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10월항쟁 이후 74년 만에 위령탑 세워져…11월엔 공개

해방 이후 벌어진 전국 최초의 민중항쟁
폭동에서 항쟁으로 60년
숨죽여 살았던 유족들의 숙원
대구시 조례 제정과 위령탑 건립까지
“시민들이 10월항쟁 알 수 있도록 교육관 건립 필요”

11:37

1946년 10월항쟁이 일어난 지 74년 만에 대구에 희생자 위령탑이 세워졌다. 그동안 ‘빨갱이’라는 낙인에 숨죽여 살았던 유족들에게는 작지만 명예 회복의 징표다.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 일대에 건립된 10월항쟁 등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 일대에 조성 중인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건립이 마무리됐다. 현재는 진입로 등을 공사하고 있다. 대구시에 따르면 10월 말까지는 공사를 완료해 11월이면 유족은 물론 시민들도 드나들 수 있다.

위령탑 건립은 유족의 숙원이었다. 채영희 10월항쟁유족회장은 “어디서 돌아가셨는지도 알 수가 없는 유족이 많다. 유해도 찾지 못했다. 미군정의 부당한 처우에 저항하다 희생된 우리 부모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유족의 아픔을 위로할 작은 위령탑이라도 생겨 한이 조금이나마 풀리게 됐다”고 말했다.

10월항쟁은?

10월항쟁은 대구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퍼져나간 해방 이후 최초의 민중항쟁이다. 1946년 9월 24일 대구에서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총파업에 동참한 노동자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9월 30일 미군정의 식량 정책에 항의하는 시민 400여 명이 쌀을 요구하는 시위도 벌어졌다. 10월 1일 경찰 발포로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미군정의 식량 정책과 친일 경찰 중용 문제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에 나왔다.

2일부터는 시민 2만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면서 경찰과 충돌이 일어났다. 미군정은 계엄령 선포로 맞섰다. 130여 명이 목숨을 잃고, 260여 명이 다쳤다. 수천 명이 ‘폭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검거됐다. 대구의 봉기는 이후 경북 지역을 시작으로 남한 전역으로 번져 그해 12월까지 시위가 지속됐다.

▲출처=김일수, 2004,<대구와 10월항쟁, 10.1사건을 보는 눈, 폭동에서 항쟁으로> 중에서

한국전쟁 전후 10월항쟁 참가를 이유로 희생이 이어졌다. 1950년 7월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던 10월항쟁 참가자들은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가창골, 경산 코발트 광산 등지에서 적법절차 없이 처형됐다. 경찰의 집단 처형 인원은 1,438명으로 추산된다. 좌익에 있다가 전향한 사람을 가입시켜 정부가 만든 국민보도연맹원을 적법절차 없이 처형한 사건도 벌어졌다. 확인된 희생자 숫자만 4,934명, 대구는 99명이다.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다르지만, 최소한 10만여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폭동에서 항쟁으로 60년
대구시 조례 제정과 위령탑 건립까지

10월항쟁은 그동안 ‘좌익폭동’으로 규정돼 60여 년 동안 묻혀있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유족이 함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경북·대구유족회’를 결성하고, 진상규명과 조사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1년 후 일어난 5.16 군사반란으로 유족들이 구속되면서 유족회는 강제해산됐다. 1987년 민주화와 함께 10월항쟁을 폭동이 아닌 항쟁으로 조명해야 한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왔고,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 제정으로 진실규명의 물꼬가 트였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가 10월 대구사건과 대구보도연맹 관련 사건이 공권력에 의한 희생이었다는 진상규명 결과를 결정했고, 10월항쟁유족회가 결성됐다. 유족회는 이때부터 많은 희생자가 나온 가창골에서 합동위령제를 지냈다. 때마침 2010년 3월 ‘진실화해위원회’가 국가 책임을 인정한 뒤 정부 쪽에 사과와 위령 사업 지원을 권고하면서 명예회복의 길이 열렸다.

대구시의회도 2016년 7월 26일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대구시도 예산 8억5천 원을 들여 2018년부터 위령탑 건립 사업을 시작했다.

▲위령탑이 세워진 가창골 일대는 10월항쟁 이후 적법절차 없이 처형이 대거 집행된 곳이다.

위령탑에는 유족이 확인된 희생자 명단 57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명단에는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자녀이자 채영희 10월항쟁유족회장의 아버지 채병기 선생, 박정희 전 대통령의 셋째 형으로 1946년 당시 경북 선산군 인민위원회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 박상희 선생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위령탑 옆 건립취지문에는 “한국전쟁 전후 정치·사회적 혼란속에 많은 민간인이 무고하게 희생되었고, 그중에서도 가창 골짜기는 1946년 대구 10월항쟁 직후부터 1950년 한국전쟁시기까지 많은 민간인이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억울하게 희생된 곳입니다…(중략)…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추모의 장이 되고 나아가 국민의 인권이 존중되는 참다운 역사 발전의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대구시장과 10월항쟁유족회 명의로 기록됐다.

“대구 시민이 10월항쟁 알 수 있도록 교육관 건립 필요”

주변에는 10월항쟁을 기억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인들의 ‘시비’도 세워질 예정이다. 10월항쟁유족회는 직접 비용을 들여 위령탑 부근에 관련 자료를 전시하는 작은 공간도 마련한다. 채영희 유족회장은 “위령탑 건립으로 이제 한 발을 디뎠다. 교육공간도 필요한데 아직 예산이 배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채 회장은 “당시 젊은 분들이 항쟁에 참여했다가 목숨을 잃어 유족이 없는 분도 많다. 또, 항쟁 직후 ‘빨갱이’로 매도당하면서 경찰의 감시 속에 60년 넘는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보니 유족들 상당수가 부모에 대한 기억을 지운 채 살아왔다”며 “위령탑이 건립됐으니, 유족이 세상에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당시 10월항쟁이 벌어졌던 공간을 기억하는 후속 작업 필요성도 제기된다. 당시 전평 사무실과 시위가 벌어졌던 대구역 인근에서 경북대병원에 이르는 항쟁 장소 어느 곳에도 10월항쟁을 기억하는 표지석이 없다. 채 회장은 “대구 사람들도 10월항쟁을 잘 모르는데, 후세대가 알 수 있도록 교육관 건립도 했으면 좋겠다”며 “앞으로 대구 도심에 항쟁 당시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해서도 정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구시 관계자는 “11월 8일 진입로 공사를 완료하는 계획인데, 10월 말까지는 공사를 마치려고 한다. 기념관은 부지 선정 문제가 있어서 아직 추진이 안 되고 있다. 차츰차츰 하나씩 해나가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위령탑이 시민들에게 공개되더라도 코로나19로 인해 제막식은 내년 봄으로 미뤄질 예정이다.

관련 조례를 대표발의했던 김혜정 대구시의원(더불어민주당)도 “저도 의원이 되기 전엔 10월항쟁을 잘 몰랐다. 앞으로도 꾸준히 10월 항쟁을 대구시민들이 알릴 수 있도록 관심을 갖고 지원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2018년 가창수변공원에서 열린 합동위령제에 참석한 채영희 10월항쟁유족회장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유족 몇몇은 지난 10월 1일 조촐하게 위령탑에 모여 제사를 올렸다. 앞으로는 매년 이곳에서 위령제를 지낼 예정이다. 유족들과 시인이 함께 가사를 쓰고, 노래를찾는사람들 문진오 씨가 곡을 입혀 노래한 10월항쟁 추모곡도 만들었다. 가사에는 대구의 아픔이 담겨 있다.

“오세요, 아버지/어머니 한서린/담배연기 타고 /오세요.//오세요, 아버지/어머니 산발한/머리카락 타고/오세요.//대구역 공회당길/붉게 물든 길 걸어/가창골로/오세요.//10월의 하얀 구절초/곱게곱게 핀/사랑길만 짚어/오세요.//해방이 되어도/뒤틀린 이 세상/건국의 푸른 꿈/끌어안고//사랑하는 부모님 처자식/뒤로 두고/10월의 항쟁 속으로/들어가셨죠//생존과 자주와 민주를/외치고는 아~/소식 끊어진 아버지//가세요 가세요/10월의 그리운 이여/사랑길만 짚어/가세요.//(가세요 아버지/10월의 그리운 이여/사랑길만 짚어/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