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의 김수영-되기] (5) 나비의 무덤

15:21

나비의 무덤

나비의 몸이야 제철이 가면 죽지만은
그의 몸에 붙은 고운 지분은
겨울의 어느 차디찬 등잔 밑에서 죽어 없어지리라
그러나
고독한 사람의 죽음은 이러하지는 않는다

나는 노염으로 사무친 정의 소재를 밝히지 아니하고
운명에 거역할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여기에 밀려내려간다

등잔은 바다를 보고
살아 있는 듯이 나비가 죽어누운
무덤 앞에서
나는 나의 할 일을 생각한다

나비의 지분이
그리고 나의 나이가
무서운 인생의 공백을 가르쳐주려 할 때

나비의 지분에
나의 나이가 덮이려 할 때
나비야
나는 긴 숲속을 헤치고
너의 무덤을 다시 찾아오마

물소리 새소리 낯선 바람소리 다시 듣고
모자의 정보다 부부의 의리보다
더욱 뜨거운 너의 입김에
나의 고독한 정신을 녹이면서 우마

오늘이 있듯이 그 날이 있는
두 겹 절벽 가운데에서
오늘은 오늘을 담당하지 못하니
너의 가슴 우에서는
나 대신 값없는 낙엽이라도 울어줄 것이다

나비야 나비야 더러운 나비야
네가 죽어서 지분을 남기듯이
내가 죽은 뒤에는
고독의 명맥을 남기지 않으려고
나는 이다지도 주야를 무릅쓰고 애를 쓰고 있단다

글에서 인용한 ‘나비의 무덤’은 <김수영 전집 1(시)>에 수록됐습니다.

시는 어쩌면 우리가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어떤 전제들 밖에 있는 것은 아닐까? 도리어 시는 우리가 학습해온 전제들을 파괴하는 힘이 아닐까? 김수영 시의 비밀은 시의 기존 전제들을 위협하려는 것에 있는 것 같단 느낌을 나는 여러 번 받았다. 그래서 김수영은 회자되는 것만큼 반비례해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도 시인들에게서.

예전에 오세영이 김수영에 행한 비판은, 비록 정념의 언어이긴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게 사실임을 드러내준다. 오세영에 의하면 한국 시단에서 김수영을 옹호하는 세 부류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의식적으로 김수영을 우상화하는 부류, 두 번째는 영향을 받아 맹목적으로 좇는 부류, 마지막으로 김수영의 시가 시가 아님을 알면서도 침묵하는 부류.

겉으로 드러난 오세영 주장의 핵심은 시의 본령을 회복하자는 것이지만, (오래된 인터뷰에서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김수영의 내츄럴한 언어가 새롭게 보였을지는 몰라도 시의 본령은 아니예요”.) 그 주장을 위해 감행한 현상 진단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물론 위와 같은 구분법은 세속에서 벌어지는 어떤 현상에도 해당하는 조야한 구분법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여기서 오세영에게 거꾸로 물어야 할 것은, 도대체 ‘시의 본령’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이런 물음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전제들’을 내놓을 것이다.

김수영에게 이른바 ‘시의 본령’에 충실한 작품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작품들이 태작인 것도 아니다. 1961년에 쓴 어느 시작 노트에서 그는 “나는 시의 형식 문제에 대해서 지극히 등한하다”라고 쓴 적이 있는데, 그 이유를 “5·16 이전의 우리 사회의 통속성” 때문이라며 그 일차적 책임을 사회로 돌렸다. 물론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남는다. 그에게도 위악적인 제스처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는 “나는 거지꼴을 하고 다니는 것이 퍽 좋았던 것만은 사실”이라고 말하는데, 김수영이 “시의 형식 문제에 대해서 등한”했다고 하는 말이나 “거지꼴을 하고 다니는 것이 퍽 좋았”다는 말에는 역설의 검(劍)이 숨겨져 있는 것은 당연하다. “건전하고 소박”한 세상에 대한 갈망을 시의 형식의 문제와 관련시키는 것만 봐도 그것은 명백하다.

그러니까 김수영이 “시의 형식의 문제에 대해서 등한”한 것은 그의 “나타와 안정”(「폭포」) 때문이 아니라, “건전하고 소박”한 세상을 방해하는 적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전략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시의 형식의 문제에 대해서 등한”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지껄인’(「시여, 침을 뱉어라」) 결과일 뿐이다.

내가 보기에 「나비의 무덤」은 ‘시의 전제들에 그나마 충실’한 작품인데, 객관적 상관물(나비, 지분, 등잔, 바다, 절벽, 낙엽 등)을 동원해 시인 자신의 서정을 표현해냈다는, 다소 상투적인 이유를 대야할 것만 같다. 언제나 김수영의 시는 에둘러 읽으면 낭패를 보기 쉽다. 김수영의 시들은 편편마다 어떤 첨점(尖點)을 향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용으로 하여금 형식을 위협하게 하려는 그의 시쓰기의 자세와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 역시 김수영의 시대적 고뇌가 “지분”처럼 묻어 있거니와, 특히 “두 겹 절벽 가운데에서”라는 구절은 그것을 더욱더 강하게 환기시킨다. 지난번에 읽은 「더러운 향로」에 대한 소감을 밝히며 나는, “김수영의 시가 이른바 5~60년대 모더니즘적 양식과 다른 길을 간 것은 바로 옛길과 새길을 동시에 짊어지고 갔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두 겹 절벽 가운데에서/오늘은 오늘을 담당하지 못하니”는 어떤 협곡 안에 자신이 처해 있음을 말해준다.

1연에서 ‘나비의 죽음’과 “고독한 사람의 죽음”이 다름을 말하는 것 같지만, 이 두 항은 본성상 다르지 않은 채 서로를 함축하며 동시에 비춰준다. “나비의 몸”은 언젠가 죽지만 “고운 지분은” “겨울의 어느 차디찬 등잔 밑” 같은, 일반적인 죽음과 삶의 범주 밖에서 죽는다. 1연의 마지막 행에서 “고독한 사람의 죽음은 이러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나비의 “고운 지분”의 죽음과도 다른 ‘죽음’을 진술하기 위함이다.

2연 전체는 그간 그가 겪었던 삶의 소용돌이를 떠올리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여기서 김수영은, 자신이 습득한 힘을 “운명에 거역할 수 있는/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라고 표현했다. 사실 “운명에 거역할 수 있는/큰 힘”이란 일종의 오만(hybris)에 가깝다. 사실 인식의 모험에서 중용과 자기한계에 대한 겸양은 족쇄가 될 수도 있다. 역설적으로 오만은, 한계 자체를 역량을 펼치는 출발점으로 삼기도 한다. 물론 오만이 악마적인 본성을 지닌 것은 사실인데 그 악마적인 본성은 심지어 통념화된 도덕을 당연히 괴롭힌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여기에 밀려 내려간다”는 구절이다. 이 부분은 두 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첫 번째로, “운명에 거역할 수 있는/큰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즉 “운명”에 쓸려가고 있다는 뜻과, 두 번째로 “운명에 거역할 수 있는/큰 힘” 자체에 휩쓸려 간다 등. 시 전체의 맥락을 고려했을 때 나는 첫 번째 해석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거기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1950년대의 김수영이 가진 오만은 의지의 과잉과 의미가 겹치는 면이 있지만, 자기 스스로 “운명에 거역할 수 있는/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여기에 밀려 내려간다”고 말한 것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정초되어 가기는 하지만 현실의 운동을 떠난 독단을 경계하겠다는 의미로 읽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다음에 쓴 시 「긍지의 날」은 이렇게 시작된다. “너무나 잘 아는/순환의 원리를 위하여/나는 피로하였고/또 나는/영원히 피로할 것이기에/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있는 나의 긍지/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 보다”. 여기서 “긍지”는 2연에서 보이는 어떤 오만과 공명하는 바가 있지 않은가?

“운명에 거역할 수 있는/큰 힘”을 가졌기에 “나는 나의 할 일을 생각한다”는 3연은, “나비가 죽어누운/무덤 앞”과 대비를 이룬다. 물론 그 대비는 1행과 2행에 걸쳐 있는 “등잔은 바다를 보고/살아 있는 듯”에서 감각적 깊이를 확보한다. 다시 말하면 ‘나비의 무덤’ 앞에서 바람이 드센 바다를 바라보는 등잔과 같이 자신의 할 일을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이 강철 같은 서정을 김수영은 「긍지의 날」에서 “긍지”라 부르고 “나의 몸은 항상/한 치를 더 자라는 꽃”이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4~5연에서 “나비의 지분이” “무서운 인생의 공백을 가르쳐주려 할 때” 그리고 “나비의 지분에/나의 나이가 덮이려 할 때” “너의 무덤을 다시 찾아오마”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갖고 있는 죽음에 대한 인식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삶의 틈새로 죽음은 언제나 흘러들어오는 법이다. 그것에 대한 김수영의 인식은 그의 시 전체에 흐르는 기저에 해당되는데 이 시에서도 4~5연에 걸쳐 삶을 떠받치고 있는 죽음을 그는 다시 한 번 떠올린다. 죽음을 거듭 아로새기지 않고서는 그의 시는 전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가 ‘나비의 무덤’에 찾아와서 하는 행위인데 “모자의 정보다 부부의 의리보다/더욱 뜨거운 너의 입김에” “고독한 정신을 녹이면서” 우는 일이다. 물론 여기서 “뜨거운 너의 입김”은 ‘나비의 무덤’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그 이유는 나와 있지 않다. 4~5연에서 “나비의 지분”이 시인 자신의 삶으로 범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서운 인생의 공백을 가르쳐주려 할 때”와 “나의 나이가 덮이려 할 때”는 “나비의 지분”이 언제든 자신의 삶에 흘러넘치는 사태를 예비하겠다는 의지로 읽을 수도 있다. 아니 적극적으로 그러한 사태를 자신이 의지하겠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두 겹 절벽 가운데에서/오늘은 오늘을 담당하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일 뿐이다. 이 시가 「더러운 향로」와 상통하는 바가 있음은 이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아직은 “나비의 지분”에 자신의 삶을 개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오늘은 “나 대신 값없는 낙엽이라도 울어줄 것이다”. 이 시에서 ‘울음’은 설움도 아니고 고독도 아니다.

차라리 ‘나비의 무덤’ 앞에서 터뜨리는 울음에서 시대를 버티게 하는 고독의 활시위를 놓아버리는 일을 닮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내가 죽은 뒤에는/고독의 명맥을 남기지 않으려고/나는 이다지도 주야를 무릅쓰고 애를 쓰고 있단다”에서처럼 고독을 포기하지도 않겠지만, 고독만으로 시대를 건너지도 않겠다는 정신의 긴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고독은 시대적 상황의 산물이지만 언제든 시대적 맥락을 거세하고 실존의 문제로 침잠하려는 부정적 에너지도 포함하는 법이다.

그럼 이 시에서 말하는 “나비의 지분”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문맥상 확실한 것은, “나비의 지분”은 “나비의 몸”이 죽은 이후에 죽음을 맞으며, 그것도 “겨울의 어느 차디찬 등잔 밑에서 죽어 없어지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할 일을 생각”하게 하고 심지어 “무서운 인생의 공백을 가르쳐” 줄 수도 있고, “나의 나이가 덮이려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 순간이 오면 “더욱 뜨거운 너의 입김에/나의 고독한 정신을 녹이면서” 울겠지만, 지금은 그 “죽은 뒤에도/고독의 명맥을 남기지 않으려고” “이다지도 주야를 무릅쓰고 애를 쓰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비의 지분”은 구원인가, 아니면 혁명인가. 혹 훗날 드높여 외쳤던 “사랑”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김수영 자신이 “절대적 완전을 수행하는” 것이라 말했던 ‘시’인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이라는 거울 앞에서 김수영은 쉬 떠나지 못한다는 것뿐이다.

“작품 전문은 저작권자와 협의하에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