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교협 시사 칼럼] 우울의 사회성 : 터널의 끝을 향한 희망과 좌절 / 김은영

17:38

우울은 정의상 매우 개인적인 일이다. 2주 이상 다음의 징후들이 나타날 때 우리는 우울을 의심하게 되는데, 이는 우울하고 슬픈 기분을 매일 느끼거나, 전과 달리 생활에서 즐거움이나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갑작스러운 체중 변화나 수면의 변화 등을 동반하는 경우를 말한다. 또한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하거나 반대로 동작이 둔해질 수 있고, 모든 일이 무가치한 것처럼 느껴지면서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 나아가 집중력이 감퇴하거나 무슨 일이든 결정을 내리기 힘들어지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자꾸만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징후들이 학교, 직업 등의 사회적 생활을 심각하게 저해할 때, 우리는 이를 우울 삽화로 규정하고 주요우울장애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정의는 우울이란 현상이 지극히 개인적인 일임을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우울에 대한 경험적 연구들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행동주의 심리학자인 셀리그만(Seligman)이 보여준 실험이 그 예이다. 일반적으로 고전적 조건화의 전형에 따르면, 고기를 보고 침을 흘리는 개는 고기를 주기 전에 늘 종소리를 들려주면, 종소리만 들어도 결국 침을 흘리게 된다. 그리고 셀리그만은 고전적 조건화에 대한 실험을 하던 중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고기라는 자극을 전기충격으로 대체하고 전기충격을 가하기 전에 늘 종소리를 개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가설처럼, 개는 종소리만 들어도 전기충격을 받은 것처럼 괴로워했다.

그런데 셀리그만은 여기에서 예상하지 못한 사실을 발견했다. 실험실의 개들에게 전기충격을 피해 도망칠 수 있도록 (낮은 펜스 안에) 풀어주는 처치를 해주었음에도, 개들은 도망치는 대신 그저 엎드려서 고스란히 전기충격을 받았다. 즉, 이미 기존의 실험을 통해 전기 충격의 고통을 경험했던 개는 자신이 무엇을 해도 전기충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학습했고, 도망을 칠 수 있는 상황이 되어도 도망을 치지 않는 무기력을 보였던 것이다. 셀리그만은 이를 학습된 무기력, 혹은 무망감(hopelessness)이라 불렀고, 이를 통해 우울의 기제를 밝히려 했다.

실험실의 그 개는 왜 도망칠 수 있음에도 스스로를 전기충격에 고스란히 내주었던 것일까. 대체 무슨 생각을 했기에 말이다. 셀리그만과 이후 학자들은 우울의 인지기제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들을 내놓았다. 이를 조금 단순화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우울이라는 무망감에 빠지는가의 여부는 “우리가 받은 고통의 이유를 무엇에게 돌리는가”, 즉 귀인(attribution)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가령, 내가 받은 고통의 이유를 나의 내부로 돌린다면, 그리고 이 고통이 늘 변함없이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아가 이 고통이 다른 모든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무망감과 우울에 빠질 것이라는 것이다.

위의 연구 결과들은 우리가 삶에서 어렴풋이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나쁜 일이 생겨 고통받을 때, “내가 못나서야. 다 나 때문이야”라고 스스로에게 책임을 돌리는 태도는 오히려 우리를 우울로 빠지게 하는 반면, “다 너 때문이야” 혹은 “지금 상황 때문이야”라는 외적 귀인을 하는 사람은 성격이 나쁘다는 평을 받을지언정 우울의 수렁에 빠지지는 않는다. 내부 귀인과 외부 귀인이 가져오는 복잡한 결과물인 셈이다.

▲코로나가 종식된 내년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2020년을 지난 세상은 더욱 양분화되고 양극화될 것임에 분명하다. 이미 몇 번의 창업과 좌절을 겪은 자영업자들은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바닥을 칠 수도 있으며, 비좁아진 취업의 문 앞에서 경쟁력을 잃은 청년 실업자들은 숨통이 막혀오는 것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고통의 이유를 ‘코로나 상황’으로 돌릴 수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사진=pixabay.com/)

뉴스에서 들려오는 코로나 백신의 임상시험에 대한 성공적 중간 결과와 긍정적 전망은 그동안 우리가 꽤 긴 터널 속에 있었음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터널 밖 세상에 대한 기대로 들뜸을 느끼게 된다. 자유롭게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하고, 마스크를 쓰지 않고 태양 볕 아래 설 수 있는 자유는 들뜨기에 충분한 희망일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들뜬 기대에서 자꾸 삐져나오는 불안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긴 터널 안에 갇혀 있다 보니, 셀리그만의 개처럼 학습된 무망감에 빠져버린 것일까? 이는 아마도 거리를 걸으며 느낀 변화가 심상치 않아서인 것 같다. 한적해진 골목 상가에서 수많은 영세 자영업자들이 간판을 내리고, 새 간판을 올리고, 다시 이를 내리는 고통에서도 힘들게 견뎌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수많은 청년이 경기침체로 더욱 비좁아진 취업문에 좌절할 법한데도 꿋꿋이 버텨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일까? 혹시 코로나19는 더욱 가혹해진 일상에서 이들이 묵묵히 인내하고 견딜 수 있도록 외부 귀인의 역할을 해준 게 아니었을까? 우리는 우리의 고통의 이유를 ‘코로나 상황’에 돌릴 수 있었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코로나가 종식된 내년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2020년을 지난 세상은 더욱 양분화되고 양극화될 것임에 분명하다. 세계적인 경기불황으로 명암은 더욱 뚜렷하게 세상을 갈라놓을 것이다. 이미 몇 번의 창업과 좌절을 겪은 자영업자들은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바닥을 칠 수도 있으며, 비좁아진 취업의 문 앞에서 경쟁력을 잃은 청년 실업자들은 숨통이 막혀오는 것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고통의 이유를 ‘코로나 상황’으로 돌릴 수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한층 더 잔인해진 세상에서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모든 불행과 고통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내부 귀인으로의 회귀. 그리고 우울의 극단적인 예후인 자살은 일반적으로 오랜 터널 끝에서 희망이 보인다고 느낄 때, 그리고 동시에 그 희망이 헛된 것이라는 현실을 자각하게 될 때, 발생한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청계천 평화시장의 볕조차 들지 않던 비좁은 공간. 하루 14시간의 장시간 노동이라는 실험실에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전태일에게 묻고 싶다. 그는 도대체 어떤 귀인을 하였기에 절망하지 않고 일어설 수 있었을까? 그가 동료들과 함께 만든 “바보회”라는 이름은 내부 귀인이 얼마나 쉬운 선택지인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그토록 빠지기 쉬운 우울, 무기력, 무망감이라는 수렁에 빠지는 대신, 자신보다 열악한 조건에 놓인 나이 어린 소녀와 여성 노동자들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며, 그저 근로조건을 개선해달라는, 세상에서 가장 상식적이고 인간적인 요구를 내걸 수 있었던 것일까?

그는 스스로를 불살라 우리의 우울이 개인적인 것만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내년이라는 봄은 희망과 기대를 품고 올 것이다. 그리고 그 봄이 양극화라는 더욱 잔인해진 현실을 몰고 올 것임은 더욱 분명하다. 그때, 좌절과 고통을 자신의 내부로 돌리고 모든 분노를 자신에게 쏟아부을 우리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의 고통은 결코 당신 탓만이 아니라고 말이다. 우울은 사회적인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