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 이야기] (끝) 자격증 두 개 / 황규관

16:43

1987년 2월 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나는 동기 한 녀석과 포항 시내 중국집에 앉았다. 아마 그즈음 그와 가까웠다는 단순한 이유가 컸을 것이고, 둘 다 졸업식에서 별로 빛이 나지 않는 존재여서 둘이 함께 중국집에 갔던 듯하다. 아무튼 나는 그 흔한 개근상이나 정근상도 없이 졸업장 한 장만 달랑 받았다. 3년 동안 기숙사에서 공동생활을 해야 했던 학교생활의 특징 때문에 3년 개근상이나 정근상이 더 흔했는데 나만 유독 졸업장 한 장이 전부였던 것은, 3학년 때 학교를 탈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탈출은 미수로 그치고 나는 나머지 시간을 심드렁하니 버티면서 지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다닐 때만 해도 공업계고등학교 3학년 2학기가 되면 필기시험을 면제해주는 의무검정 제도가 있었다. 기능사 2급 자격증이라도 따서 졸업하라는 교육당국의 배려인 것인지, 3학년 1학기까지 공부했으니 이제 약간의 이론은 구비했다고 간주해주는 것인지 그 취지를 잘 모르겠는 제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것마저 응시하지 않았다.

2학년 때 취득한 두 개의 자격증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자격증을 따고 나서 어떤 회의감이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계기가 있었는지 자세한 기억은 없다. 다만 기능사 2급 자격증이 우리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찾아왔고 그 기만행위에 끌려가지 말자는 오기를 부리고 싶었던 것 같다. 자격증을 아무리 많이 따도 내 처지와 신분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철’이 들었던 것일까? 아무튼 그런 연장 선상에서 학교를 그만두자는 결심을 했던 것도 같다. 그리고 무모하게 일을 저질렀는데, 그것도 두 번이나 그랬다. 그 경과를 여기서 미주알고주알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건너뛰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 뒤로 선생님의 눈 밖에 났던 것 같다. 앞에서 말한 의무검정에 원서를 내지 않은 것은 두 사람이었는데, 한 친구는 불려가 선생님의 꾸지람을 듣고 응시하게 되었지만 나는 선생님이 부르지도 않았던 것이다. 사실 그 친구의 어떤 반항은 지금 생각해도 귀여운 데가 있다. 그런데 선생님이 정말 내 눈빛을 제대로 읽으신 것일까? 이미 고인이 되었으니 뭐라 여쭤볼 수도 없고.

둘이 짜장면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먼저 물었다. 바로 직행터미널에서 집으로 가냐? 니는? 녀석의 고향은 경북 상주였다. 나는 고속버스터미널로 가서 서울로 간다. 서울에 누가 있나? 누나네가 있는데, 당분간 누나네 집에 있으면서 구로공단에서 일 좀 할까 해. 니는 공부 좀 해서 회사에서 좀 빨리 안 부르겠나? 그거야, 나도 모르지. 3학년 때 워낙 개판 쳐놔서. 모교는 어떤 큰 철강회사에서 운영하는 일종의 직업학교였다. 이번에는 내가 선생님한테 빌었다. 취직하게 해달라고. 선생님이 너한테 머라시던데? 내가 학교 그만둔다고 두 번이나 안 도망갔냐. 그것 때문인지 나더러 그러시더라. 규과이 니는 회사 들어가서도 그만둔다고 그랄 테제? 그래서 안 그런다고 빌었다. 취직해서 돈 벌어야 한다고. 지금 생각하면 담임선생님 입장에서는 좀 순종적으로 살라는 마지막 가르침이었을 테다. 결과만 말한다면 물론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

1987년 3월에 구로3공단에 있는 어느 안테나 공장에 들어갔다. 고 박영근 시인이 작품의 제목으로도 삼았던 ‘취업공고판’이나 전봇대에 붙어 있는 구인 광고를 보고 연락해서 이력서 들고 면접만 보면 되는 간단한 절차들이었다. 냉기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햇살은 따뜻했다. 점심시간이어서 공단 거리에는 이런저런 색깔의 작업복을 입은 여공들이 와르르 웃으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왜 그때 광경이 지워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다들 20대 초반의 청춘이고, 어차피 같은 공단에서 일할 상대라서 서로 달떴던 것일까? 장시간 저임금 노동이라는 추상보다 나는 스무 살 때 잠깐 일했던 공장의 추억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 공돌이, 공순이라 불렸던 내 마음의 동무들. 안테나 공장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철야를 해야 했다. 아침에 출근해서 다음 날 아침에 퇴근한 것인데, 내가 일한 주간조가 퇴근하고 야간조가 우우 몰려들어오던 기억도 또렷이 살아 있다. 얼굴이 하얗고 입술이 붉던 여자애도. 나보다 잘 생긴, 같은 조의 친구가 애인이라는 소식은 나중에 들었는데 신기하게도 그날 밤에 그 잘 생긴 친구가 내게 다가와 인사를 청했다. 자기는 춘천기계공고 나왔다고 하면서 말이다. 속으로 좀 어색했는지 나도 모르게, 어쩌란 말이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공고 나온 이가 둘 뿐이란 말인가?

▲대구 성서공단의 출근길 풍경. (뉴스민 자료사진)

예전에는 그냥 실업계 학교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특성화고니 마이스터고니 이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학교들 이름도 각양각색이다. 예전에는 그냥 상고, 공고, 농고밖에 없었다. 아마도 직업이 다양해지면서 현실에 발맞춘다고 이름을 바꾸었는지 모르겠지만, 고작 ‘실업계’를 나와서 받을 대우는 더 나빠진 것만 같다. 철강회사에 1987년 8월에 들어가서 받은 칭호는 기능직이었다. 고등학교나 전문대 졸업자는 기능직이었고, 일반대학 졸업자는 기간직이라 불리었다. 4년 더 배웠으니 월급 조금 더 받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었지만, 그들이 올라갈 수 있는 지위는 활짝 열린 듯 보였고, 기능직은 젊은 계장 아래인 주임이 최고 자리였다. 현장에는 그런 늙은 노동자가 꽤 있었다. 어찌 그렇게 군대 조직과 똑같았던지 지금 생각해도 웃음만 나온다. 짧은 안테나 공장이나 동작구청 근처의 장난감 공장, 장승배기의 플라스틱 사출 공장 시절보다 철강회사 생활이 더 우울했던 것은 그런 신분제(?)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언젠가 한번 특성화고노조 활동가를 만나 같이 점심을 먹은 적이 있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중에 내가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 활동가는 대학을 나와서 노조 간부들보다 나이가 한참 많다고 했다. 아무래도 특성화고 나온 친구들이 이렇게 저렇게 주눅 들어 있을 텐데 옆에서 보니 어떠냐고 물었다. 대답은 여지없었다. 그렇겠지. 예전에는 그래도 비슷한 처지가 꽤 되어서 그나마 덜 외로웠는데,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존재가 되어 있을 거라고 항상 생각했었다. 그들은 비(非)청년이 아닌가. (나는 지금 울분에 차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니 오해 없기를 바란다.) 나도 어차피 이 비(非)청년들을 만들어낸 기성세대의 일원일 뿐이다. 아무튼 작은 것이라도 함께하고 싶다는 의견을 전했고 그는 위원장에게 전하고 답장을 주겠다 했는데 그 뒤로 아무 연락을 받지 못했다. 두 번 연락을 하지 않은 이유는, 다른 사정도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자칫하면 내가 무슨 사업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였다.

지금 비(非)청년들의 심정과 내면을 나도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시간과 내가 살아온 시간은 같은 것 같으면서도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전에는 활력이 있었다. 윗사람에 대한 뒷얘기나 반항에도 지금보다는 나은 활력이, 분명히, 있었다. 아마 이것도 경제성장 문제와 엮여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은 해봤지만 다만 짐작일 뿐 어떤 근거는 없다.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막연한 바람 또는 기대가 그때는 살아 있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무너진 노동조합 재건 활동에 잠깐 참여하면서도, 쑥스러움은 있을지언정 두렵지는 않았다. 경제성장과 과학기술 문명, 그리고 점점 더 치밀하게 도시화되는 환경과 시대의 내면은 분명히 연관이 있을 것이다. 나는 과학기술 문명과 도시화가 인간에게 무기력을 들이부어 준다고 믿는 쪽이다. 노동조합은 이제 방어 진지이지 공격을 위한 진영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오로지 연대와 우정의 공동체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내 경험으로는 지난 시절의 노동조합도 꼭 그런 곳은 아니었다.

남해안의 철강회사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곡절과 개인적인 일들은 한 5년 만에 훌쩍 지나가버리고 다시 서울 생활을 하게 됐지만 이제는 공단 생활이 아니라 이른바 ‘화이트 칼러’ 노동자들 틈바구니였다. 노동조합을 향한 투지도 거세당하고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이상한 몰골이 되어버리고 만 것인데 나중에 들으니 알아서 사표 쓰라는 이야기를 못 알아먹고 갓 낳은 아이를 데리고 상경을 하고 만 것이다. 내가 서울 생활 2년 동안 동료들과 말을 안 하고 지냈다면 사람들은 믿지 않는 눈치지만, 내 기억이 그런 것을 보면 설령 입을 열었더라도 마음의 빗장은 굳건했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고등학교를 딱 절반 다니고 꿈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현실이 시시해 보였고, 현실이 나를 속이고 있다고 판단 내렸던 것 같다. 사실 현실은 나를 이중으로 속였다. 먼저 내가 개천의 미꾸라지가 아니라고 꼬드겼고, 그래서 조금 수량이 많은 데로 나아가자 다른 물고기들이 너는 미꾸라지 맞아 하는 눈치를 준 것이다. 내가 미꾸라지이든 아니든 조금 더 큰 강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은 어쩌면 내가 속한 시간대인, 근대가 심어주었을 것이다. 어쨌든 강에서 자랐으니 바다는 그렇다 치더라도 가능한 한 센 물살에서 놀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고. 돌아보면 내가 ‘비(非)’를 지향했던 것은 좋아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비(非)’들이 노는 자리가 편해졌을 것이고, 거기다 마음의 동무들도 대부분 그곳에 있었다.

지금은 어떻게 된 것인지 그 ‘비(非)’에서 다시 다른 ‘비(非)’로 옮겨가고 싶은 열망이 있지만 아직도 1987년 스무 살 때에 잠깐 일했던 작은 공장들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같은 공장에 다니는 여자애와 연애하고 싶어 마음이 근질근질하던 공돌이 녀석과 남자들은 화장을 좀 하는 여자를 좋아한데요, 하고 괜한 농담을 했더니 다음 날 입술이 짙어진 나보다 두어 살 많은 여공이 있던 곳. 그해 6월, 서울시청 앞 광장에도 눈치가 보여 선뜻 나가지 못하고 싸구려 호프집에서 수다나 떨었지만 시대에 그렇게 빚진 기분은 들지 않았다. 공돌이와 공순이의 삶은 따로 있을 것 같은 예감을 공유하며 살아서 그랬던 것일까.

그리고 그때 딴 자격증 두 개는 한동안 여기저기 굴러다니다가 몇 년 전에 최종적으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