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모쿠슈라에게, ‘밀리언 달러 베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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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의 링은 인생의 축소판으로 비유되곤 한다. 오랜 시간 동안 구슬땀을 흘려 링 위에 오르면 승패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홀로 견뎌야 하는 게 인생과 닮아 있어서다. 승패가 엇갈리는 링을 배경으로 불가능한 목표를 꿈꾸며 삶에 부대끼는 인간 군상의 이야기는 감동 어린 인생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이유로 대표적인 링 위의 스포츠인 권투는 종종 영화의 소재로 다뤄져 왔다. <성난 황소(1980년)>, <록키 시리즈>와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년)>, <주먹이 운다(2005년)>,<신데렐라맨(2005년)>, <파이터(2010년)> 등은 명작으로 회자된다. 이 영화들이 호평을 받는 이유는 그저 시합 자체 때문이 아니다. 처절한 싸움이 사람들의 마음을 울려서가 아니라 희망에 대한 절절한 드라마가 심금을 울린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던 주인공들은 인생의 마지막 희망을 걸 수 있는 유일한 끈으로 모두 권투를 선택한다. 도전은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선택이다. 처음 이들의 가능성에 의문을 품던 주변인들은 차츰 그들의 열정에 동화된다. 결말은 대부분 인생 역전이다. 챔피언 벨트를 획득하는 순간은 권투선수로서 닿을 수 있는 인생 최고의 정점일 것이다. 숨 가쁘게 압축된 성공담은 인생의 절정에 도달한다.

하지만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뻔한 성공담에 머무르지 않는다. 주인공 매기(힐러리 스웽크)는 일 하다가 손님이 남긴 음식을 먹으며 허기를 채우는 식당 종업원이다. <주먹이 운다>의 길거리에서 매를 맞아 번 돈으로 생계를 꾸리는 태식(최민식)과 푼돈을 훔치려다 살인을 저질러 징역을 살게 된 상환(류승범)보다는 낫지만, 가장으로서 매일 힘겨운 삶을 이어간다.

그런 매기는 불쑥 권투 체육관을 찾아가 한물간 트레이너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제자로 받아달라고 말한다. 프랭키는 매기가 30살이 넘은 여자라는 이유로 모욕을 준다. 하지만 매기는 계속 체육관에 와서 연습한다. 선수에서 은퇴한 뒤 프랭키의 체육관에서 청소부로 일하며 지내는 스크랩(모건 프리먼)이 매기의 재능을 알아보고 조금씩 그를 도와준다. 매기의 열정에 감동한 프랭키는 못 이긴 척 매기의 트레이너가 되어준다.

매기의 꿈은 직선으로 그어진다. 출중한 실력으로 연전연승한다. 챔피언을 향한 꿈이 곧 이뤄지려는 순간 매기는 불운의 사고로 크게 다쳐 다시는 링 위에 서지 못한다. 이때부터 영화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보통 권투 영화의 절정은 주인공이 온 정성을 쏟았던 링에 오르지 않는 시점에 이르러서다. 하지만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시련과 좌절을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하는 것으로 끝맺음 되는 권투 영화의 전형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지점을 지향하는 영화가 된다. 성공 신화를 전해줄 것만 같던 권투는 더 이상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프랭키와 매기는 닮은꼴이다. 프랭키는 일흔의 나이에 체육관에서 혼자 살고 있다. 매주 딸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매번 반송된다. 오랜 친구 스크랩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성당 미사에 나가 신부에게 냉소적인 질문을 쏟아내는 게 일상이다. 체육관에서 유일했던 유망주 복서 빅 윌리 리틀은 프랭키가 타이틀매치 주선을 계속 미루자 떠나버린다. 그는 허탈함에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다.

매기가 체육관을 찾은 건 골칫덩이 가족들과 가난이 주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다.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을 피해 간 곳은 고통을 직접 부딪쳐야 하는 곳이다. 함께 그 고통을 이겨내는 매기와 프랭키는 가족보다 끈끈한 관계가 된다. 그리고 스승 프랭키는 불구가 된 매기를 극진히 보살핀다. 매기가 식당 종업원으로 일해 번 돈으로 생활하던 가족은 사지가 마비돼 누워있는 매기에게 재산을 넘겨달라고 독촉한다.

▲게일어(語) ‘모쿠슈라(Mo Chuisle)’는 가족보다 소중한 사람을 말한다. 프랭키와 매기는 서로에게 그런 존재다.

혈연이 아닌 두 사람을 연결해주는 보이지 않는 끈은 프랭키가 매기의 가운에 새긴 게일어(語) ‘모쿠슈라(Mo Chuisle)’다. ‘가족보다 소중한 사람’을 뜻한다. “모쿠슈라, 너에게 붙여준 이 이름의 뜻은, 사랑하는 나의 혈육이란다.” 이별을 앞둔 매기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프랭키는 매기를 끌어안는다. 그 후 길고 어두운 복도를 걸어 나가는 프랭키의 뒷모습이 쓸쓸하다.

영화 제목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허름한 가게에서 뜻밖에 얻은 보석 같은 물건’이라는 뜻이다. 1센트짜리 물건만 파는 가게에서 100만 달러짜리를 찾았다는 팝송에서 유래했다. 전반부까지는 우연한 보물이 세계 챔피언 타이틀 매치까지 진출한 무명의 여복서를 뜻하지만, 중반부부터는 비즈니스 관계이던 프랭키와 매기가 혈육 이상의 가족이 된다는 의미를 진하게 풍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