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75주기, 한국의 기억] (5) 1945년 8월 6일, 그날의 기억

원폭피해자들의 구술증언, 수기 재구성

18:34

기억연구회 그늘과 영남대학교 링크플러스 사업단이 진행한 ‘합천 원폭자료관 소장 자료 보존을 위한 기록자료 영상화’ 대상에는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원들의 간단한 구술자료도 포함된다. 전체 회원 278명의 구술증언과 함께 일부 회원은 수기도 남겼다. 구술증언은 원폭 투하 당시 상세설명을 포함한 7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남겨졌다. <뉴스민>은 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 동의를 얻어 구술증언 일부와 수기를 참고해 1945년 8월 6일을 재구성했다. 이름은 모두 가명으로 처리했고, 본적지(또는 출생지)와 출생연도를 함께 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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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히로시마의 원폭돔.

김정순(합천군, 1933년)은 일곱 살 되던 해에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넘어갔다. 아버지는 히로시마에서 바닷모래를 퍼 올려 비행장을 만드는 일에 동원됐다. 1945년 7월 말, 아버지가 히로시마로 건너와 5년 동안 동원됐던 비행장 건설이 마무리됐다. 아버지는 곧장 히로시마역 뒷산에 굴을 파는 일에 동원됐다. 김정순은 가족과 함께 히로시마 역 인근으로 이사했다.

1945년 8월 6일 오전은 분주했다. 아버지는 새벽같이 일을 나갔다. 어머니는 빨래를 했고, 김정순은 전에 다니던 학교에 전학증을 떼러 갈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이사 오기 전에 태어난 막내 동생은 목욕을 하고 어머니 젖을 먹곤 잠이 들었다. 3살, 6살 동생도 저마다 놀이에 열중했다. 오전 8시를 몇 분 남기지 않은 시각, 공습경보가 울렸다. 공습경보는 이내 경계경보로 바뀌었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이웃집 아저씨들이 헐레벌떡 피난 가야 한다며 야단법석을 쳤다.

비슷한 시각 히로시마역에서 약 3km 떨어진 요코가와 노면전차 정거장 인근 강변에 살던 하문석(합천군, 1944년)은 집에서 잠들어 있었다. 하문석의 어머니는 설거지를 했고, 형은 방에서 놀고 있었다. 아버지는 경계경보가 울리기 10여분 전에 철거공사 현장으로 나서는 사촌 형제를 배웅하러 나섰다. 배웅하고 돌아서 오는 길에 아버지는 공습경보와 경계경보를 맞았다. 그리고 잠시후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는 황급히 다리 아래로 몸을 숨겼다.

히로시마 상공에는 미국 폴 티베츠 중령이 조종하는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호가 서서히 다가왔다. 동료 공군기 2대와 함께다. 2,531km 떨어진 태평양 망망대해 위에 작은 섬, 티니안을 떠난 지 약 5시간이 지났다. 일본 군부는 고작 3대에 불과한 적기를 과소평가했다. 공습경보와 경계경보까지 울려놓고 곧 해제한 것도 그 때문이다. 폭격기를 공격하는 전투기도 내보내지 않았다. 큰 장애물 없이 유유히 히로시마 상공에 도착한 에놀라 게이호는 준비된 ‘리틀보이’를 투하했다. 오전 8시 15분이다.

▲히로시마 평화공원 한쪽에는 한국인원폭피해자 위령비가 있다.

히로시마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류승(오사카, 1924년)은 그 시각 고이역(지금의 히로덴 니시 히로시마역)에서 환승 열차를 기다렸다. 그 순간 허공에서 번쩍, 섬광이 빛나고 이내 ‘쾅’하는 굉음이 들렸다. 순식간에 온천지가 캄캄해졌다. 류승은 순간적으로 앞에 정차해 있던 전차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그 덕에 폭발로 무너지는 역사에 깔리지 않았다. 이미 학교에 도착했던 이자연(고령군, 1931년)은 교실 청소 중 번쩍이는 섬광을 거울 너머로 목격했다. 곧 ‘쾅’ 굉음이 들렸다. 이자연은 책상 아래로 숨어들었다. 잠시 후 운동장에서 교장 선생님이 방공호로 대피하라고 소리쳤다.

폭발은 역사 뿐 아니라 히로시마 전역의 건물을 무너뜨렸다. 조선인이 사는 허름한 판잣집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강수갑(진양군, 1942년)의 집은 반파되어 버렸다. 그 사고로 아버지는 한쪽 다리를 잃었다. 3살이던 자신은 어머니가 감싸 안으면서 무사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도 큰 부상을 입었다. 구원주(가명, 1934년)의 집은 그대로 옆으로 누웠다. 집 아래 깔린 그를 아버지가 구했다. 박선(합천군, 1942년)의 집도 반파됐다. 집안에서 흩어진 가구에 끼인 3살 난 박선을 부모가 구했다.

구성주(히로시마, 1939년)의 집도 마찬가지로 무너졌다. 셋째 형과 함께 무너진 집 아래 깔린 구성주는 정신을 잃었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찾았다. 머리에선 피가 흐르는 상태로 집 더미 아래에서 온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다행히 함께 깔린 형도 의식을 찾고 구해달라고 소리쳤다. 목재소에 출근했던 아버지가 황급히 돌아와 두 아들을 구했다. 많은 피를 흘린 구성주를 아버지는 둘러업고 목재소로 달려가 손수레에 실었다. 사방천지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 숨을 쉬기도 힘들다고 구성주는 생각했다. 겨우겨우 찾아간 보건소에서 기본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하문석의 아버지는 다리 아래로 피해 겨우 직접적인 폭격을 피했지만, 등에 화상을 입었다. 화상을 돌볼 겨를도 없이 아버지는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만 1년도 안 된 하문석과 형, 어머니를 아버지는 무너진 판잣집 아래에서 찾아냈다. 아버지는 가족을 챙겨 인근 학교로 대피했다. 학교도 이비규환이었다. 유혈이 낭자한 시체가 나뒹굴고 비명이 가득했다. 아버지는 이곳에서 화상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히로시마 원폭돔 앞 위령비, “물을 달라”고 외쳤던 당시 희생자들을 위로하며 놓인 가득찬 물병들.

피난 가야 한다는 이웃집 아저씨들 이야기를 듣고 김정순은 동생들을 찾아 방으로 들어섰다. 그가 동생들을 챙겨 나오기 전에 폭탄은 터졌고, 집은 내려앉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김정순과 6살, 3살 동생들은 스스로 무너진 집 사이를 기어 나와서 울었다. 김정순의 눈에 망연자실 서 있는 어머니가 들어왔다. 아이들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린 어머니는 “너희 다 살았구나” 눈물을 흘리며 다가왔다. 7월에 태어난 막내 동생은 미처 찾지 못한 그들 가족은 서둘러 방공호로 떠났다.

방공호로 향하는 길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길 곳곳에 시체가 널브러졌다. 죽진 않았지만 큰 화상을 입고 신음하는 사람,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사람, 벌거벗은 채 ‘물을 달라’고 소리치는 사람까지 지옥불이 따로 없었다. 가까스로 도착한 방공호에도 온통 상처 입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일터에 갔던 아버지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은 보이지 않고 무너진 집터를 아버지는 시신만이라도 찾겠다며 헤집다가 이웃에게 가족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버지는 뒤늦게 방공호로 와 김정순과 가족들을 만나곤 이내 정신을 잃었다.

전차 아래에 몸을 숨겼던 류승은 한참 동안 그대로 전차 아래 있었다. 캄캄한 세상이 밝아지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뒤다. 그제야 밖으로 나온 류승은 하늘을 가득채운 커다란 버섯구름을 목격했다. 아수라장이 된 역사 밖은 소리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류승은 가족들을 만나 철도공무원으로 히로시마역에서 근무하던 형을 찾아 떠났다. 온 시가지가 불바다여서 시가지를 가로지를 수도 없었다. 외곽 선로를 따라 빙 둘러 밤늦게야 히로시마역에 도착했다. 온 시가지가 불타서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지만 사방이 환했다.

형을 찾아 역 이곳저곳을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아무렇게 널브러진 시체들만 눈에 들었다. 까맣게 탄 시체는 얼굴은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역사 앞 강에도 시체가 떠다녔다. 시체와 죽은 물고기로 온 강이 뒤덮였고 악취가 들끓었다. 곳곳에서 소방대와 군인들이 시체를 운반해 한군데 모아 태웠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