역사적 존재임을 말하려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허공을 고층 건물들이 차지해버린 현실은 사람의 마음에도 그림자를 드리운다.(사진=pixabay.com/)

사실 기형도 시인이 그린 시대의 초상화는 자본주의 근대 문명의 그림자, 아니 근대 문명 그 자체에 대한 것일지도 모른다. 시는 부지불식간에 시의 의도를 벗어나 전혀 다른 것을 짚어줄 때가 있다. 내가 이런 거창한(?) 독해를 한 것은 다음과 같은 대목 때문이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교환가치가 사라지면 버리고 잊어버리는 게 근대 문명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사실 여기서 기형도의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이 섬뜩하게 빛난다. 한때 기형도 시인을 잘 못 읽은 시절을 가지고 있어서 이제는 볼 수 없게 된 시인에게 마음의 빚을 진 느낌도 없지 않다. 기형도를 처음 읽을 때는, 그와 내가 만나기 쉽지 않았던 시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너무 빨리 갔다.

예전에는 이 공단에 여공들이 참 많았었다. 스무 살 때에 옆 공단의 어느 공장에서 잠깐 일한 적이 있었는데, 저임금이나 장시간 노동, 그리고 회사 관리자들의 모욕적인 태도와는 별개로 웃음이 많았었다. 나는 가끔 그녀들의 웃음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걸까 하는 생각에 빠져들곤 한다. 그럴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올라온다. 나아진 것 같은데 제자리 같고, 제자리 같은데 망가진 게 너무 많다는 느낌 때문이다. 삶에든 역사에든 대차대조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아니 차라리 모욕에 가깝지만, 나도 모르게 대차대조표를 상상해본다.

예전에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택배회사 물류 창고가 있었고, 그 이전에는 작은 공장이 있었다. 아침 8시가 조금 넘으면 노동자들을 공장 마당에 줄 세워놓고 국민체조를 시켰다. 그 광경을 보면 참 못마땅했는데 30층 가까이 되는 건물이 들어서자 난데없이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난감한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그 난감한 감정의 원인은 허공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냇물을 건너는 다리 위에서 잠깐 느꼈던 상쾌함이 고층 건물들이 드리운 그늘 안으로 접어드는 순간 갑갑함으로 돌변하고 말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옛 공단 부지에 높은 건물이 들어선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돌이켜 보면, IMF 구제금융을 겪기 전부터 공단의 업종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공장들이 하나둘 떠나고 그곳에 대신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내 경험의 범위 내에서 그것의 화룡점정은 바로 다리를 건너자마자 맞게 되는 이 고층 건물인 것이다.

냇물 위는 어쩔 수 없이 허공이다. 그리고 수면 위를 스치듯 날아가는 왜가리의 몸짓이 아침 햇빛에 반짝이기도 한다. 나는 이들이 허공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다가도 냇물 위로 쏟아지는 눈송이나 굵은 빗방울들을 보면 눈송이나 빗방울이 주인인가 하는 생각으로 바뀐다. 특히나 눈송이들은 곧바로 내려오지 않고 허공에서 몇 번의 공중제비를 하는지 모른다. 옆걸음도 쳤다가 다리 아래를 지나는 바람 때문인지 위로 솟구치다가 멀어지기도 한다. 그것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인과관계에 충실하던 감각과 의식도 순간 뒤집히곤 해서 몰려오는 현기증에 눈길을 돌려야만 한다. 그렇다면 허공의 주인은 이들 모두인가? 나는 지금 출근길 풍경에 대해서 주로 말하고 있지만, 퇴근길의 붉은 노을과 냇물에 내리는 감청색이 도는 어둠을 당연히 제외시킬 수는 없다.

정확한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서울에 자주 출몰하는 미세먼지가 고층 건물의 영향 탓이라는 말도 들었다. 서울 시내에 빽빽하게 들어선 고층 건물들이 바람길을 막았고 미세먼지가 바람을 따라 빠져나가지 못한 채 서울 하늘에 머물러버린다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미세먼지가 아우성인 것을 떠올려 보면 그리 신빙성은 있어 보이지 않지만, 고층건물들 때문에 바람이 막히거나 바람길이 바뀌는 일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현상이다. 그것은 한강과 가까운 지역에서 살거나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경험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설령 미세먼지에 끼치는 영향이 아주 미미하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인 것은 그게 아니다.

허공을 고층 건물들이 차지해버린 현실은 사람의 마음에도 그림자를 드리운다. 우리는 가끔 어떤 막막함과 답답함에 사로잡힐 때 무의식적으로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는데, 어쩌면 광활한 허공에 자신의 시간을 비추어봄으로써 지금 겪고 있는 일과 그것에 대한 마음을 덜어보려는 행동일 것이다. 그 때 보이는 것이 사각형의 높은 건물이라면 우리의 막막함과 답답함이 더해지면 더해졌지 덜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허공을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허공은 본래 보이지 않는 것인데, 그 보이지 않음이 우리의 고통과 그것으로 인한 감정의 무게를 덜어주는 것은 아닐까. 즉 우리가 겪는 사건은 대자연의 지평에서 보면 결국 먼지 같은 것이라는. 우주의 시간에서 보면 바닷가 높은 절벽도 단지 흐르는 물이라는 말도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고층 건물이 허공에 가득한 상태에서도 사랑이 가능할까?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은 수직으로 솟은 고층 건물들만큼이나 수직적이거나 기하학적인 것은 아닐까? 물론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확인되는 것이지만, 반대로 사랑 같은 감정도 우리가 사는 공간에 큰 영향을 받는다고, 나는 믿는 쪽이다. 고층 건물들이 허공을 무단 점유한 이유는 공간 활용에 대한 경제적 효율성 때문일 테고, 그것을 따지는 내면에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 애틋함이 싹틀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 마음은 고층 건물의 주인인 건물주들의 것이지 평범한 사람들과는 관계없는 문제라고 따질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공간과 시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다. 경제적 효율성이 짜놓은 구조 안에서 살다 보면 우리도 효율성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는 누구나 고층 건물의 주식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물론 그 주식은 소유물이 아니라 사용권에 가깝지만 말이다. 그래서 공단이 기형도 시인에게 줬던 아픔이 다르게 되풀이되고 있는 것만 같다. 허공을 새와 바람과 눈송이에게서 빼앗은 뒤부터 말이다. 노을을 막아서기 시작하면서부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