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맹의 독서 일기] (1) “아감벤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라”?

17:56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1942~ )이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 세계적인 철학자는 우리나라에서도 『호모 사케르』 연작을 비롯한 10권이 넘는 책으로 소개된 핫한 철학자다.(그에 관한 독서일기는 조만간 싣겠다.) 그런데 요즘 아감벤을 검색하면 ‘아감벤 마스크’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를 쓰지 말자’는 ‘난폭한’ 철학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10권 가까이가 제대로 읽지 않은 채로 내 책장에 꽂혀있는 이 ‘훌륭한’ 철학자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조르조 아감벤 [사진=The European Graduate School / EGS]
아감벤을 보면서 나는 많은 물음의 갈래들이 가능하겠다고 생각했다. 외국에 거주하는, 내가 신뢰해도 되겠다고 생각한 어떤 저자의 코로나에 대한 생각과 ‘백신 거부론’을 접하면서 더 많은 물음의 갈래로 나누어졌다. 도대체 우리의 사고체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어떤 주장에 대해 우리가 찬반으로만 대응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삶은 늘 ‘과잉결정(overdetermination)’되는 것이어서 그 어떤 하나가 그 무언가를 전적으로 지시하고 결정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생각과 말의 끝이 지시하는 벡터로서의 방향이고 또 그 방향들의 소실점을 표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감벤의 코로나에 대한 생각들은 이탈리아 quodlibet이라는 출판사의 아감벤 블로그에 실려 있다.(https://www.quodlibet.it/giorgio-agamben-chiarimenti) 그중 몇 가지를 발췌하고 구글 번역기로 돌려 대략적인 뜻을 살펴보았다.

-2020년 2월 26일: 환자의 4%만이 집중 치료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진짜 상황이라면 왜 언론과 당국은 공포 분위기를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움직임에 심각한 제한을 두고, 생활과 노동의 정상적인 작동을 중단하는 예외 상태를 일으키는 것인가? 정부가 부과한 자유의 제한은 정부에 의해 유도된 안보에 대한 열망일 뿐이다.

-2020년 3월 17일: 나라를 마비시킨 공포의 물결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첫 번째 것은 우리 사회가 더 이상 벌거벗은 삶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인들은 모든 것, 정상적인 생활, 사회관계, 일, 우정, 사랑, 종교적 신념, 정치적 신념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다. 그것은 ‘벌거벗은 삶’이다. 1미터를 멀리 유지해야만 하는 가슴 졸임. 죽은 자는 장례식을 받을 자격도 없으며 우리는 가까운 이들의 시신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지 못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사는 데 익숙해져야 하는가? 생존 외에는 다른 가치가 없는 사회란 무엇인가? 예외적인 국가가 이제 정상 상태가 되었다.

-2020년 7월 30일: 법학자들은 비상사태가 보수적이라고 말하지만, 예외 상태는 차라리 혁신적이다. 비상사태는 가능한 한 빨리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 사용되지만 예외 상태는 기존의 규율을 벗어나 새로운 명령을 부과하는 데 사용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예외 상태가 일시적인 상황이 아니라 바이러스가 사라지고 난 이후에도 언제든지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2020/10/8 “얼굴이라는 것은 인간을 빼면 다른 어떤 동물에도 존재할 수 없으며, 성격을 표현한다(는 키케로의 말을 아감벤은 인용하면서)1 오직 인간만이 얼굴을 갖고 있으며, 오직 인간만이 자신의 외모와 다른 인간들과의 소통을 자신의 근본적 경험으로 만들며, 오직 인간만이 얼굴을 자신의 진리의 장소로 만든다. 이 때문에 얼굴은 정치의 장소이다. 그래서 얼굴은 인간들이 말하고 교환하는 모든 것이 정초될 수 있는 정치의 조건 자체이다. 인간은 얼굴을 바라봄으로써 서로를 인식(승인)하고 서로에 대해 열정적일 수 있고, 유사성과 다양성, 거리와 근접성을 지각한다. 자신의 얼굴을 포기하기로, 도처에서 시민들의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기로 한 나라는, 그러므로 모든 정치적 차원을 스스로 지워버린 나라이다. 매순간 무제한적 통제에 종속된 이 텅 빈 공간에서, 개인들은 이제 서로 고립된 채 움직이고 있다. 그들은 자기네 공동체의 즉각적이고 감각 가능한 기반을 잃어버리고, 얼굴 없는 이름을 향한 메시지를 교환할 뿐이다. 더 이상 얼굴 없는 이름을 향한.”

아감벤은 이탈리아나 다른 국가들의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반응을 비이성적이며 완전히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코로나 전염은 매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반적인 독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고 이에 대한 정부의 과도한 반응은 예외 상태를 정상적인 패러다임으로 사용하는 경향일 뿐이라는 것이다. 테러가 예외 상태의 구실로부터 소진됨에 따라 새로운 구실로 ‘전염병의 발명’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아감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한 학자는 ‘77세의 이 난폭한 남자’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감벤의 이러한 주장들은 주변에서 듣는 익숙한 주장이기도 하고 가끔 우리 스스로가 자문하는 것이다. ‘이것, 진짜 맞는 상황인가?’하는.

참고로 아감벤이 이런 주장을 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인가 찾아보았다. 2021년 1월 6일 기준으로 6000만 인구를 가진 이탈리아의 코로나19 하루 신규 확진자 수는 2만331명, 하루 사망자 수는 548명. 누적 확진자 수는 220만1천945명, 누적 사망자 수는 7만6천877명이다.(연합뉴스 2021/1/7) 우리가 보기에 엄청난 숫자다. 앞의 아감벤의 3월 17일 글이 쓰일 무렵 이탈리아의 상황이 (우리가 보기에?) 매우 심각했다는 것은 국내 언론에도 소개된 바 있다.

그리고 팩트 체크를 위해, 자주 주장되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은 독감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감염과 비슷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림, COVID-19 또는 계절인플루엔자에 대한 프랑스 입원 환자의 집중 치료 지원 및 사망률, 입원 연령별

이 그림은 2020년 3월 1일에서 6월 30일 사이 프랑스 병원에 입원한 코로나 환자와 2018년 12월 1일에서 2019년 2월 28일 사이 프랑스 병원에 입원한 독감 환자를 비교2한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것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감염보다 3배 정도 사망률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다르게 찾아본 영국의 의학 잡지 BMJ는 2020년 12월 15일 자 저널을 통해 독감에 비해 코로나로 인한 영국인의 사망률이 5배 높다고 발표하였다.3 어쨌거나 코로나로 인한 치명률이 독감보다 높다는 것은 팩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대략 60세 이하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중증 감염이 독감과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고, 60세 이상이 되면 코로나 감염에 의한 치사율이 급격하게 증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코로나 문제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간단하게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독감과 코로나 감염이 비슷하다는 이야기는 60세 이하에서는 맞을 수 있지만 60세 이상에서는 틀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결론 내리는 것은 모든 의미에서 옳지 않다. 미셸 푸코는 근대 이전의 사회가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사회’라면 근대 이후는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사회’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 말에 따라 ‘노동과 경제’를 위해 60세 이하에게는 ‘자유’를 주고 60세 이상에게는 격리하여 알아서 살게 하거나 죽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남는 질문은 그 ‘세계적 석학’이 왜 이렇게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진 결론을 고수하는가이다. 물론 아감벤의 ‘얼굴’은 단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얼굴만은 아니다. “얼굴(volto)은 안면(viso)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목적없는 수단』이라는 책에서 아감벤은 말한다.

[사진=pixabay]

그가 말하는 얼굴은 “열림이며 소통 가능성”이다. 또한, 현실과는 동떨어지지만 그의 지적은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명심해야 할 중요한 지점을 짚고 있기도 하다. 우리가 우리의 생활과 경영을 일시적으로 멈추었을 때 그것은 우리 민주주의 공동체 전체의 묵시적 동의에 의한 것이라고 가정되어야 하지 ‘예외 상태’를 통제하고 통치하는 정부의 행정적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가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지난 12월에 요양병원 종사자의 하루 ‘동선 관리 대장’을 매일 기록할 것과 종사자의 사적 모임을 금지하는 질병청 행정 명령 공문을 본 적이 있다. 만약 기관에서 코로나 환자 발생 시 구상권을 청구하겠다는 으름장도 덧 붙여 있었다. 내가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났는지 일일이 다 보고하라는 것이다. 지금은 단지 권고 사항이라고 한 발 빼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러한 행정적 제한은 앞으로 더 많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이것은 명백히 민주주의의 후퇴인 것이고 우리가 침묵할 때 그 퇴행은 더 잦아질 것이다.

한편으로, 아감벤에 대한 곤란함은 그의 철학 이론 자체에 내재한 것인지 모른다. 진태원4은 지젝, 바디우 등의 철학자와 함께 아감벤을 ‘좌파 메시아주의 사상가’로 분류할 수 있다고 말한바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 및 자유민주주의 체제와의 급진적이고 전면적인 단절’을 주장하지만 사변적이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나 국가에 대한 구체적 분석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것은 차차 독서 일기에서 물어보기로 하자.

아감벤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길었다. 이 글들을 시작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모든 정치적인 것에 대해서, 민주주의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믿고 있다고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물음을 던져 보자는 것이다. COVID-19는 우리에게 이미 다가온, 그러나 더 진지하게 사유하지 못한 현재의 위기로부터 우리가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절박함을 준 것 같다. 현실과 동떨어진, 공허한 사변과 가상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인식하라! (Sed Intelligere! 스피노자)

  1. ‘얼굴과 마스크’로 제목 붙여진 이 부분은 웹상의 김상운 선생의 번역을 참조. 아감벤의 얼굴에 대한 논의는 아감벤. 『목적없는 수단-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 중 8장 얼굴을 참조하라.
  2. Prof Lionel Piroth, MD et al. Comparison of the characteristics, morbidity, and mortality of COVID-19 and seasonal influenza: a nationwide, population-based retrospective cohort study. 『THE LANCET』. December 17, 2020.
    (https://www.thelancet.com/journals/lanres/article/PIIS2213-2600(20)30527-0/fulltext)
  3. https://www.webmd.com/lung/news/20201218/covid-19-is-far-more-lethal-damaging-than-flu-data-shows#1
  4. 진태원.「좌파 메시아주의라는 이름의 욕망」.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그린비.2019 참조